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사정(邊士貞)
1529∼1596.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과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을 사사(師事)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2,000여명의 의병을 모집,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사후 사헌부장령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운봉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글은 정유재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 전하는 그의 문집 『도탄집(桃灘集)』은 門徒와 知人들로부터 취합한 글들을 그의 증손자(邊瑜)가 편집한 것으로, 후손들의 추모글도 일부 포함되어 있으며, 이 글도 그중 하나이다.
아래의 글중 지리산 엄천골에 존재하는 용유담 묘사가 이채로워 이 자료를 이곳으로 옮겨본다.
방장산 북쪽 수십리 남짓에 한 마을이 있으니 도탄(桃灘)이라 한다. 지난 갑인년(1554)간에, 돌아가신 조부(*변사정)께서 한 두엇의 동지를 이끌고 계곡과 산으로 유람하는 길에 이곳을 지났는데, 그 골안이 탁 트여 넓고 泉石이 맑고 고운 것을 사랑하여 초연히 속세를 벗어나 이곳에서 느긋하게 지내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다음해 봄, 마침내 띠풀을 베어 몇 칸의 집을 짓고 그 이름을 도탄정사(桃灘精舍)라 하였다.
일대에는 긴 강이 비끼어 흐르고 그 아래에는 천 그루의 복숭아나무 숲이 쭉 둘러서 있고 그 사이로 매화나무와 국화를 심어 한가하고도 그윽한 곳으로 만들었다. 왼쪽에는 그림을, 오른쪽에는 책을 두어 반려삼아 지내니 일상사가 다를 바 없었지만, 속된 손님은 물리쳐 이르지(至) 않고 어지러운 세상사는 드물게 들려 구름을 밭갈고 달을 낚으니 그 즐거움이 매우 화락하고 흐뭇하여 名利(*명예와 이익)의 영화로움과 수고로움을 잊고, 구름과 놀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보며 한가로이 지내기를 삼십 여년이었다. [*조부의 행적]
저 천 개의 바위는 빼어남을 다투고 가파른 절벽은 높고 험한데, 바위는 기이하나 괴상하지 않고 거침없이 구불구불 이어진 것을 보니 백장봉(百丈峯)이다. 뭇 봉우리 중첩하고 만 골짜기 다투어 흐르고, 가시나무·녹나무·소나무·전나무가 해를 가리고 하늘과 나란히 선 곳은 반야봉이다. 기이한 봉우리들 둘러서서 사방에 병풍을 친 듯하고, 길은 위태롭고 좁은 골짜기 끝으로 뻗어 낭떠러지로 통하는 곳은 연선봉(蓮仙峯)이다. 삼악(三嶽)에서 특히 빼어나 창공을 받치는 기둥으로 운무가 그 꼭대기를 가두고 별들이 그 위에서 잠드는 곳은 천왕봉이다.
원숭이와 학의 울음소리 숲과 골짜기에 처량하고, 용이 울고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水石 사이에 은은하다. 소슬하여 돌아다니며 구경할 만한 절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 배회할 만한 이름난 곳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 수 없다.
황정(黃精)·자지(紫芝)·복령(茯苓) 등 장생불로의 선약이 이 땅에서 몇 종(種)이나 나는지 알 수 없고, 푸른 고갯마루와 붉은 단애에 도사와 승려가 제멋대로 오가며 모였다 흩어지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서 분주히 장생을 추구하는 무리들 또한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만약 날씨가 따스해지고 맑아지면 새들의 지저귐이 골짜기에 울리고, 나무는 산과 바위를 초록으로 물들이고, 꽃은 만 폭포(萬瀑) 사이에서 붉게 피어나리라.
