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향자료

[스크랩] 신동국여지승람, 함양편

배꼽마당 2012. 11. 4. 11:22

* 지리산 아래 우리네 고향에 대해서 그동안 자료가 정리되거나 자료를 발굴하고 집대성 해 놓은게 전혀 없습니다. 휴천면지, 함양군지, 마천면지등에 조금 언급해 놓은게 현실이며 엄천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전설과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으나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지 못했는데 미약하나마 이미 수집된 자료들을 모아 이 방에 올려 보겠습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


동쪽으로 안음현(安陰縣) 경계까지 37리이고, 남쪽으로 산음현(山陰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전라도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27리이고, 북쪽으로 안음현 경계까지 37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속함군(速含郡)인데 함성(含城)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이 승격시켜서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삼았으나, 현종은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하여 합주(陜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함(含)을 함(咸)으로 고쳤다. 명종이 다시 강등시켜서 현으로 만들고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4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속함(速含)ㆍ함성(含城)ㆍ천령(天嶺)ㆍ허주(許州)ㆍ함양(含陽)

【성씨】 본군 여(呂)ㆍ오ㆍ박ㆍ서ㆍ조(曺), 이 속성(續姓)이다. 마천(馬淺) 조(조(曺)).

【풍속】 풍속이 근신하고 정성스러움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 기이한 봉우리 깊은 구렁 신숙주가 지은 제운루(齊雲樓) 기문에 있다. 백암산(白巖山) 군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문필봉(文筆峯) 군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지리산(智異山)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산 북쪽은 온통 이 고을 지경이며, 천왕봉(天王峯)이 진주와 경계로 되었다.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일컫는다. 의탄소(義呑所)와 5ㆍ6리 거리인데 우마가 능히 가지 못하는 곳이나,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천왕점(天王岾)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경계이다. 백운산(白雲山) 군 서쪽 40리 지점에 있는데 안음현 경계이다. 화장산(花長山)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산 속에 난초와 혜초(蕙草)가 많다. 취암산(鷲巖山)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상산(霜山)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여러 바위가 다투듯 빼어난데 형상이 칼날 같다. 산 밑에 골이 하나 있는데, 홍무(洪武) 경신년, 왜적을 정벌할 때에 병기를 저장했던 곳이다.

도현(桃峴) 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팔량현(八良峴) 군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전라도 운봉현 경계로서 요충 지대이다. 고개 위에 신라 때 옛 진터가 있다.

수지봉(愁智峯)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안점산(鞍岾山) 군 북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산 위에 옛날 석성이 있다. 사암산(蛇巖山) 군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오도봉(悟道峯)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대고대(大孤臺) 남계(?溪) 복판에 있다. 소고대(小孤臺) 뇌계(?溪) 복판에 있다. 대관림(大館林) 뇌계 동쪽 언덕에 있다.

남계(?溪)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동천(東川)의 하류이다. 산음현 경계에 와서 엄천(?川)과 합류한다. 뇌계(?溪)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백운산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흘러 사근역(沙斤驛) 가에 와서 남계에 들어간다.

임천(?川)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엄천(嚴川)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서계(西谿) 군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팔량현에서 나오는데, 제한역(蹄閑驛) 아래쪽 5리쯤에 이르러서는 두 산골 사이에 돌이 뻗쳐서 바닥이 되었으며, 갈아놓은 것처럼 미끄럽고, 물줄기가 나는 듯 흘러 물방울을 튕기며, 굽은 낭떠러지에 내리 쏟아서 댕글댕글하는 것이 패옥 소리 같다.

【토산】 대[竹]ㆍ벌[蜂蜜]ㆍ석이버섯[石?]ㆍ감ㆍ은어[銀口魚]ㆍ석류ㆍ잣[海松子]. 『신증』 오미자.

【성곽】 읍성 고을 관아가 옛날에는 군 동쪽 2리 지점에 있었다. 홍무 경신년에 청사(廳舍)가 왜구에게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관아를 문필봉 밑으로 옮기고 흙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다. 둘레는 7백 35척이고 나각(羅閣)이 2백 43칸이다. 문이 셋인데, 동쪽은 제운(齊雲), 남쪽은 망악(望岳), 서쪽은 청상(淸商)이다. 사근산성(沙斤山城) 군 동쪽 17리 지점, 사근역 북쪽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2천 7백 96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성안에 못이 셋이다. 경신년에 감무(監務) 장군철(張群哲)이 성을 지키지 못하여 왜구에게 함락 당한 뒤에 폐해 버리고, 수리하지 않았다가, 성종조에 다시 수축하였다.

