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추억이야기

이상한 전깃불

배꼽마당 2012. 11. 8. 14:16

이상한 전깃불

 

2006년 12월 31일 오후 10:32

 

지리산 아래에 있는 엄천골에는 일찍부터 전기가 들어 왔었다. 그 전기불은 1960년대 중반부터 마을마다 현대식 문명의 기기로써 역할을 톡톡히 한 위대한 작품이기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사실에 대해 아주 의아하게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엄천골이라 함은 60년대 중반으로 볼때 아주 오지 마을로 통했을 텐데 어떻게 전기가 들어 올 수 있었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확실히 전기불이 집집마다 켜졌다는 것을 내가 기억을 하고 있다.

전봇대는 길쭉한 서까래 같은 나무 기둥에다가 코르타르를 발라 비에 젖어도 썪지 않게 했으며 전봇대의 모든 것은 모두 나무 제품이었고 전기줄은 새까만 비닐 피복을 입힌 줄이었으며 그 피복 안에는 약간 굵은 동선이 들어 있었다.

전기줄은 두 줄이었으며 중간중간 선을 이어 나가면서 마을마다 전기줄 공사를 했는데 전봇대를 세우기가 어중간한 곳은 감나무에 전기줄을 이어 나갔다.

요즘처럼 한국전력에서 공급을 해주는 그런 전기는 아니었다.

전력 공급의 원천지는 절터 마을 지금의 양지 횟집 그 장소에 있었던 터어빈 정미소였다.

낮에는 터이빈을 돌려 그것을 동력으로 삼아 쌀이나 밀가루를 빻는 정미소 역할을 했고 밤이 되면 그 터어빈을 돌려 전원 동력 장치에 연결시켜 전기를 발생시켜 집집마다 전기를 공급해 주는 그런 전기였다.

원래 절터의 정미소는 물레방아를 돌려 정미를 햇었는데 어느날부터 엄천강물을 막아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터어빈을 동력으로 하는 장치를 해 놓은 것을 보았다.

학교를 오고 갈 때 우리 마을에서 화남 학교로 가기 위해서 지름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절터 정미소 앞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강물을 막아 놓은 봇둑 위로 조심스럽게 걸어 가면 양말이 젖지 않고 쉽게 갈 수 있었는데 우리는 빠르게 갈수 있는 그 길을 많이 이용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신기하게 돌아가고 있는 터어빈 구경을 하곤 했는데 물을 가두어 두는 높이가 약 5m 정도 되었고 그 아래엔 육중한 터어빈이 낙차를 이용하여 물이 빠져 나갈 때 터어빈도 함께 돌아 가는 것을 신기한 눈초리로 구경을 하곤 했다.

그 전기는 밤중 내내 켜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밤 11시쯤 되면 저절로 불이 꺼져 버렸다. 사람들이 잠을 잘 시간이 되면 불이 꺼져 버렸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 잘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은 보조용으로 호롱불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밤 늦게까지 일을 하는 집에서는 호롱불과 전기불을 함께 사용할수 밖에 없었다.

그 전기불은 참 편리했다. 많이 쓰고 적게 쓰고 하는 것이 없었고 한집에 한등만 있었으며 전기의 통제는 전적으로 절터 정미소에서 관활하였으며 바람이 불거나 눈비가 올 때 자주 전기줄이 끊어지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럴때마다 절터 정미소까지 직접 가서 전기줄이 끊어졌다고 신고를 했고 그러면 전기 기사가 출장을 나와서 전기즐을 잇곤 했다.

우리집으로 들어 오는 전기줄이 가장 잘 끊어졌는데 그 이유는 아랫집의 감나무를 전봇대 삼아 매달아 놓은 전기줄이 바람에 흔들릴때 그 유격으로 인해 전기줄이 자주 끊어졌던 것이다.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한겨울이 되면 엄천강이 꽁꽁 얼어버렸고 봇둑위로 부풀어 버린 얼음 조각들이 함께 얼어서 물의 흐름을 막았으며 쉽게 흘러가야 할 물이 얼음 조각들로 범벅이 되어 물의 양이 적게 흐를 때 터어빈을 돌리는 함도 함께 적어졌고 그럴 때면 가물가물하다가 나중엔 불이 꺼져 버리는 것이었다.

절터 정미소의 전기 기사가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면 긴 장대를 들고 나와서 수로에 얼어 버린 얼음을 깨어 놓으면 1시간 정도 잘 공급되다가 결국엔 불이 꺼져 버리곤 했다.

동강 마을과 정터 마을 사이에 봇둑이 있었다는 것을 모두 기억을 할 것이다. 그 봇둑의 힘으로 엄천강물은 언제나 큰 강물처럼 고여 있었으며 나룻배를 띄우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겨울에 줄을 이용하여 고기떼를 한곳에 모아 투망으로 피래미를 잡는 장소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넘실대며 물이 가득한 엄천강의 풍경은 풍경화처럼 그림을 그려 댔는데 바로 봇둑에 가둬진 물의 힘이었으며 그 물로 전기도 만들고 벼, 보리, 밀을 찧어 댔던 것이다.

이런 원시적인 전기불도 70년대 중반에 접어 들어 한국 전력에서 공급되는 안정적인 전기로 대체될 때까지 엄천골의 추억을 참 많이도 만들어 낸 사실이 있었다.

70년대부터 새마을 운동이 엄천골짜기까지 불어닥쳤고 마을 안길 넓히기, 지붕 개량하기부터 새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자석식 전화기 한대가 동강마을에 한대 들어 왔는데 그 전화는 마을 이장님댁에서 관리하였고 멀리 객지에 살고 있는 친인척에게 전화를 할 때에는 지역마다 계산서에 적혀 있는 요금을 내고 전화기 옆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돌려 전화 교환양에게 상대편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30분- 1시간 정도 기다려 전화 통화를 하던 또 하나의 문명의 기기가 보급됩과 함께 마을마다 현대식 전봇대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키가 작고 볼품없는 옛날 전봇대와 키가 아주 크며 밀쭉한 현대식 전봇대와 대조적으로 길가나 논둑에 세워짐과 동시에 시커먼 전봇대는 추억속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 후로는 엄천골의 사람들에게 옛날 전기에 대해 아련한 존재로만 기억되다가 결국에는 그 기억에서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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