◆창작 작품

행복이라는 낱말

배꼽마당 2012. 11. 9. 15:10

                            행복이라는 낱말

 

2007년 1월 11일 오후 9:27

 

12월 초에 내리는 첫눈은 몹시도 아름다웠다. 기분 좋게 움츠리던 초겨울의 날씨가 해거름 무렵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오랜 세월 동안 벼르고 참았던 감정을 일순간에 폭발시키려는 듯 첫눈이란 존재가 고즈녘한 시골 학교의 주변 공간을 많이 흥분시켜 놓은 것이다.

"선생님 눈이 와요!"

아이들의 마음이나, 중년이 되어있는 나 자신이나 순간엔 괜히 가슴이 설레이고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첫눈이 내리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는 착각에 순간 빠져들었다.

'그래 너 참 잘한다! 더 열심히 내리거라. 더 열심히! 제발 그치지 말고 더 많이 내리거라!'

첫눈 내리는 시간이 짧을까 봐 괜히 가슴을 졸이며 난 창문 밖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눈 때문에 교통 두절이 되건 말건, 좀더 오랫동안 더 많이 내렸으면 하는 기대감이 어린 아이 마음 그대로였다. 주변이 온통 가난하여도 눈이 올 때의 시골은 언제나 부자가 되는 것 같다. 온 천지가 백설로 뒤덮이면 말 그대로 풍요의 요람이 되니까 눈이 올 때만큼은 시골에 산다는 게 무척 행복해지는 것이다.

'히히 좋은 것! 참 좋은 것!'

철없는 아이처럼 나는 이내 순진해지기 시작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한 존재가 두 개의 인격체로 변신하듯이 난 생활에 찌든 중년이 아닌, 10대의 어린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이곳 함양은 남부지방 치고는 확실히 눈이 많이 내린다. 순수함과 풍요를 자연의 조물주가 이곳에 무한히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참 고마운 일이지 않는가!
퇴근 시간까지 청초하고 깨끗한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원하게 드라이브를 해 보는 거야! 첫눈이 오는 기분을 실로 오랜만에 나 혼자서 만끽 해 보는 거야!'

유림에서 마천쪽으로 가는 찻길은 도로 포장을 한 이후론 차량이 훨씬 많아졌는데 오늘만큼은 차가 너무 뜸해서 전세를 낸 기분이었다. 오늘밤의 풍광을 만끽하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었다.

'하하 다 큰 사람이 어린 아이처럼 놀고 있네!'

뒤에서 누군가가 비웃는 것 같았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왜 간섭하니?'

난 씩 웃으면서 멋쩍은 독백과 함께 첫눈오는 밤의 찻길을 질주해 나갔다. 법화산과 지리산의 함양독바위 아래 한쟁이골 사이로 형성된 엄천강의 골바람은 첫눈 오는 대기의 불안 탓인지 생각보다 무척 드세었다.
하얀 눈발과 함께 어두움이 밤의 운치를 더해주는데 나는 눈발의 총알 세레를 뚫고 나가는 무적의 용사가 된 듯한 짜릿한 쾌감을 느끼면서 꼬불꼬불한 산길을 제법 달려 보았다.
장관이었다. 하나 거짓없이 난 동화속의 주인공이 저절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찬 밤 바람을 가르며 동화속의 소년은, 작은 힘으로 그 큰 무쇠 덩이의 승용차를 몰고 도로위를 달리고 있는 중이다.

엑셀레이더를 밟고 있는 발가락 끝이 상당히 시려움을 느끼고서야 첫눈 오는 밤의 온도가 어지간히 차가워 졌음을 감지했다.
히터를 켰다.
엔진의 가열이 많이 되었던지 금세 따뜻한 바람이 차의 내부를 포근한 감촉으로 데우기 시작했다. 아득한 하늘의 공간 사이로 헤드라이터의 밝은 불빛에 노출되는 세찬 눈보라는 제법 흥분을 한 듯, 낮 동안의 차분하던 그 모습보다는 많이 도도해져 있었다.
문정위의 용유담을 종점으로 해서 돌아오는 길엔 첫눈의 감촉을 음미하고 싶어서 차창문을 살그머니 내려보았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살을 에는듯한 찬 바람과 진눈개비가 사정없이 차의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게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잽싸게 도어를 올리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장난이 아니었어!'

