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향자료

[스크랩] 엄천강 이름에 대한 근거자료

배꼽마당 2012. 11. 4. 11:23

현재 국토지리원 표기 지도에 엄천강이 임천강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기에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경상남도 도청 도지사에게 바란다 라는 민원을 제기한 근거자료입니다.

이 자료는 함양군청 게시판, 산청군청 게시판에도 함께 올려졌으며 5년전에도 함양군청에 민원을 제기하였으나 아직까지 아무 반응이 없어 도에 직접 올렸던 것입니다.




(((((( 각종 자료에 나타난 엄천강이란 이름의 근거 ))))))

1. 유두류산기 (박장원 : 1643년)에 나타난 엄천(嚴川)강

오후에 용유담에 도착하여 말 안장을 풀고 쉬었다. 용유담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고 그 위에는 모두 흰돌이 깔려 있었다. 물에 잠긴 돌빛이 깊고 맑았다. 높고 낮은 돌 위에는 수백 명도 족히 앉을 수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돌 위에 앉아 술 몇 잔을 주고 받았다. 악사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돌을 쪼개고 구름을 뚫어 마치 깊은 물 속의 용이 신음하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보낸 뒤 다시 길을 떠났다. 길 옆에는 (엄천강)이 있었다. 또 어느 마을 안에는 폐허가 된 성이 있었다


2.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에 엄천사가 있었고 지금도 그곳을 절터라고 불려지고 있다. 엄천사가 창건된 시기가 지금부터 1120년 전인 통일신라 시대인 883년도인데. 엄천사의 역사를 기술해놓은 엄천사흥폐사적문(嚴川寺興廢事蹟文)에 보면

신라 헌강왕 때 절을 짓고 간판을 내려주기를 엄천사라 하였다.
[엄천]의 뜻은 엄하게 계혜(戒慧)를 지키고 복을 하천의 모래처럼 받는 것은 마치 냇물이 흘러 쉬지 않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엄천이란 말이 지역의 지명을 딴 것이 아니라
불교의 계율을 엄하게 계혜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기 때문에 절이 생긴 이후에 이 고을을 엄천골이라 하였고 절 앞으로 흐르는 냇물을 엄천강이라 부른 것으로 사료됨

3. 광여도에 표기된 엄천(嚴川)과 임천(臨川)

(지도는 지리99 http://jiri99.com/ 지명탐구방 79번 자료참조)

4. 대동여지도에 뚜렷이 구분되어 표기된 엄천(嚴川)과 임천(臨川)

(지도는 지리99 http://jiri99.com/지명탐구방 79번 자료참조)


5. 유두류록(김종직 : 1472년)에 나타난 엄천(嚴川)- 김종직은 함양군 휴천면 엄천사에서 엄천강을 건너 지장사(함양군 휴천면 노장대에 위치했으나 지금은 폐사되었고 터만 남아있음)를 거처 환희대 독녀암(함양독바위를 지칭) 청이당터 하봉 중봉 천왕봉으로 기행하여 쓴 지리산 기행문의 일부분이다.

덕봉사의 중 해공이 와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한백원이 따라 나섰다. 드디어 엄천을 지나서 화암에서 쉬는데 중 법종이 뒤따라 왔다. 그에게 길을 물으니, 자못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역시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다.
지장사에 도착했다

6. 1912년 이전까지 현재의 함양군 휴천면은 엄천강을 중심으로 한 엄천면과 현재 면소재지가 있는 목현을 중심으로 한 휴지면이 있었는데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휴천면이란 이름으로 통합되었는데 엄천면이란 행정구역 이름이 엄천강의 이름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음

7. 이억년 : 자 (인녀) 호 (락산제) 관직 (개성유수), 1285년(충렬왕 11) 문과에 급제 개성유수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 갑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千載紅塵夢外事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위성 엄천리로 들어가 도정정사를 짓고 孔孟의 도를 강론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은 한국의 성씨 책자에 언급된 것으로 고려시대때 역시 엄천이라는 낱말을 사용한 것으로 엄천골의 엄천강이라는 이름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8. 함양군지에 의하면 용유담 하류 18km 생초까지 합수지점을 엄천이라 한다고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9. 다음 글은 지리산 아흔아홉골(http://jiri99.com) 홈페이지의 지명탐구 방에서 지리산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하고 계시는 가객(아이디명)님의 글을 본인의 동의를 받아 퍼온 글입니다.

