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대기(洗塵臺記)
강대연(姜大延)
방장산은 바다 가운데 삼산의 하나로 크고 깊고 넓기가 인간세상에서 으뜸이다. 거기서 가장 높은 곳을 천왕봉이라 하며, 천왕봉에서 시작된 높고 가파른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그 한 가지가 다시 북쪽으로 십여 리를 달려 불룩하게 솟았으니 각산(角山)‧배산(背山)이라 한다. 마을이 있고 마적동(馬跡洞)이라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이다.
북쪽으로 법화산 기슭을 바라보면 높고 가파른 산이 이마 앞에 솟아 있고, 엄천의 강물이 그 사이를 가르고 흐르는데 그 발원은 백운봉이다. 날아내려 폭포가 되고 휘돌아 흘러 못[潭]이 되었다. 여기에 이르러 맑은 물이 세차게 흘러 몸을 씻고 헤엄칠 수 있다. 산은 높고 골은 깊어 빼어나게 웅장하고 경치는 맑고 곱다. 그윽하고 깊숙한 골짜기가 넓게 열려 어딜 가나 고기 잡고 나무하고 밭 갈고 독서하기에 마땅치 않은 곳이 없다.
마을에서 왼쪽 아래로 몇 백 보를 돌아가면 톱으로 자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둥글고 평평하고 넓어 삼사십 인이 앉을 수 있다. 또 몇 걸음 되지 않는 근처에 맑은 물이 쉼 없이 솟는 샘이 있다. 이에 나는 샘에서 양치하고 바위를 쓸고 앉아 두루 돌아보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만약 이 바위가 이름난 사람이나 통달한 선비를 만났다면 마땅히 《석기(石記)》나 《석보(石譜)》1)에 나오는 태호석이나 황산석과도 서로 겨룰 수 있었을텐데, 외딴 숲속에 자리하여 황량한 땅 무성한 수풀 사이에 묻혀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깝구나!”
그리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부여하여 『세진대(洗塵臺)』라 하였다. 인근의 여러 벗들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문건을 작성하고 약간의 재물을 모아 해마다 모여 강학하는 밑천으로 삼고자 하였다. 또 벼랑에 나란히 성명을 새겨 넣는2) 일을 마치고는 강학하고 술을 마시고 그 일을 가지고 시를 읊었다. 또한 세진대라 명명하게 된 뜻을 여러 동지들에게 고하였다.
「우리들은 불행히도 나라의 전성기에 태어나지 못해 땅바닥을 치고 배를 두드리며 태평가3)를 부르지도 못하고, 멸정(蔑貞)4)의 시대를 당하여 영락하여 산꼭대기와 물가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것은 이 바위와 다를 바가 없으니 후세의 어느 누가 (우리가) 이곳에서 이 일을 논한 것을 기억하겠는가?
옛날 퇴계옹은 천연(天淵)에서 갓끈을 씻었고 남명옹은 덕천(德川)에서 마음을 씻었다.5) 양 선생은 도가 크고 덕이 온전하였음은 물론 살아서 밝은 시절을 만났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지금은 비린내 나는 티끌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과 귀신이 구분되지 않으며 뜻 있는 선비가 은하수를 끌어와6) 도성을 씻고자 하여도 그럴 수 없으니 차라리 저 소부와 허유7)처럼 맑고 차가운 물에 귀를 씻고 어지러운 세상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나는 들었다. 《대학》의 밝은 덕을 밝히는 공부도 거울의 먼지를 제거하면 다시 밝아지는 것과 같다고. 대개 이 마음의 진체(眞體)는 본래 스스로 밝고 깨끗하고 맑아 그저 순수한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와 한 몸처럼 같은데, 기질에 얽매이고 물욕에 가려지면 때로는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그 본체는 원래부터 한결같다.
군자는 이에 깨끗하게 다스리는 공부를 더욱 갈고 닦아 사욕을 이기고 욕심을 막으며, 몸을 깨끗이 하고 덕을 닦으며, 하늘의 어두운 구름을 몰아내고 연못에서 흐리고 더러운 것을 제거하면 더러운 찌꺼기가 깨끗이 변하여 본체가 드러나 눈앞의 사물을 응대할 때 천리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의 온전한 체[全體]와 큰 작용[大用]8)이 밝아지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대학》의 『탕반 장구(湯盤章句)』9)에서 매우 긴요하게 설명하기를, “사람이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악(惡)을 제거하는 것은 마치 그 몸뚱이를 씻어 때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 구절을 깊이 연구하여 완미(玩味)한다면 옛사람들이 공부하던 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천연에서의 탁영(濯纓 *갓끈을 씻는 것)과 덕천에서의 세심(洗心 *마음을 씻는 것) 역시 그 근원은 반드시 여기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공부하여 밝히고자 하는 것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대저 이름이란 것은 실질에 대한 손님이다. 공연히 공부한다는 이름만 있고 일을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 대에는 세상의 어지러운 일만 쌓일 것이네. 나는 여태껏 티끌세상에 빠져 있다가 이제 여러 군자들을 따라 노닐면서 뱃속의 먼지와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의리(義理)에 흠뻑 젖어 다시는 더러움에 물들거나 세속에 휩쓸리는 상태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이어서 이 대에 올라 노닐면서, 착실하게 이 단서를 공부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에서도 광풍제월(光風霽月)10)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며, 또 갈고 닦으면 문득 옥병 속의 맑은 얼음 같은 기상을 보게 될 것이니, 우리 동지들은 어찌 서로 권하며 힘쓰지 않겠는가?