가슴팎까지 저려오는 차가움 때문이었는지 히터로 데운 차의 내부가 온돌방의 아랫목처럼 더욱 따스하게 느껴졌다.
첫눈오는 아늑함의 즐거움이 아니라 밤에 내리는 첫눈의 모습은 잔인할 정도의 소름끼치는 하이드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무엇인지도 모르게 작은 행복 하나를 느꼈다. 유치한 행복의 느낌이었는지 몰라도, 그것은 바깥의 차가움에 대비한 차안의 새삼스러운 따스함의 느낌 때문에 그랬다고 멋쩍게 결론을 지어 보았다.
승용차의 얇은 유리 하나 사이를 두고 바깥의 세계와 안의 세계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차체라는 보호막 속에 잘 싸여진 나는 다시 어머니의 따스한 품속에 안겨진 어린 아이가 된 듯 했다.

'요지경이야! 차가움을 감지하고 나서야 따스함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는 나의 감성 세포도 이중성을 갖고 있었던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빗물을 삼키고서 해탈했다던 원효대사의 에피소드와는 차원이 다를지라도, 나같은 소인배에게서 느껴지는 작은 것 무엇 하나가 있음직 했다.

"옛날엔 우리 동네 사람들은 함양 시장에 오고 갈 땐 꼭 40리 길을 걸어다녔다고 했어!"
"그런걸 무슨 새삼스런 얘기라고 해요?"

"지금 그 길을 편안하게 차안에 앉아서, 그것도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가고 있잖아! 옛날을 생각하면서 새삼스런 즐거움을 느껴 보라고 그랬지!"

"구석기 소리 그만 하세요. 당신은 지금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잖소! 어디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자기 혼자뿐이라고 착각 하나봐!"

무심코 마누라에게 내뱉은 소리는 본전도 못찾고 말의 꼬리가 잘려져 버린 기억이 났다. 요즘은 확실히 사람들의 감성 세포가 많이 무뎌져 있다고 단정해 보았다. 유행가의 가사에서 그렇고, 영화나 소설의 소재 자체가 감각적이고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총 한자루로 적군을 쓰러뜨리면 참 좋아라고 박수쳤던 옛날 영화에서, 지금은 한방에 수백명을 쓰러뜨려야 주인공 대접을 해주고 있는데, 21세기 영화의 주인공은 혼자서 몇 천명의 적군을 인플레시켜 쓰러뜨려야 대접 받을지 모를 일이다.

작은 데에서도 많은 감동을 하고 감사해야 하는 현대적 소재는 참으로 많은데, 문제는 우리들이 무디어지고 지친 감성적 요소들을 더욱 예리하도록 가꾸고 캐어내는데 있지 않을까! 하고 소인배의 넋두리를 읊조려 본다.

우울증 증세가 제법 있었다던 어느 후배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문제 해결에 대한 여러번의 실패로 야기된 심한 열등 의식과 좌절감이 곧바로 우울증으로 변화된 것 같았는데, 그는 비오는 어느날 소나기를 맞으며 종합병원의 응급실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했다.

비가 오는 그날따라 응급 환자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죽어 나가는 사람, 환자뿐 아니라 그들을 따라온 보호자들조차 이 세상의 불행을 몽땅 싹쓸이해서 가슴속에 짓뭉개진 사람같이 보였다했다.
건강한 가슴과 싱싱한 팔다리가 살아 꿈틀거리는 자신이, 다시금 응급실 앞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새삼 느껴보았다고 했다.
상대적인 사실을 목격하거나 느껴보고 새삼스러움을 감지하는 우리네 사람들에게 이중적 감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그는 상대방의 불행을 보고서야 자신이 행복한 놈이라는 것을 느꼈다했다. 유치한 사실일지 몰라도 숨어 있던 자신의 행복 세포를 찾아낸 셈이 된다.

제법 시간 깨나 지나서야 집에 당도할 쯤엔 길 바닥에 눈이 쌓여갔다. 첫눈 오는 것 치고 제법이다 싶었다.

'기특한 것! 그래 교통 두절이 되건 말건, 온세상이 하얗게 되도록 저녁 내내 실컷 내리거라!'
아늑하고 조용한 시골에서의 눈 오는 풍경은 참으로 좋았다. 그것도 약간의 시간적 여유와 알맞은 공간에서 시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겨울의 백설을 음미해 본다는 것은 행복이었다.
잃어버린 포근함과 마음의 청초함을 겨울의 눈은 나에게 선물해주었다. 그것도 지리산 자락에서 가져다 주는 순수가 있어서 더욱 좋았다.

(1998년도에 써 놓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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