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이야기

지리산 빨치산의 무덤

배꼽마당 2012. 11. 9. 15:30

지리산 빨치산의 무덤

 

2007년 11월 6일 오전 10:50

 

 

 

 

  고향 뒷동산에 이름도 모르는 빨치산의 무덤 하나가 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아 주변엔 나무가 수북하게 자라 볼상 사나울 정도의 묘인데 무덤의 형태는 돌멩이를 얹어 놓은 애장 무덤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 무덤이 빨치산의 무덤이라는 것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할머니들의 입에서 수없이 전해 들었던 사실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그 주변엔 빨갱이 귀신이 나온다고 얼씬거리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참 무서웠던 곳이다.
세월과 함께 다시 찾아 본 곳은 주변이 온통 잡목들로 무성했고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을것 같은 그런 환경이 되어 있었다.

  왜 빨치산이 지리산 아래의 마을 뒷동산에 묻혀 있을까?
  그 이야기는 과거로 돌아가야 의문이 풀려진다.

6.25가 발발하고 국군이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몰리다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공산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패잔병들이 지리산으로 몰려 재기를 노리던 그 시기, 지리산 아래 작은 마을에서는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언론에서 많이 오르내리는 산청 함양 양민학살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2만여명이나 되는 빨치산 잔당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빨치산 소탕 작전의 대 성과는 대성골 전투였다.
이런 빨치산 잔당들을 완전하게 소탕하기 위해서 지리산 동부 왕산 인근의 빨치산 소탕 책임을 맡은 부대는 한동석 대대장의 부대였는데 1951년 2월 7일 (작전명령 5호 견벽청야 육군 11사단장 최덕신, 9연대장 오익경) 3대대장 한동석 부대가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 작전에 돌입을 하게 되고 이상한 사건 하나가 발생하게 된다.

산청 함양 부근의 빨치산 부대는 대부분 지역 주민들 마을에서 부대를 주둔시켰고 집집마다 강제로 방 하나씩을 얻어 주둔하고 있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살기 위해서 그네들에게 밥도 지어주고 어쩔 수 없는 협조를 해야만 했다.

산청 수철리 쪽에서 왕산을 넘어 가현마을로 진입을 한 6.25.당시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작전명령 제 207호,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부대는 주민들이 빨치산과 모두 한통속이라고 판단하여 사람, 집, 가축, 식량 모두를 제거하는 전략 즉 견벽청야 작전에 돌입을 하게 되고 가현 방곡 점촌 마을 주민들 모두를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양민을 모두 통비 분자로 간주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부대가 이틀 후 거창 신원까지 진주를 해서 역시 신원 마을 모두를 학살하는 신원 사건 바로 그 부대인 것이다.

당시의 마을 사람들 증언과 기록 문서를 정리해 본다면 한동석 대대는 세개의 소대를 빨치산 소탕 공격 부대로 편성하여 거창 사건을 일으킨 부대는 방곡, 가현, 점촌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서주로 가서 다시 꼭 같은 일을 자행하게 되고 이틀 후에 거창까지 가서 같은을 반복하게 된다.

또 한 소대 병력은 명령에 따라 엄천강 주변의 문정, 한남, 동강, 남호리 주민들 모두를 견벽청야 작전 지시를 받고 방곡 방식과 같은 방법으로 작전 전개를 하려 했으나 당시 휴천면장이 이를 극구 반대를 하여 엄천강 주변의 주민들은 모두 살아나게 되었다.

한동석 대대중 또 한 소대 병력은 견벽청야 작전의 정보를 알고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지금의 공개바위가 있는 모래골, 후동을 거쳐 한쟁이골 능선을 탐색하고 꽃봉산으로 후방 교란 작전을 감행하게 되는데 고향 뒷동산에 있는 빨치산 무덤은 이 와중에 사살 당한 빨치산이었던 것이다.

엄천골 주민들을 견벽청야 작전대로 시행하려던 한동석 부대중 1개 소대는 방곡- 점촌을 거쳐 논길을 따라 기암터 마을 입구로 들어서게 된다. 당시에 기암터 마을에도 빨치산 여러곳에 분산된 대대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그 빨치산들은 자기들의 천국인양 경계를 늦추고 있었으며 마을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평화롭게만 보였기에 빨치산 소탕에 참여한 국군부대는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총을 메고 있는 빨치산의 모습을 보고 즉시 상호간 신분 확인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에는 국군들은 철모를 쓰고 M1 소총이나 칼빈소총을 멘 전통적인 국군 복장이었으며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향토 방위대들은 그냥 일반 평상복에 총을 걸머쥔 형태였으니 국군의 입장에서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분간이 어려웠고 빨치산 역시 상대방의 복장으로만 적군으로 간주하기엔 무리가 따랐던 모양이다. 국군으로부터 부터 노획한 총이나 복장 철모를 그네들 역시 사용했기에 정확한 적과 아군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고 그 구분 방법은 암구호였다.