【註】
1) 석기(石記)나 석보(石譜)는 돌의 족보와 같은 것으로, 돌의 계통과 출처 등을 기록하고 품평한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 태호석과 황산석은 기암‧괴석과 수석(壽石)으로 유명하다.
2) 분명 계원들의 이름을 벼랑[峭壁]에 새겼다고 했는데 찾지 못하였다. 눈 밝은 분들이 혹시 찾게 되면 알려 주시라. 입구 길가 바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후에(1904) 세진대 각자와 같이 새겨진 것이다.
3) 『격양가(擊壤歌)』라고도 하는데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요(堯)임금 때 노인들이 배를 두드리고 땅바닥을 치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 한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편히 쉬고,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 밥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
4) 멸정(蔑貞)은 《주역》 「산지박(山地剝)괘」에 나오는 말이다. “… 바른 것을 없애니 흉하다.(蔑貞凶)” 蔑(업신여길 멸)은 滅(멸할 멸)과 통한다. 박(剝)은 깍아내다‧허물다의 뜻이다. 그래서 이 괘는 대체로 정의가 쇠퇴해가는 시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5) 도산서원 앞에 천연대(天淵臺)와 탁영담(濯纓潭)이 있고, 덕천서원 앞에 덕천(德川)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탁영(濯纓)은 이렇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는다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하였다.
원래는 세상이 맑으면 나아가 뜻을 펼치고, 세상이 혼탁하면 물러나 몸을 닦는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세상의 부귀영화에 얽매임 없이 초연하게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격을 수양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와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6) 두보(杜甫)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에 “어찌하면 장사를 얻어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깨끗이 씻어 길이 쓰이지 않게 하나.(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長不用)”하였다. 통영의 세병관(洗兵館)도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7) 중국 요(堯)임금이 은자(隱者)로서 덕망이 높은 허유(許由)에게 나라를 물려주려 하자 허유는 자신의 귀가 더럽혀졌다면서 귀를 씻었고[洗耳], 또 그것을 안 소부(巢父)는 귀씻은 더러운 물을 자신의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하여 상류로 끌고가 물을 먹였다는 얘기가 전한다.
8)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章 주자의 주석에 나오는 말. “힘씀이 오래이고 나서 일단 확 트이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든 사물의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칠음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게 되고, 내 마음의 온전한 체와 큰 쓰임이 밝혀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 而吾心之 全體大用 無不明矣)”
원래 체(體)와 용(用)은 노장과 불교에서 차용한 말이다. 체는 보편적인 원리 같은 것이며, 용은 그 체가 일에 대응하여 나타나는 작용 같은 것이다. 그것을 성리학에서 새로운 뜻을 부여하고 더 정밀하게 체계화하여 전체와 대용이라 이름 붙였다.
9) 《대학》은 원래 《예기(禮記)》중의 한편으로, 주자가 예기에서 독립시켜 편차를 수정하고 『장구(章句)』를 지어 사서(四書)의 하나로 삼았다.
다음은 대학 전문(傳文) 제2장(탕지반명(湯之盤銘)장구)에 나오는 유명한 글이다. 「탕(湯 *은나라의 시조)임금의 목욕통에 새겨진 글에,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주자는 이렇게 주를 붙였다. “반(盤)은 목욕하는 그릇이요, 명(銘)은 그 그릇에 글을 새겨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다. 탕왕은 사람이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악을 제거하는 것이 마치 그 몸을 목욕하여 때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 그릇에 명(銘)으로 새긴 것이다.
