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 4일 화요일 비
가랑비보다 약간 굵게 내리는 비의 상태여서 마루 밑에 뒹굴고 있는 얇은 비닐 조각을 머리위에 둘러쓰고서 밖엘 나왔다. 그렇다고 발길이 당겨지는 어떤 곳도 없었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몸을 감싸고 대강 묶으니 마치 세련된 도포를 입은 것 같았다. 바람에 비닐 옷이 펄럭여 대며 나름대로 멋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찢어진 비닐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완벽한 것을 구한 다는 것은 사치한 생각일 것이다. 뚜렷하게 목표점이 없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옮겨지는 곳은 마을 뒤의 잿마당 고개였다. 온 동네가 고요했고 사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곱게곱게 내리는 겨울비가 비닐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조용한 분위기를 서럽게 만들 뿐이었다. 어쩌면 겨울비는 나를 위해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방안에 혼자서 뒤척이다가 무거워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괜히 우울해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계속 내리고 있는 겨울 빗길을 무작정 걸어보고 싶어 이번엔 대강 목적지를 정해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른 풀잎에 머금어 있는 빗물에 옷이 젖어도 좋다고 단정하고 질컥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잿마당 길을 지나서 수듬판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괜히 겨울 비를 맞으면서 집하고는 제법 먼 산길을 그냥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는 그 사이 조금씩 그쳐 가고 있었고 아주 가느다란 실비가 되어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옷이 빗물에 젖어 축축해져 옴은 아랑곳 하지 않고 겨울 산길의 맑은 공기 속에 마음이 상쾌해져 옴을 느꼈다. 밭뙈기에 세워 놓은 수숫단을 보니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그 수숫단이 생각났다. 소년이 수숫단을 한 아름 안아서 오두막 모양으로 가운데를 파 헤쳐 서울에서 이사 온 소녀에게 비를 피하게 하는 그런 장면이 연상되었다. 그런 상상을 해 보니 참 아름답다는 느낌도 함께 들었다.
어느새 나는 소나기 속에 나오는 시골 소년이었지만 현실은 그냥 썰렁하기만 한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지했다. 그 소나기속의 수숫단이라 생각하고 수숫단 속의 수숫대를 하나 집어 껍질을 곱게 벗기고는 그 수숫대를 어깨에 걸머쥐고 산길을 걸었다. 그냥 심심해서였다. 저 멀리 왕산 산봉우리 하고 강 건너 법화산의 산봉우리는 뿌연 안개에 싸여 주변은 희뿌옇기만 했다. 겨울에 안개는 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비를 맞은 산길 밭 이랑에는 보리싹이 파릇한 모양새를 하고 아주 만족한 모습이었다. 작년 봄에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꺾꽂이를 하겠다고 봄비가 듬뿍 내린 밭 이랑을 걷다가 신발에 질컹한 진흙 덩이가 묻어 쩔쩔 매었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작년 그 버드나무도 빗물을 머금고 기분 좋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면에서 우리 마을에 보조한 60만원으로 마을 상수도 공사를 하고 있는 곳을 둘러보고, 닥나무가 보이는 곳에 다가가서 혹시 닥나무 버섯이 있는가도 살펴 보기도 하고 닥버섯은 커녕 신발에 듬뿍 묻은 진흙 덩이하고 닥나무 옹이 사이에 던져져 있는 주먹마한 공 하나를 찾아내기만 했다. 누군가가 이곳으로 공을 굴러 온 것도 모르고 잊어버린 공을 찾다가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혹시 공의 주인이 다시 와서 우연하게 찾으라고 그 자리에 공을 다시 두었다.
당산 나무 아래의 개울에서 신발에 묻은 흙 덩이를 씻었다. 거대한 당산 나무의 가지에는 작고 예쁜 빗방울이 촘촘히 매달려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어느새 우리집과는 제법 멀리 평촌 마을 뒤쪽의 당산나무가 있는 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당산나무를 뒤로 하고 동네 안길을 걷기 시작했다. 호연이 누나 집이 있는 곳까지 왔다. 도시에서 회사 생활을 하고 있을 호연이 누나가 지금 집에 있을 리는 만무하고 그래도 호기심에 그 집 안을 빼꼼히 들여다 보다가 안에서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 너 비가 오는데 어디 갔다 오니?”
호연이 누나의 어머니께서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갑자기 낯이 화끈거렸다. 괜히 겸연쩍어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리고는 금세 그 집에서 멀리 벗어났다. 동네길을 벗어나서 다시 좀 전에 길을 걸었던 잿마당 길로 접어 들었다. 역시 수숫단 무덤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편소설 소나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소년이 부러워졌다. 그 소나기 속의 소년 옆에는 언제나 예쁜 소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이 좋기는 하지만 어떨 땐 비가 내린 흔적은 잔인해서 괴로울 때도 많다. 발가락까지 시려 오는 겨울 날씨는 겨울 찬 기운이 나름대로 특색이겠지만 속속깊이 파고드는 시린 느낌이 무척 괴롭다. 오늘같이 시무룩하게 눈 대신 겨울비가 내리는 날엔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다. 2월로 접어들고 보면 이른 봄이 다 되었다고 생각해 보았다. 설날이 며칠 뒤인지라 작년의 설날 가까이는 무척 추웠는데 가뭄 끝에 이렇게 비가 내려주니 하느님께 고맙다고나 해야할까! 비가 계속 내려 대니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울적할 것 같아 마루에 나왔다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당에서 몇 바퀴 빙 돌아보다가 결국엔 집 바깥으로 나왔다. 집 안에 있다가는 괜한 서러움 같은 일종의 우울 상태가 계속 될 것 같아서였다.