그럴 때면 혹은 푸른 매를 팔뚝에 앉히고 누런 개를 끌고 종횡으로 쫓아다니며 사냥하는 자도 있고, 혹은 바위 앞에서 명아주 지팡이에 의지하여 석창포 사이를 소요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태양이 허공을 부채질하고 산기운이 찌는 듯 할 때면 높은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맑은 샘에 몸을 씻어 스스로를 깨끗이 하고 낚싯대를 쥐고 갈매기 날으는 물가에 서 있는 자는 엄자릉의 무리일 것이요, 따비와 호미를 메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자는 도연명의 무리일 것이다.
또 장맛비가 처음으로 그치고 혹서(酷暑)도 잠깐만에 사라지고 들판에 가을이 가득하면 벼도 이미 익고 온 강의 물고기도 때맞춰 살쪄 있으니 한가로운 시름과 흥취가 일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놓아버리기도 힘든다.
찬 기운이 계곡가 바위에 이르고 눈보라가 허공중에 흩날리면 千山에 날던 새들 다 끊어지고 온 숲의 옥 같은 약이 서로 비추어 별세계의 맑고 깨끗한 흥취가 이로써 갑절이나 늘어난다.
산속의 경치는 무궁하고 보이지 않는 바 즐거움은 끝이 없으니, 이런 곳에서 六略(*역경·서경·시경·예기·악경·춘추)을 다 기억하기란 어렵다.
아아, 내가 몸소 겪은 전란의 변고가 도탄에까지 옮겨와 옛 전장(田庄)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게다가 小子(*글쓴이 본인)는 흉한 재앙을 거듭 당하고도 오히려 모진 목숨을 연명하였고, 시동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로 예사롭게 오갔으니, 지난 일을 생각하니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먼저 떨어진다.
하물며 비현(飛峴)을 넘고 화천(花川)을 지나 선인께서 노닐며 구경하던 여러 명승지를 멀리 바라보매 삼선대(三仙臺)·이자기(二子磯)·월락동(月落洞)·용유담(龍遊潭)이 눈앞에 역력하니 서글픔이 어떠하겠는가!
용유담의 왼쪽에 높은 바위가 있는데 망악(望嶽)이라 한다. 옥계(玉溪) 노진(盧禛)선생이 일찍이 이곳을 지나다가 천왕봉을 바라보았던 곳이며 그로 인하여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옆에는 금암(琴巖)이 있는데 바위의 무늬가 거문고 현(絃)과 같다고 하여 금암이며, 그 아래에 있는 구암(龜巖)은 거북이 움추린 모양 같기 때문이니, 각기 그 형상에 따라 이름을 지어 붙인 것이다.
무성하고 빽빽하던 복숭아나무 숲은 그 전에 비하여 많이 성글어졌지만 느릅나무 수백 그루가 시냇가를 따라 가지를 흔들며 서 있고 봄이 되어 꽃이 무성하게 피어날 때면 놀러온 사람들이 가리키며 한숨짓고, 승려들이 쉬면서 감탄하며 구경하니 무릉도원이 있다면 여기가 아니겠는가?
지금 비로소 옛터를 새로 일구어 삽시간에 몇 개의 서까래를 엮어 띠집을 이루니 고요하고 깨끗하며 대사립문은 쓸쓸하다. 몇 경(頃)의 자갈밭과 삼 묘(畝)의 쑥대밭은 밭두둑이 줄지 않고 기분좋게 남아 있다.
옛날의 순박한 풍속을 지금 小子가 용렬하여 비록 선인이 남긴 자취를 이어받지는 못했지만, 장차 속된 일을 떨쳐버리고 이 사이에 몸을 깃들여 누워 지내고자 하는 뜻이 있다.
해가 뜨면 숲속의 비가 개이고 구름이 돌아가면 암혈이 어두워지나니, 그로써 밝아지고 어두워지며 변화하는 모습을 알고, 인간세상의 風雨를 듣지 않고 새들과 짝하고 사슴과 벗하며 산에서 채취하고 물에서 낚시하며 천명을 즐기면서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이에 쓴다.
자료: http://www.jiri99.com/index.php?mid=yetsanhanggi&document_srl=392632 (지리산아흔아홉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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