1. 구간별 샛강 이름

지리산 서남자락을 둘러 흐르는 섬진강과 더불어
지리산 동북 자락을 감싸 흐르는 이름하여 광천, 임천, 엄천으로 불리 우는 샛강들은
지리산의 축을 이루는 천혜의 자연경관이다.

섬진강이 백사장을 이루고 황포돗대가 떠있는 강다운 대하의 진정한 모습이라면
이 샛강들은 강의 이미지 보다는 골짝을 감아 흐르는 전형적인 산 여울의 모습을 하고 있어
물굽이마다 한 폭의 동양화이고 여울목마다 역사와 전설이 서려 있다 .

인월에서 경호강까지
실측거리 약 34키로인 작은 하나의 산골짜기 샛강을 두고
여울목마다 이름을 달리 부르는 것은
산세를 닮아 기개가 드높은 지역민들의 고집이 베인 하나의 지리산 풍류를 엿볼 수 있음직도 하다.

강의 원천은 대개 지리산으로써
물줄기 시작점은 전북 남원시 인월면이며 기착지는 산청군 생초면 경호강이다.

반야봉, 노고단, 임걸령 등 지리산 주능선에서 발원하는 심원계곡은
심원을 지나면서 산내면으로 들어오게 된다

심원계곡의 원천은 저연(猪淵)이라 이름하며
일명 “돼지소(沼)” 라고도 하며 지금의 임걸령 부근이다.

{저연의 어원은 “돼지평전”과 “대소골”의 어원을 유추하게 해 주는 좋은 자료이다.}

심원계곡은 산 아래로 내려와서 명선봉, 토끼봉, 삼도봉, 반야봉에서 발원하는 뱀사골과
만복대 고리봉 등 서북능에서 발원하는 언양골. 오얏골. 팔령골 등의 지 계곡들과 함께 달궁계곡에 합류하여
지리산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 실상사 부근 대정리 에서 광천과 합류하여 만수천이 된다.

실상사를 감아 흐르던 만수천은
마천에 와서 물 흐름을 전라도땅 끝자락과 함께 경상도 땅 임천에 넘긴다.

백무동 골짝물이 흘러 형성된 강천천과 광대골의 물길인 덕전천이
마천에서 만나면서 임천(臨川)이라는 이름으로 흐르다가
의탄에 와서는 광점동을 돌아 흐르는 얼음터골 물과 천왕봉에서 발원한 칠선계곡이 상류부를 이룬 의탄천을 받아들여
용유담을 지나면서 강의 이름이 엄천(嚴川)으로 바뀐다.

정리를 해보면

인월에서 산내까지를 광천,
산내에서 마천까지가 만수천,
마천에서 용유담까지를 임천,
용유담에서 산청 경호강이 만나는 생초의 강정리 까지가 엄천이다.

2. 샛강 이름들의 어원 및 유래

2-1. 광천

정확한 지명 어원은 알 수 없지만
고리봉에서 발원한 광천이 운봉에 와서는 동천의 물을 받아 들이면서
인월에서부터 남쪽의 산내까지는 “남천”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지형의 방향에서 얻은 듯 하다.

2-2. 만수천

지금의 산내면 원천리와 삼화리 입석리 일대의 옛 지명이 만수동 또는 내원동으로 불려졌으며
만수천의 어원은 만수동에서 왔다고 봐야 하고
만수천의 옛 이름은 “황계(黃谿)였다고 한다.

지리산 일만 골짝의 물길이 모였대서 만수천이라 부른다는 이설도 있기도 하다.

2-3. 임천강

강 이름의 어원을 유추할 만한 뚜렷한 문서자료가 없다.
창촌. 창말 이라고도 부르는 마천면 창원(昌元)마을은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에 마천 지역에서 세금으로 거둔 차나 약초, 곡식을 이 마을의 창고에 보관하는 임창(任倉)이 이 마을에 있었다 한다.
조선 중기 후기대에 만들어진 고지도에는 어김없이 임창이 등재 되어 있다.

그렇다면 臨川의 어원은 任倉에서 왔다고 봐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임창(任倉)과 임천(臨川) 한자 표기가 다른 데서 오는 문제는
후자가 오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2-4. 엄천강

강의 어원은 엄천사로 인해 부쳐 쳤다고 본다.
신라 고찰 엄천사의 嚴川 어원은 불교 에서 나온 용어이다.