가랑비보다 약간 굵게 내리는 비의 상태여서 마루 밑에 뒹굴고 있는 얇은 비닐 조각을 머리위에 둘러쓰고서 밖엘 나왔다. 그렇다고 발길이 당겨지는 어떤 곳도 없었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몸을 감싸고 대강 묶으니 마치 세련된 도포를 입은 것 같았다. 바람에 비닐 옷이 펄럭여 대며 나름대로 멋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찢어진 비닐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완벽한 것을 구한 다는 것은 사치한 생각일 것이다. 뚜렷하게 목표점이 없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옮겨지는 곳은 마을 뒤의 잿마당 고개였다. 온 동네가 고요했고 사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곱게곱게 내리는 겨울비가 비닐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조용한 분위기를 서럽게 만들 뿐이었다. 어쩌면 겨울비는 나를 위해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방안에 혼자서 뒤척이다가 무거워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괜히 우울해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계속 내리고 있는 겨울 빗길을 무작정 걸어보고 싶어 이번엔 대강 목적지를 정해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른 풀잎에 머금어 있는 빗물에 옷이 젖어도 좋다고 단정하고 질컥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잿마당 길을 지나서 수듬판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괜히 겨울 비를 맞으면서 집하고는 제법 먼 산길을 그냥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는 그 사이 조금씩 그쳐 가고 있었고 아주 가느다란 실비가 되어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옷이 빗물에 젖어 축축해져 옴은 아랑곳 하지 않고 겨울 산길의 맑은 공기 속에 마음이 상쾌해져 옴을 느꼈다. 밭뙈기에 세워 놓은 수숫단을 보니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그 수숫단이 생각났다. 소년이 수숫단을 한 아름 안아서 오두막 모양으로 가운데를 파 헤쳐 서울에서 이사 온 소녀에게 비를 피하게 하는 그런 장면이 연상되었다. 그런 상상을 해 보니 참 아름답다는 느낌도 함께 들었다.
어느새 나는 소나기 속에 나오는 시골 소년이었지만 현실은 그냥 썰렁하기만 한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지했다. 그 소나기속의 수숫단이라 생각하고 수숫단 속의 수숫대를 하나 집어 껍질을 곱게 벗기고는 그 수숫대를 어깨에 걸머쥐고 산길을 걸었다. 그냥 심심해서였다. 저 멀리 왕산 산봉우리 하고 강 건너 법화산의 산봉우리는 뿌연 안개에 싸여 주변은 희뿌옇기만 했다. 겨울에 안개는 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비를 맞은 산길 밭 이랑에는 보리싹이 파릇한 모양새를 하고 아주 만족한 모습이었다. 작년 봄에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꺾꽂이를 하겠다고 봄비가 듬뿍 내린 밭 이랑을 걷다가 신발에 질컹한 진흙 덩이가 묻어 쩔쩔 매었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작년 그 버드나무도 빗물을 머금고 기분 좋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면에서 우리 마을에 보조한 60만원으로 마을 상수도 공사를 하고 있는 곳을 둘러보고, 닥나무가 보이는 곳에 다가가서 혹시 닥나무 버섯이 있는가도 살펴 보기도 하고 닥버섯은 커녕 신발에 듬뿍 묻은 진흙 덩이하고 닥나무 옹이 사이에 던져져 있는 주먹마한 공 하나를 찾아내기만 했다. 누군가가 이곳으로 공을 굴러 온 것도 모르고 잊어버린 공을 찾다가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혹시 공의 주인이 다시 와서 우연하게 찾으라고 그 자리에 공을 다시 두었다.
당산 나무 아래의 개울에서 신발에 묻은 흙 덩이를 씻었다. 거대한 당산 나무의 가지에는 작고 예쁜 빗방울이 촘촘히 매달려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어느새 우리집과는 제법 멀리 평촌 마을 뒤쪽의 당산나무가 있는 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당산나무를 뒤로 하고 동네 안길을 걷기 시작했다. 호연이 누나 집이 있는 곳까지 왔다. 도시에서 회사 생활을 하고 있을 호연이 누나가 지금 집에 있을 리는 만무하고 그래도 호기심에 그 집 안을 빼꼼히 들여다 보다가 안에서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 너 비가 오는데 어디 갔다 오니?”
호연이 누나의 어머니께서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갑자기 낯이 화끈거렸다. 괜히 겸연쩍어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리고는 금세 그 집에서 멀리 벗어났다. 동네길을 벗어나서 다시 좀 전에 길을 걸었던 잿마당 길로 접어 들었다. 역시 수숫단 무덤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편소설 소나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소년이 부러워졌다. 그 소나기 속의 소년 옆에는 언제나 예쁜 소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산길을 걷는 나 자신이 처량해짐을 느끼며 겨울비에 흠뻑 젖어있는 산길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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