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작품

무명시대

배꼽마당 2012. 11. 9. 15:06

                                          무명시대

2006년 9월 27일 오전 11:40

 

"오늘도 또 술 처마셨나? 이눔아! 콱 돼지거라. 이눔아! 사흘이 멀다 하고 저눔의 술만 퍼 마셔대니 쯧쯧쯧"

서른 네 살의 청년의 얼굴엔 취기가 올라 벌그레한 모습으로 눅눅한 자기의 방구석으로 나동그라지면서 금세 곯아떨어졌다.

토목기사의 자격증을 어렵게 따서 건설회사의 사원으로, 그것도 산업 역군으로 한참 잘 나갈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회사의 부도로 인해 실직한 상태이다. 자신의 실직상황이 모든 인생 스케줄을 흐트러지게 해버렸다. 방 두 칸짜리 전세방을 얻을 때까지 결혼식을 미루고 적당하게 동거를 시작한 지 반년도 채 못 되어 운수 사납게도 그녀는 어느날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퇴직을 할 때에도 두 달이나 넘게 동료들과 투쟁을 하다시피 얻어낸 퇴직금이 겨우 500만원 정도였으니 그나마 자신을 몸담을 새 회사를 찾아본다고 헤맨 탓에 돈은 두 달도 못가서 바닥이 나고 말았다.

버는 돈은 없고 생활 자금마저 바닥이 나자,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한 칸짜리 전세 1000만원을 빼기로 하였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고는 소형 중고승용차 한 대와 전세금을 빼낸 1000만원의 현금이 전부인 셈이다.
일찍 장가를 간 친구 몇몇은 벌써 초등학교의 학부모가 되어 있어 가끔 만나 소주잔을 비울 때면 으레히 자기 자식 얘기가 튀어나왔다.

"넌 올해 또 넘길래?"

생활이 매우 안정되어 포만감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중년 생활인의 말투이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점점 강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좀 기다려 봐!"

"에이, 짜식. 넌 임마 백수 주제에 눈은 높아 가지구."

요즘은 그것보다 더 고역스러운 것은 자기를 조금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안부를 물어 올 때면 일일이 IMF의 희생자라고 변명을 하는 것이 일과가 되다시피 한지도 벌써 오래다.

빼낸 전세금 통장도 이젠 겨우 500정도밖에 남질 않았다. 아직도 젊으니까, 혹시 다시 취직이 될 때면 승용차는 꼭 필요하다고, 그리고 할머니의 신경통 치료하러 갈 때면 온 동네 사람이 다 애용하는 유일한 차니까! 억제로 핑계를 대면서 고물 승용차는 처분하지 않았다.

문제는 승용차 놈이 먹어대는 양이 상당하다는데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재산의 절반은 저놈의 고물 차가 먹어 치운 셈이다. 오를 대로 올라버린 휘발유하며, 그래도 석 달에 한번은 엔진오일을 갈아야 했고, 자동차세, 면허세, 고속도로 주행료, 거기다가 두 번의 과속주행 벌금, 음주운전으로 인해 전봇대에 박아버린 앞 범퍼의 수리비, 이 모두를 합하여 계산을 해보면 자신의 목을 더 조르고 있는 것은 저놈의 차였다.

거기다가 자기 수중에서 통장의 숫자를 줄여 나가는 놈은 또 핸드폰이라는 괴물이다. 비싼 전화요금 때문에 절약을 하지만, 술을 한잔하고 날 때면 그래도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 자체를 알려주는 중매쟁이는 핸드폰뿐이다. 혹시 모를 일은 자기가 싫다고 행방 불명된 옛 그녀한테서 걸려 올지도 모를 목소리를 기다리는 미련 때문에, 그는 그 어느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핸드폰은 버리지 않기로 했다.

주변의 그 모두가 제대로 되어 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숙식의 해결은 삶의 마지막 안식처인 고향에서 해결하고 있다. 몇 마지기 되지도 않은 논이지만 그래도 밥 굶는 수준은 아니기에 그는 아직까지 숨이 막힐 지경은 아니었다. 문제는 할머니의 짜증과 자신을 이해 못하는 주변의 등살에 기분이 몹시 나쁠 뿐이다.