10) 광풍제월(光風霽月)은 비 온 뒤의 맑은 바람과 비 갠 하늘에 뜬 달처럼 마음이 깨끗하고 상쾌하며 도량이 넓고 시원함을 가리킴. <출처/宋史 주돈이傳>
세진대기(洗塵臺記)
강용하(姜龍夏)
우리 집안의 종손 우여君1)은 중간에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방장산 마적동에 은거하였다. 마적동은 고승 행호(行乎)2)가 머물렀던 곳이며, 세상에서 지승(地勝 *경치가 뛰어난 땅)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동네는 산의 북쪽 기슭에 있으며 문필봉 아래 평탄한 곳으로 안산(案山 *풍수에서 맞은편에 있는 산)은 법화산이며 그 아래는 용유담이다. 시원하게 트이고 고절(孤絶)하기가 비할 데 없어 길을 가다 지나는 사람들이 거의 신선세계에 비긴다. 그래서 승경(勝景)으로 이름을 드날리고 있는 것인가?
그는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 입산하였는데 매양 부모와 자매의 살아생전의 일을 말할 때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으니 효도와 우애가 도탑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돌아가신 조부모와 부모의 장지가 좋은 자리가 아님을 근심하여 몇 번이나 이장하면서도 가세가 기우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고, 조상의 제례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을까 근심하여 어려운 살림에도 힘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었으니 선조를 위하는 정성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또 종질(從姪)과 생질이 의탁할 곳이 없음을 가엾게 여겨 땅을 개간하여 빚을 갚고 이웃에 베풀도록 살림을 경영하게 하였으니, 이는 화목함이 두텁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자식을 가르칠 땐 일념으로 금석을 뚫을 듯이 하여 마침내 공을 이룰 수 있었다.
일을 당하면 굳세고 과감하여 이해(利害)로써 하지 않고, 강제로 빼앗긴 게 있거나 위급하고 곤란한 지경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 일처럼 여겨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다.
자갈밭을 일구고 띠집에 살면서 비록 자급하지 못하는 가난한 살림에도 손님이 오면 친소(親疏)를 따지지 않고 가진 것이 있고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웃는 얼굴로 두 손을 움켜쥐고 맞아들이니 사람이 지나다가 난초향 가득한 방으로 드는3) 것과 같았다.
이 모든 행실이 밝게 빛나 기록할 만하고, 이런 행적과 이런 경계라면 띠끌 세상에서 멀리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집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아름답고 세진대라는 좋은 이름을 받은 바위가 있는데, 그리로 가 날마다 동지들과 거닐며 산려소요(散慮逍遙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소요함/출전:장자,천자문)한다. 몇 등급 위의 고인(高人)이 아니라면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속세의 먼지는 안과 밖이 각각 다르게 있는데, 안의 먼지는 속세의 물욕에 더럽혀진 마음을 말하며, 밖의 먼지는 속세의 거칠고 잡스런 일을 말한다. 안과 밖의 먼지를 제거할 줄 알면 먼지를 씻는 데[洗塵] 능하다 할 수 있다. 밖으로 외물의 얽매임에 초연하고 안으로 의리에 유연(悠然 *침착하고 여유 있음)하다면 이것을 진실로 세진이라 할 것이다.
원컨대 그대는 “윗일(*외물에 초연한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 할 수 있지만, 아랫일(*의리에 유연한 것)에 대해서는 나도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할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세진대의 주인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니, 힘 쓰시게나!
나에게 그대는 백 세대를 내려오는 오랜 의(誼)가 있으므로 서로 친하게 지내며 자주 어울려 함께 대(臺)에 올라 바람을 맞고 회포를 논한 것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여 훗날 산중의 고사로 갖춰 두고자 한다.
【註】
1) 강지주(姜趾周 1856∼1909) : 본관은 진주(진양), 자는 우여(遇汝), 호는 적은(迹隱). 갑오경장 이후 세상에 뜻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문집에 《적은유고(迹隱遺稿)》가 있다. 1904년 세진대 각자를 새겼다.
2) 조선 초기의 승려. 속성은 해주최씨(海州崔氏). 어려서 출가하여 계행(戒行)이 뛰어났고 효행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법화경》의 이치를 깨달아 천태종의 으뜸이 되었다.
태종이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의 낙성식을 주재하게 하였고, 또 장령산(長領山)에 대자암(大慈庵)을 세우고 주지로 임명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로 임명하였으나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두류산(頭流山)에 금대사(金臺寺)·안국사(安國寺)를 창건하였고, 천관산에 수정사(修淨寺)를 지었다. 왜적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를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도움을 받아 중수하였다(1430-1436).
조선 초기 유생들의 강한 척불론 속에서도 효령대군 등의 귀의를 받아 왕실에 대한 불교 보급에 힘썼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출전《공자가어(孔子家語)》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 같아서 오래되면 그 향기는 못 맡더라도 곧 동화된다”.
