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추억이야기

기억으로 더듬어 보는 60년대 고향 모습

배꼽마당 2012. 11. 8. 13:41

 

2012년 2월 20일 오후 4:59

 

고향 집 바깥을 나서면 울퉁불퉁하면서도 좁은 마을길이 버티고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강 쪽으로 가다보면 길 옆엔 풀들이

수북하게 자라는 논 두렁 밭두렁이 시골길 풍경을 열심히 만들어 냈다. 여름 장마철에 약간 무너진 곳은  자연 그대로 사람들의

발자국에 잘 다져진 길이 만들어졌고 그 길은 곧장 강가의 나룻터로 이어졌다. 또 한갈래 길은 옆 동네 평촌으로 가는 오솔길과

이샛들로 이어지는 농로가 구불구불 이어져 고향길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곡선길이 쭈욱 이어져 있었다.
  대부분 우리 동네에서 외지로 나아갈 수 잇는 길은 강을 건너는 엄천강가 나룻터까지였고 그 다음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동호마을로 이어졌으며 또 한 갈래의 강을 건너는 길은 원기 마을 앞의 징검다리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은 제법 둘러가야

했으며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방법 보다 제법 멀었기 때문에 대부분 나룻배를 이용하여 우리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바깥으로

나가곤 했다.
  나룻배!  지리산 상류인 고향의 강은 물의 깊이가 얉아 노를 젓는 방식이 아닌 대나무로 강 바닥을 짚어 나룻배를 움직이는

지극히 근육의 힘으로 움직이는 도강 방법이 있었다. 뱃사공이 나룻터 옆에 살고 잇었지만 사람들이 건널 때마다 일일이 건너게

해주지는 못했고,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은 직접 배를 움직여 강을 건넜다. 그런 탓에 엄천강가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나룻배를 잘 몰았다. 

그런데 이 나룻배를 움직이는데는 큰 문제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이쪽에 배가 있을 때는 그냥 배를 몰고 가면 되는데

강 건네에 배가 걸쳐져 있을 때가 문제가 되곤 했다. 물이 조금 불어 있을때는 징검다리도 이용할수 없었고 오직 나룻배로만

강을 건너야 했으며 강 건너편의 배가 스스로 이쪽으로 올 수 없었고 그럴 때마다 강 저쪽에서 누군가가 배를 끌고 오기를

기다려야 했으며, 더 바쁠 때는 이쪽에서 고함을 쳐 누군가가 배를 몰고 강 이쪽으로 와 주는 수고스러움의 덕을 보아야만 했다.

그런 추억같은 고향의 나룻배의 기억이 아련하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른들은 지혜를 짜 낸 결과가 줄배 등장이었다. 강의 이쪽과 저쪽 사이에 튼튼한 철근 줄을

이어 놓고 그 줄에 쇠고리를 달아 그 고리에 나일론 줄을 이어 놓으면 강의 이 쪽에서 줄을 잡아 당기면 강 건너편에 있던

배가 끌려 올 수 있었고 강 건너편의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나룻배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서, 멀리 나들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강을 건너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징검다리나,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으며 그 나룻배까지 가는 길은  강나룻길이었다. 강나룻길은 고운 모래와 잔디, 강 어귀에서 자라는

풀들로 이루어졌으며 그곳에서 고운 모래를 이용한 아이들의 놀이 장소도 되었으며 나룻배로 오고 가는  사람들의 길목이어서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정겨운 장소이기도 했다.

 자혜마을과 모실 함허정 바로 아래에도 줄배가 있었고, 화계장에 갈 때 자주 이용했던 모실마을과 장동 마을 사이에도

나룻배가 있었고, 엄천강 상 하류의 마을이 있는 곳엔 나룻배가 존재했다. 요즘처럼 튼튼한 교량이 만들어지기 전의 일이다. 

강의 이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동강마을의 친구들은 지금 생각해 보니 매스컴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의

아이들이었다.  마을마다 아이들로 넘쳐났고, 그만큼 나룻배를 이용한 아이들도 참 많았다.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굉장히 많았다. 산업화가 되기 전이었으니 지리산 엄천골 구석마다 큰 마을이 아주 많았고

인구 밀도도 아주 높았다.
  세월이 지나  다른 지역처럼 사람들은 전국 각지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들 갔는데 요즘에 와서는

퇴직자가 늘어가고 있다.

 함께 놀면서 강나루길을 걷고 배를 타고 오고 갔던 그 사람들은 머리가 희끗해지고 퇴직 소리가 자꾸 들린다.
  고향 마을마다 그 많던 아이들 모습이 그리워진다. 사람들로 북적대던 화계장(산청군 금서면 화계)의 모습과 그 화계장에서

국화빵을 사 먹은 기억이 자꾸 그리워진다. 허름한 난전에서 팔던 국수를 보고 그냥 군침만 삼켰던 그곳에서 국수 한 그릇을

꼭 비우고 싶은데 지금은 국수 파는 곳이 사라져 버려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화계장은 주암, 그믐골, 버드리, 벌말, 화촌,

벼린개, 방곡, 묵은터, 문정, 운서, 한남, 원기, 동호, 동강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심지어는 멀리 오봉마을에서도 화계장을 이용했다. 그런 화계장이 요즘은 존재하기는 해도 언제나 썰렁하다.

 5일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세대수가 아주 많아서 큰 동네를 이루었는데 사라진 마을도 많고, 70년대를 깃점으로 이농화가 되어

초라한 고향이 되어 있다. 새로운 분위기라면 도시에서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세련되게 집을 짓고 이사를 온 덕분에

옛날과는 다른 고향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특색이다.
 나룻배를 타고 걸어서 화계장엘 가는 그림과 나룻배를 타고 옛 찬구들과 학교엘 가는 꿈을 요즘엔 자주 꾼다.

그 꿈은 그리움으로 자꾸 바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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