술이 한잔 거나하게 취해질수록 눈자위 주위에 어른거리는 그 무엇이 있었다. 결혼을 약속하고 같이 생활을 해온 자기의 그녀와는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실상은 결혼을 한 거나 다를 바 없었는데, 그런 자기의 그녀가 어느 날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지금 깨알이 쏟아지던 그녀와의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다.

지금이 고독하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온 뇌리를 감싸 돌고 있는 환각의 존재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지금이라도 금세 그 예쁜 미소를 머금으면서 자신의 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얼굴은 참으로 예뻤다. 상냥한 표정을 지을 때면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고, 여자다운 아름다움이 철철 흘러 넘쳤다. 그녀가 있는 곳이라면 그 주위의 공간은 모두가 매력적인 아름다움으로 물들어 버리는 마력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는 말이다.

그런 그녀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와 그녀의 연결고리는 이 핸드폰뿐이기 때문에, 그는 마치 자기의 수호신인양 언제나 밧데리의 충전을 거듭하면서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일상의 낙의 하나였다.

"야, 임마, 옛날 여자가 네 인생의 전부였더냐? 정신 좀 차려 짜식아! 이 세상에 옛날 그 여자보다 훨씬 좋은 여자들이 얼마나 많다구!"

"뭐라, 이 짜식이!"

그의 주먹이 친구의 뺨으로 날아간 것은 순식간이었고 술이 취해 두 사람이 뒹굴고 난 뒤로부터, 그는 술에 의지해 사는 날이 부쩍 많아졌으며, 친구들을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새끼들, 친구란 놈들도 다 필요 없어. 짜식들 제 까짓게 뭘 안다구. 짜식들"

그가 실직을 하고 고향 시골에 틀어박힌 지도 제법 1년 가까이 되어 가자, 자기의 통장의 숫자도 만 단위로 내려갔다. 고향에서의 일이라고는 느끼한 시골 다방의 한쪽 구석에서 남의 눈을 피해가며 아가씨와 농담 주고받기가 소일거리였지만, 말 그대로 백수에다가 무일푼인 자기를 주인 마담이나 아가씨들은 거지 취급을 하면서 거의 매일 푸대접을 했다.

"야 이눔아. 촌에 있으면 촌놈이지, 네가 무엇이 잘 났다고 목에 힘주고 다녀. 이눔아! 늙은 할미가 일하는 것 좀 도와주면 어디 덧 나냐?
남들은 경운기도 잘도 모는데 넌 하구헌 날 방안에 죽치고 앉아서 무슨 술이나 처 먹구! 이눔아. 콱 돼져라 이눔아."

참 암담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 보았지만 어느 한군데서도 연락이 오는 곳이 없었다.
무한정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도회지의 그 많은 사람들이 실직 상태라고 뉴스에서 보도될 때마다 그의 절망감은 점점 커져 가기만 했다.

"죽일 놈들. 이 세상이 확 뒤집혀져 버려라. 이 망할 놈의 세상!"

술이 취할 때면 집에 들어와서는 할머니와 말씨름을 실컷 하고, 으레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뇌까려대는 말투였다.

"아이구 어느 놈이 저누무 짜식을 낳았는구! 쯧쯧쯧."

차의 부속품들이 오래 된 탓인지 엔진 소리가 비행기 소리처럼 요란한 승용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의 차가 움직일 때면 온동네가 시끄러울 정도로 요란했다.
기껏 나들이를 간다는 것이 4km쯤 떨어진 면내 중심의 다방엘 가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단위 농협엘 들러서 그는 마지막 25만원을 몽땅 찾아서 뒷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정양아! 이리 와 봐라"

"에게, 백수 주제에 내가 옆에 가면 별 통수 있을라구."

"야 이것아, 오빠가 오라 하면 빨랑 와야재. 이 가스나가!"

평상시보다 목에 힘이 더 들어가 있었다.

"너 오늘 나와 같이 시간 보낼래? 모든 걸 책임질 수 있는데."

"에게게게, 오늘 오빠 웬일이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타이밍을 맞춰 그 말이 정말 잘 나왔다는 듯, 그는 뒷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뭉치를 쑥꺼내 테이블 위에 탁 놓는다.

