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동부자락 옛 기록물

유두류록(김영조, 1867년)

배꼽마당 2013. 9. 7. 16:22



저자 : 김 영 조(金永祚)(1842~1917)


      

*자는 오겸(五兼) 호는 죽담(竹潭). 산청군 차황면 거주.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의 문하생. 스승 송병선 사후 스승의 문집 <연재집> 발간에 참여.

 



산행일시: 1867년 8월 26일~8월 29일

산행코스: 생초동호리 엄천사지문정동-세동마을송대리벽송사능선

                   어름터골두류암터말바우산막중봉천왕봉.  

- 특징 : 당시의 자료로서는 보기 드물게 송대리에서 민박을 하고 벽송사능선 장구목이 고개를

           넘어서 어름터로 해서 하봉으로 오른 귀한 산행기이다. 두류암은 이미 폐사가 된 듯하며

           주변에 여러 민가가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한편 이 코스는  1611년에 '유몽인'이 거쳐간 코스이기도 하다.(옛산행기편 11번 참조)

- 수록문집: 죽담집(竹潭集)


두류산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수백 리로 일곱 고을의 경계를 감싸고 있으니, 동방에서 일컫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예로부터 위인(偉人)과 석유(碩儒) 대부분이 올라 유람했다.


정묘년(1867) 병오일에 내가 아우 김영우(金永祐), 족제(族弟) 김영문(金永汶)과 함께 숙부와 권농은(權聾隱) 어른을 모시고, 용당(龍堂)에서 단란하게 모여 진경(眞境) 찾는 계획을 세우고, 비로소 출발했다.


점심 때 생림(生林)[*현 산청군 생초면]에 이르러 권정첨(權正瞻)과 함께했다.


고읍(古邑)[*현 생초면 상촌리의 옛지명]에 이르러 하루 묵고, 다음날 엄천(嚴川)을 건너 엄천사 절터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연화동(蓮花洞)에 이르러 고개를 넘으니, 오래된 마을에 정자가 있는데, 그 고을 이름을 문헌(文獻)*[현 휴천면 문정동]이라고 하니, 바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쉬었던 곳이다. 마침 예전에 알던 유주응(柳周應)을 만나 매우 기뻐서 잠시 머물러 이야기했다.

강을 따라 세동(細洞)[*함양 휴천면 세동마을]현에 이르니, 감나무가 무더기로 서 있고, 닥나무와 뽕나무가 양쪽으로 둘러 있었다. 문수사(文殊寺)[*현 휴천의 문수사]를 향하니, 장소가 매우 깊숙하고 치우쳐 있었다.

저녁에 송대촌(松臺村) [*현 휴천면 송대리]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현 어름터골의 두류암터]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다음 날 박덕원을 시켜 점심을 싸게 하고, 상봉(上峰)[*천왕봉]으로 향했다. 마을 뒤로 고개를 따라 몇 리를 곧장 올라가서, 작은 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골짜기로 들어가니, 수목의 그늘에 가려 해가 보이지 않았다.


좁은 길을 찾아 이십 리를 가서 봉우리 아래 이르니, 산막(山幕)[*현 말바우산막을 일컫는 듯함]이 있었다. 산막 오른쪽에 있는 돌 틈의 샘물이 매우 맑고 시원하여 모두 손으로 떠서 마시고 바위 위에서 쉬었다. 그러다 일어나 이리저리 오가며 동남쪽을 바라보니, 익숙한 산천이 희미한 가운데 거의 다 드러났다. 풀을 밟고 나무를 더위잡고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사방을 돌아보니, 좌우에 기이한 꽃과 풀들이 있는데 모두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십리를 가서 중봉(中峰)에 이르러, 각자 한 덩이의 밥을 먹고, 샘물을 마셨다. 산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니, 상봉이 서쪽과 남쪽 사이에 있는데, 하늘에 꽂힐 듯 솟아 나온 것이 마치 빨아 당기려는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봉우리 아래 이르러, 작은 길을 따라 숲속으로 머리를 숙이고 거의 오 리쯤 가니 불모지가 있었는데, 바로 상봉이다.


비로소 허리를 펴고 사방을 바라보니, 마치 백척간두(百尺竿頭)라 발 디딜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멀리 바라보니, 조선 팔도가 모두 한 눈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시력이 가물가물하여 끝까지 볼 수 없는 것이다.


남쪽으로 바다에 섬이 점점이 있는 것이 마치 바둑돌을 둔 것 같고, 만경창파는 마치 푸른 쪽 같으며, 와룡산(臥龍山), 백운산(白雲山), 자굴산(自崛山), 황매산(黃梅山) 등은 마치 평지 같았다. 위에 일월대(日月臺)가 있는데, 오십여 인이 앉을 만하였고, 돌이 자리처럼 펼쳐져 있으며, 작은 돌이 둘러서 담을 치고 있었다. 아래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돌부처가 있었다. 대부분 방백(方伯), 어사[繡衣], 수령들이 이름을 썼으니, 서상윤(徐相潤), 송훈재(宋勳載), 조연명(趙然明), 조철림(趙徹林)만 대략 기록하고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돌아가야 할 기약이 매우 촉박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자료  : http://www.jiri99.com/index.php?mid=yetsanhanggi&page=4&document_srl=9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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