▣ 강용하(姜龍夏 1840∼1908) 조선 말의 유학자. 자는 덕일(德一), 호는 무산(武山), 초명은 강신영(姜愼永). 본관은 진주(晉州), 엄천강변 연화동(蓮花洞)에 살았다. 문집으로 《무산유집(武山遺集)》을 남겼다.
洗塵臺記
姜大延
方丈爲海中三山之一而磅礡深廣擅雄於塵寰之表其最高者曰天王峯自天王崛嵂而東陡起爲老將臺又一支北走十餘里隆然而立者曰角山背山而有村曰馬跡余所居也北望法華諸麓岌嶪當額而嚴川之水劈中而出其源發白雲峯而飛爲瀑匯爲潭至此而淸流激湍可濯可泳山高谷深雄之佳麗明媚之勝而幽邃廓闢漁樵耕讀靡適不宜自村下左轉數弓肘而有鋸石圓平寬廣可坐四三十人又有淸泉潝然而出不數武而近余迺漱泉拂石而坐顧瞻咨嗟曰之石也若遇聞人達士則宜與太湖石記黃山石譜相頡頏而寄在窮林埋沒於荒塵茂草之間顧不惜哉因錫嘉曰洗塵臺與隣近諸益謀立契券而鳩若干財爲逐年會講之資又列鐫姓名于峭壁役告訖講飮以歌其事且以命名之義告諸同志曰我輩不幸不生邦家全盛之時擊壤鼓腹以歌太平而値玆蔑貞之秋淪落於山顚水涯者與是石無異後世甚人能記得於此處講此事乎昔退爺濯纓於天淵冥爺洗心於德川夫以兩夫子道大德全而生逢明時猶尙如此況今腥塵滿宇人鬼無分有志之士雖欲挽河洗都而不可得焉則無寧洗耳於淸冷之水不聞塵俗之語如巢許之爲愈乎且吾聞之大學明明德之功如鏡之去塵而復明蓋此心眞體本自光明潔潔淨淨只是粹然天理而一爲氣拘物蔽則有時而昏然其本體則固自如也君子於此須加磨礪澄治之工勝私而窒欲澡身而浴德掃陰雲於太淸去濁穢於澄淵則渣滓渾化本體呈露卽事應物莫非天理之流行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是以朱子於湯盤章句喫緊說下而曰洗濯其心以去惡如沐浴其身去垢深究玩味可見古人爲學之法而天淵之濯纓德川之洗心其原亦未必不出於此吾輩之所當講而明之者顧不在是耶夫名者實之賓也徒有講學之名而不從事於此則反不爲玆臺之塵累乎余是久汨塵土者今從諸君子遊以疏滌肚裏塵而垢而澆灌義理冀免爲合汙同塵之歸繼玆而登於斯遊於斯者講此端緖慥慥不怠則從灑掃而可到霽月光風之境界由刮磨而便見玉壺淸氷之氣像矣凡我同志盍相與勉之
洗塵臺記
姜龍夏
宗君遇汝甫中因世亂隱于方丈山馬跡洞洞卽高僧行乎之所住而世以地勝稱焉蓋洞在山之北麓文筆峯下平夷處而其案爲法華山其下卽龍遊潭爽塏孤絶殆無比類行旅之過者多擬之於仙境故以勝擅名歟君孤露後入山而每語及父母姊妹平日之事則不淚者幾希非篤於孝友而能之乎憂祖考妣及考妣之葬不得地累遷而不慮傾家憂先世祭儀之不備極力拮据以奉香火非誠於爲先而能之乎憫從姪及甥姪之無依斥土以報債置隣而營産非敦於睦姻而能之乎敎子一念透於金石而竟能成功遇事剛果不以利害而有所撓奪見人有急難則如己事而盡心力救之石田茅屋雖貧不自給而客至則勿論親疏不計有無笑容可掬而人之過者如入芝蘭之室此皆群行之焯焯可述者有如此之行而居如許之境則可謂逈出塵界矣然猶有所不慊於心者卜距家數武巖石佳好處錫嘉以洗塵日與同志盤桓而散慮逍遙焉苟非高人數等焉能如是乎夫塵有內外之殊內塵者物欲之塵心也外塵者荒雜之塵事也知去內外之塵則可謂能洗塵矣若夫超然於物累之表悠然於義理之中則是謂眞洗塵矣願君勿謂上項事吾亦能而下項事吾難能推其所能進於所未能則無愧爲洗塵臺主人矣勉旃哉余於君有百世之誼故過從頻數而共登臺上臨風論懷者雅矣因其目擊者而記之以備異日山中故事
자료 출처 : http://jiri99.com/bbs/board.php?bo_table=jiri33&wr_id=335 (지리산 아흔아홉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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