"와! 오빠 오늘 부자네! 이게 웬 돈이야? 혹시 어디서 슬쩍한 것 아니야?"

그는 하루살이처럼 그날 오후를 제법 그럴싸하게 인간대접을 받으면서 보낼 수 있었다.
돈의 위력에 새삼 감탄하면서 자신의 비참한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잊기로 했다.
요즘은 그의 핸드폰 벨이 울리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이 세상 모두가 자기의 적이라고 몇 번이나 되뇌이어도 별 통수 없었다.

'왜 이 세상을 사는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 난 지금 밥만 축내는 식충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나’라는 존재를 거부하고 있으며, 내 스스로도 나를 지탱하기가 힘이 들고, 모든 존재에게 부담만 되고 있는 말 그대로 있으나마나하는 존재인 셈이다. 난 그냥 비계덩어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의미 할 뿐, 시간 만 축내는 이 세상의 벌레 같은 존재이다. 친구들도, 자기 아니면 이 세상을 아무 의미가 없다고 귓가에 속삭거리던 그녀도 나로부터 멀어져 갔으며, 단 한사람의 직계 혈육인 할머 니마저도 자신을 지겨워하며 하나의 짐 덩어리로만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 나는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이다. 돼지우리에서 꿀꿀거리며 매일 먹고 자고 놀고 하는 돼지도 인간에게 맛있는 고깃덩이를 제공해 주는 매력 덩어리가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다. 벌어 놓은 돈만 다 까 먹었어. 이제 누구한테 의지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야. 그래 나도 체면이 있지. 80이 다 되어 가는 노인네의 등살을 뜯어먹고 사는 빈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새로운 노력을 해야 하는 거야.'

며칠 전부터 그는 방에서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틀 후 읍내의 생명보험 직원이 한번 들리는 것 외에 집 주변은 조용했다. 할머니와의 말씨름도 며칠간은 없었으며, 조용한 집 분위기를 이웃 사람들은 속으로 의아해할 정도였다.

'본인 사망시 6000만원 지급'
이란 보험 계약서를 요모조모 뜯어보고, 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또 고민에 빠진 것이다.

'이놈의 보험쟁이들마저도 날 무시하는구먼. 죽을 때 고기값이라도 만들어 할머니에게 봉사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는 자연사 내지는 불의의 사고와 같은 자살로 위장을 해야만 보험금을 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한가지 고민에 빠진 것은 만약에 자기가 불의의 사고로 죽을 경우 문서에 까막눈인 할머니가 과연 보험증을 가지고 보험금을 타 낼지에 의구심을 가진 것이다. 글자에 대해서는 전혀 무식인 할머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손자는, 보험 사원이 알아서 일을 잘 처리해 돈을 가져다준다 해도 할머니께서는 재수 없는 돈이라 하면서 수령하기를 거부할 그런 인격체라는 것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할머니를 조금씩, 그것도 자연스럽게 설득을 시킨 연후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할머니! 서랍 안에 나에 관한 여러 서류들이 있거든요. 내가 혹시 멀리 가거든 이 서류들 을 잘 챙겨 놓았다가 마을 이장님에게 보여주셔요. 알았어요? 정말 잘 챙겨 놓으셔요!"

"야 이눔아, 네 놈이 이 세상을 끝이라도 낼 껴? 이눔아!"

모든 계획을 마친 그는 자동차사고로 위장을 하기로 결심했다. 자연스럽게, 피치 못할 교통사고 사망으로 위장할 계획이었다. 자동차보험의 종류도 있었지만, 차 보험금을 내지 않은지가 1년 반이나 넘어서 다시 보험에 가입하려고 하면 과정이 복잡할 것 같아 그는 그냥 생명보험 하나만 선택하기로 했다.