" 동네 바깥에 철모를 쓴 군인들이 억수로 몰려 왔소"

" 그래요! 모두 우리 동무들 부대야요. 이곳엔 개놈들이 올 수 없는 곳이니끼니"

" 저그덕 저그덕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국군이 틀림 없는데~"

" ! "

잽싸게 칼빈총을 들고 집 바깥으로 나간 빨치산 대대장은 400여M 떨어진 곳에서 서로 상대방을 주시하고 피아를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 그 쪽은 누구네 부대요?"

" 거긴 어느 부대 어느 소속이요? "

" 동무 뭐라 했소?"

순간 마을 입구의 논 둑 아래에 있던 빨치산 소탕 부대는 납작하게 엎드려 마을을 향하여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마을에 있던 사람들 모두 적으로 간주를 하여 사격을 가한 것이다. 당시에 마을에는 빨치산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있었었다.

일이 다급해진 것을 짐작한 빨치산 대원들은 잽싸게 무장을 하고 뒷문으로 뒷동산을 향하여 도주를 하기 시작 했다. 빨치산 소탕 부대의 일부 병력은 대원들이 엄호 사격을 가하는 가운데 마을 옆으로 돌아 산으로 도망을 가는 빨치산들에게 조준 사격을 하기도 하였고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한 빨치산들을 사살하기 위하여 마을 입구의 또 다른 논두렁 아래에서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던 중 집 안에 있던 한 빨치산이 도망을 가기전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비상 식량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모실댁 처마끝에 매달아 놓은 곶감 한접을 챙기기에 바빴다.

동료 대원들의 엄호 사격속에 마을 가까이 다가가 있던 일부 국군 소대원들은 이 빨치산이 잽싸게 집으로 들어 가는 모습이 감지되었고 이를 놓칠세라 그를 추격하던 중 곶감 한접을 들고 도망을 가는 빨치산 한 사람에게 불과 10M 근접 거리에서 집중 사격을 하였다. 그 빨치산은 마당 한가운데서 피를 토하며 즉사를 하게 된다.

그 많던 빨치산 무리들은 불과 10여분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바렸고 남은 사람들은 마을 주민들 뿐이었다.

여러 정황을 살핀 국군 부대는 연이어 산쪽으로 사격을 가하여 마을까지 얼씬거리지 못하게 쫓아낸 그 부대가 한동석 대대의 한 소대였다는 것을 유족회에서 조사한 당시의 산청 함양 양민 학살 사건의 진상에서 드러나고 있다.

고향 마을의 뒷산에 있는 빨치산 무덤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을 할머니들께서 수십년동안 반복된 대화의 소재로 등장했던 6.25때의 빨갱이 이야기이다.

빨치산들은 국군을 보고 '개놈' 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것도, 뒷동산의 돌멩이 무덤이 빨치산의 무덤이라는 것도, 당산 나무가 있는 곳, 누구네 뒷간 구석에서 죽은 빨치산, 뒷동산 감나무 아래에서 총 맞아 죽은 빨치산의 이야기도 60년대엔 제법 정확하고 생생하게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그런 증언들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런 이야기를 해 줄 사람들은 이제 거의 모두 저 세상 사람들이 되어 버렸고, 그나마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분들은 당시에 죽은 빨치산의 숫자가 늘어 났다가 어떨때는 줄어 들기도 하는 그런 현상의 연속이다.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무용담들도 이제는 서서히 잊혀져 가는 고향의 역사가 되어 버렸다.

뒷동산의 빨치산 무덤은 한밤중에 다시 내려와 자기네 동료의 시체를 땅을 파서 안장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에 주변의 둘을 갖고 와서 대강 묻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60년대 중반에 들었던 이야기이다.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기암터 마을 뒷산의 빨치산 무덤: 실존의 이야기이며 실제 이야기속의 묘소이다)

 


살기 위해서, 사상도 모르고, 적이란는 개념도 없이 그냥 우리편 네편 갈라져 싸웠던 그런 시절이 지리산 아래에서 있었다.
뒷동산에 누워 있는 그 빨치산도 젊음이 있었을 테고 꿈이 있었을테고 그리움이라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 나와 덧 없는 죽음을 맞이했고 그 누구도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고향의 뒷동산에서 서서히 흔적이 사라져 가고만 있었다.

전쟁이 가져다 주는 비극은 언제나 비 이성적이었으며 저 작은 돌 무덤처럼 적군이던 아군이던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가는 처참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며 작은 돌 무덤의 일깨워 주는 삶의 처참함을 한참 되새겨 보아야 할 흔적이고 그것이 우리네 역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