3. 잃어버린 엄천강

엄천강이 안타깝게도 근세에 와서 이름을 잃어 버렸다.
근 천년의 역사를 지닌 신라 고찰 엄천사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듯이.
지금도 유유히 지리산 자락을 안고 흐르는 엄천강의 명칭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명색이 이 나라 최대의 지리연구기관인 국토지리원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상용되고 있는 국토지리원 발행 지형도에는
엄천강 이라는 지명은 표기조차 없이 임천강으로 만 표시 하고 있다.
지형도의 오기는 한 두 군데가 아니지만
함양 쪽에 와서는 엄연히 있어야 할 엄천강을 등재하지 않았다.

뜻 있는 엄천 쪽의 주민들은 지도에서 사라진 엄천강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노력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엄천강은 휴천면 모정리에 위치한 수많은 전설과 절경을 지닌 용유담에서
산청군 생초면 강정리까지 실측거리 약17키로가 되는 지리산 동북 자락의 관문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지명을 되찾는 것은 오로지 지역민과 함양관청 그들의 몫이다.

4. 샛강을 기록한 고서와 고지도

4-1. 신동국여지승람(1530년 탈고)


함양군편에서 임천과 엄천등의 수분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이 되어있다.


임천(臨川) :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엄천(嚴川) :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4-2.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후기 이긍익(1736~1806)이 지은 조선시대 야사총서

함양의 지리산 :
북쪽에 영원동(靈源洞)ㆍ군자사(君子寺)ㆍ유점촌(鍮店村)ㆍ벽소운동(碧霄雲洞)ㆍ추성동(楸城洞)이 있는데
모두 경치 좋은 곳이다.

산골 물이 합쳐서 임천(臨川)이 되고, 흘러 내려가서 용유담(龍游潭)이 된다.
용유담의 양쪽에는 바윗돌이 평평하게 깔리고 겹쳐 쌓였는데 다 갈아 놓은 것 같다.

가로 놓이기도 하고 옆으로 펴지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큰 장독을 닮았는데 그 깊이는 바닥이 없고, 어떤 것은 술 단지 같기도 하여
천 가지 만 가지로 기기괴괴하다.
물 속에는 가사어(袈裟魚)라는 물고기가 있다.

물은 군(郡)의 남쪽 25리 지점에 이르러 엄천(嚴川)이 된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면 개천과 돌의 경치가 매우 기이하다.

4-3. 고지도에서의 기록

여지도 (1736~1767 제작) :嚴川. 任倉
비변사인 방안 (1745~1760 제작) :任倉. 嚴川面. 嚴川寺
조선지도 (1750~1768 제작) :嚴川面. 臨川. 任倉
동여도 및 대동여지도(1864 제작) :臨川. 任倉. 嚴川
광여도 (19세기 초 제작) :任倉. 臨川龍游潭

4-4. 선인들의 두류록

이렇듯 조선시대의 여러 고지도와 역사 기록문에도 등장하는 임천과 엄천 이건만
조선시대 사림들의 두류록 에서는 임천강과 엄천강의 기록을 한 줄도 찾아 볼 수 없다.

지리산의 역사와 지명연구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료는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이다.

고려 시대에는 이인로가, 조선시대에는 14세기에서 구한말 19세기 일제 강점기까지
여러 사림들이 지리산을 다녀와서 기록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김종직, 양대박, 박여량, 박장원, 변사정, 유몽인, 송병준, 배성호, 노광무 등은
분명히 임천강 아니면 엄천강을 건너서 지리산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강을 건넜다는 기록을
“.실덕 탄(灘)을 건넜다”, “황계(谿)를 건넜다”,
“.용유담(潭)을 지났다”, “군자소(沼)를 지났다”등으로 묘사해 놓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는 임천강이나 엄천강의 기록이 없다.

고문서와 고지도에도 등재 되어 존재 사실을 증명해 주는 임천강인데,
마치 두류록을 기록한 선인들이 없는 임천강을 작품 속에 등장시킨 것으로 오도하는 글이 있어
바로 잡고자 두류록의 기록을 검토해 보았다.


(동여도에 나타난 임천과 엄천)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임천과 엄천)



(광여도에 나타난 엄천)


*참고문헌 : 신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 함양군지, 운성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검색 사이트 : 서울대규장각. 한국역사 정보종합 시스템

출처 : 화남초등학교 총동창회(경남 함양 유림)
글쓴이 : 김용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