뉴스에 보면 어리숙한 놈들이 죽기 전에 여러 개의 보험에 가입했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서, 자기만 헛수고를 하고는 쇠고랑을 차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는 않겠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용의주도한 치밀성도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는 자동차의 앞바퀴에다가 날카로운 송곳으로 가는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단단한 타이어의 공기 압력 때문이었는지 송곳으로 힘껏 찔러 보았지만 깊숙이 들어가지는 않아서 망치로 몇 번이나 때려 박은 후에야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고속으로 달리면 타이어는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쏠려 교통사고가 날 것이고, 그러면 자기는 죽게 될 것이며, 이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이별을 고할 것이고, 그래도 자기를 보살펴 준 할머니에게 자신의 육체를 불사른 비계덩어리의 값을 얼마 정도는 드릴 수 있다는 아주 치밀한 계산까지 하면서 말이다.
유서를 써 놓으면, 사고사가 아닌 자살로 판명되어질 것이고 그러면 만사가 도루묵이 된다.

그는 시골길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승용차를 얹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까지 맺히기 시작했다. 마치 경주용 차를 모는 것처럼 그의 승용차는 굉음을 내며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몇 킬로를 달리던 차는 왼쪽으로 쏠리는가 싶더니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를 세게 들이박고는 한 바퀴 구르더니 난간을 뚫고 몇 미터 정도의 논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래 이젠 잘 될 거야!'

몇 분 후 렉카가 도착함과 동시에 119 차량, 경찰차가 도착을 했다.
1주일 후였다. 그는 병원의 일반 환자실에 입원이 된 상태였고, 자기의 곁엔 연신 눈자위가 퉁퉁 부어 오른 할머니가 며칠 밤을 지새웠는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상태로 손자를 간호하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드냐? 야 이눔아! 그래 그 잘난 보험금을 타낼려고 죽기로 작정을 해! 이눔 아. 넌 우리 집의 마지막 3대 독자란 말이다. 이눔아. 어이구우우……."

멀뚱하게 눈을 뜬 손자의 모습을 확인한 할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만, 애처로운 듯 또 울먹거린다.

"죽기는 왜 죽어. 이눔아. 이 살기 좋은 세상 놔두고. 이 늙은 할미는 어떡 하라구. 네 놈 죽고 나 혼자 살라고?"

같이 입원을 하고 있는 병실의 환자와 보호자들의 따가운 시선들이 그에게로 아까부터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열흘 후에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불행인지 천만다행인지, 그는 질척한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져서 충격이 덜한 탓에 약간의 찰과상과 근육이 부어 오르는 경상으로 끝이 나버려, 치밀한 자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준오씨! 나하고 술이나 한잔 할까요?"

마치 벼르고 있었다는 듯, 퇴원하는 병원의 입구에서 자기와 계약을 한 생명보험사의 직원이 턱 버티고 서 있었다.
보험회사 직원의 모습을 보자 그는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면서 약간의 당황을 했다.
그는 분명히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교통사고 라지만 타이어를 마모시킨 후 자동차를 과속으로 운전한 것은 보험회사 직원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죄를 지은 것이다. 자살이야 자기 마음대로의 자유이겠지만, 생명보험에 가입을 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가입을 한 이후의 자살 소동은 분명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는 죄를 지은 죄수의 입장에서 그를 순순히 따라갔다. 병원 가까이에 있는 실비집 코너로 들어간 후 보험 사원은 마치 근엄한 표정과 함께 부드러운 얼굴 표정으로 그를 대면했다. 무슨 불호령이 떨어져도 그는 감수를 하리라 다짐을 하면서 내심 많은 긴장을 하고 있었다. 6000만원의 보험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고, 보험사원의 말에 따라 일종의 사기죄가 성립되게 한다면 자신은 사법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쯤은 인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준오씨! 이번에 큰 계획을 세웠더만요?"

" ! "

"열흘 전 이준오씨가 타이어에다 일부러 구멍을 내었던 그 송곳이 바로 이것이지요?"

자신의 정곡을 찌르자 피가 거꾸로 회전이 되는 듯, 약간의 현기증까지 있었다.
소름까지 돋았다.

"맞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런 것을 따질 게재가 되질 못했다. 연거푸 두어 잔을 비운후 그는 말문을 다시 열기 시작했다.

"나의 존재는 이 세상에 짐밖에 되질 않아요. 많이 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죽으려구 타이어에 빵구를 내었던 것이고요. 제초제를 마신다든지, 목을 매어 자살을 한다는 것은 너무 유치해서 교통사고로 자살을 할려구 했었던 것이고요."

그는 술기운을 빌어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다.
가만히 옆에서 그의 말을 들어주면서 같이 동조를 하듯 연신 고개까지 끄떡였다. 영락없이 보험 사원은 사업적인 자세가 아닌 상담자의 자세였다.

"그깟 일로 죽으려고 했다고 나무랄성 싶겠지만, 나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그 어느 누구도 사람 대접을 해주지 않는단 말씀입니다."

"이준오씨, 결혼은 했었습니까?"

"뭐, 결혼이랄 것까지는 없고 한 몇 달 동안 결혼할 여자와 동거를 한 적이 있었지요."

소주 한 병을 이준오 혼자서 거의 비워 갈 무렵, 이야기는 독백을 하듯이 횡설수설하며 계속되었다. 같이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보험 사원의 자세에 더 기운을 얻은 그는 이야기의 톤도 함께 높아져 갔다.
보험사원을 처음 보았을 때의 긴장감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겠군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한가지를 잘못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 ? "

"계획적으로 죽으려구 했더라면…."

" ? "

"뭐 거창한 철학적 얘기가 아니구요. 사람을 단지 동물적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젊고 싱싱한 육체덩어리를 보험금 6000만원과 교환할려구 했었다면 이준오씨가 엄청나게 계산을 잘못 하신것 같더군요."

" ? "

" 자, 생각을 해봅시다. 옛날 흑인 노예를 사고 팔던 사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사람을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하면서 사람의 가격이 매겨지기도 했었고, 우리 나라 옛날 소설 속의 심청이는 쌀 삼백석에 팔리기도 했구. "

" ? "

" 불법이지만 비공식적으로 거래되어지고 있는 장기 매매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부잣집 사람이 콩팥에 문제가 있어 콩팥을 구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간의 이식을 성공했다는 뉴스는 들어 보셨지요? "

" 아! 예. "

"간 하나를 판매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돈 1억이 어디 대수겠습니까? 그것도 당신같이 젊고 싱싱한 간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줄을 설 겝니다. 오해 마십쇼. 이것은 그냥 죽는다고 가정을 하고 꺼내는 이야기니까."

이제 들어 줘야 하는 사람은 이준오였다. 다시 그는 학생이 되어 사람의 가격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가격은 돈으로 측정되어질 수 없는 무한대의 값이겠지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박찬호의 오른팔 가격은 얼마이겠습니까?"

" ! "

"길게 말할 필요 없이 우리의 오장육부는 마치 이 지구의 5대양 6대주를 닮아서 아주 신비스럽게 만들어진 구조 같아요. 거기다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뜨거운 가슴의 가격은 얼마이겠습니까?"

이준오는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술맛이 참으로 오랜만에 달착지근했다. 혈액이 옛날보다 훨씬 수월하게 순환이 되는 것 같았다.

뜨거운 가슴이란 말에 몹시 흥분이 되었다.
온 전신이 뜨거워지면서 부드럽기까지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할머니에게 무릎을 꿇었다.

"할머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할머니는 서랍 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들고는 말없이 그에게 건넸다.

"네가 차 사고 나던 그날, 네 앞으로 온 편지다."

봉투의 겉면에는 H건설회사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이곳 저곳에 넣었어도 아무 반응이 없더니만 그것도 조건이 아주 좋은 H건설회사에 합격을 한 것이다.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0월 0일자로 정식 출근을 하시기 바람.'
그의 몸이 가벼워졌다.

'나도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할 자격이 갖추어진 거야.'

충전시켜 놓았던 핸드폰의 벨소리가 참으로 오랜만에 울렸다. 이상하게 그에게 좋은 일이 연거푸 터지고 있는 듯했다. 이번 전화도 무척 좋은 일일 것 같아서 그는 얼른 밖으로 나와서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이준오입니다."

상대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이준오입니다."

한참만에 저쪽에서 서먹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건 상대쪽에서 몹시 긴장을 한 듯했다.

"너 선화 맞지? 선화야. 선화 너 말좀 해봐!"

"여기, 준오씨 시골집 앞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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