【누정】 학사루(學士樓) 객관 서편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오르던 곳인 까닭으로 학사루라 이름하였다. 그 뒤에 왜적에게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에 누 또한 옮겨다 지었으나 이름은 그대로였다.

제운루(齊雲樓)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천순(天順) 신사년 4월에, 임금께서 신의 선대가 일찍이 관작을 추증 받았으나, 여러 해를 변방에 있었으므로, 아직 선영에 배례도 하지 못하였다 하여, 특별히 휴가를 내리고, 호남 선영에 분황(焚黃)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남원에 도착하니, 함양 원으로 있는 종형 자교(子橋) 혜옹(惠翁)도 와서, 수일 동안 환담하다가 나에게 말하기를, ‘함양성에 문이 있고 문에는 누가 있는데, 무너진 지 여러 해여서 사람이 올라갈 수 없으나 수축하지 못하였다. 내가 이 고을을 맡아서 한 해를 넘기고 나니 정사가 간단해서 여가가 많다. 고을에 대사(臺?)와 누관이 없어 왕인(王人 사신 따위)을 위로하고 답답함을 풀 만한 곳이 없음을 생각하고, 이에 민중과 의논하여 문루(門樓)를 온통 새롭게 하였는데, 처마와 칸살을 넓직하게, 대마루와 서까래를 가지런하게, 단청을 빛나게 한 다음에 그만 두었다. 공사를 마치자, 상국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공(黃公 황수신)이 마침 와서 감사 성안(成安) 김공(金公)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서 낙성하였다. 이 두 분이 첫째로 시 두 편을 지었고, 여러 따르던 자들도 모두 화답하여 현판하니,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고을이 두류산 기슭에 있는데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구렁과 천 리에 구름과 안개의 변화하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침저녁으로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이 누에 오르면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어라.’ 하였다. 나는, ‘한 번도 올라서 그 시설한 것과 경치를 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여러분의 작품을 보고 대강이나마 안 다음이라야 기문을 지을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지 수일 후에 형님이 또 편지를 보내, 남원공 이하 여러분의 시 수십 편을 보게 하고 기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방금 여행하느라 피로했고, 또 더위에 병든 중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받아 여러분의 시를 한바탕 읽고 읊조리는 동안에, 오랜 병이 없어지고 마음이 상쾌하여 저절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감탄하기를, ‘형님과는 머리 땋은 아이 적부터 함께 글을 읽었고, 일찍이 그 옛 사람을 경모하는 진실함을 보았을 뿐, 무슨 일을 만들어내는 재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고을 원이 되어, 정사하는 데에 어짊과 용서를 우선으로 하면서 기강(紀綱)을 바로 잡아, 너그러움과 위엄을 함께 이루게 하였다.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사모하여 남들이 옛날 정사와 같음이 있다 일컬으니, 이것은 진실로 진정과 순박한 것으로 된 것이다. 또 능히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재간이 있는 자도 능히 하지 못한 것을 하였으니, 또한 괴이하다 할 만하다. 누를 읊조린 시만으로도 남의 병을 천리 밖에서 능히 낫게 하였는데, 하물며 몸소 그 누에 올라서 관람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비록 늙었으나, 만약 형님을 따라 한 번 누에 오르게 된다면, 마땅히 형님을 위해 극히 넓힐 것이요, 우선은 이것을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빗발은 점점 걷히는 듯 하건만, 은은한 우레 소리는 아직도 누를 울린다. 구름이 골에 돌아드니 발이 어둡고, 바람이 못 위에 살랑거리니 자리가 서늘하다. 연꽃 향기 속에 개구리는 개골개골, 황새 그림자 속에 벼가 윤기나네. 난간에 기대어 두류산 바라보니, 천길 봉우리는 용이 솟았는 듯하여라.” 하였다.

백사정(白沙亭)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봄 찾아 술 싣고 외로운 마을 지나니, 뻐구기 소리 들리는 대낮에 사립문 닫았네. 비 뒤에 떨어진 꽃이 물에 떠 오니, 인간 어느 곳도 도원(桃原) 아닌 곳 없다.” 하였다.

『신증』 망악루(望岳樓) 성 남쪽 문루이다.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으로 이 이름이 붙었다. ○ 김종직의 시에, “작년에 내 발자취 저 멧부리를 더럽혀, 망악루 위에서 다시 대하니 무안도 하구나. 산신령이 또 다시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여, 흰 구름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하였다.

청향당(淸香堂) 객관 서쪽에 있으며 밑에 연못이 있다. 군수 조위(曺偉)가 지었다.

【학교】 향교 군 북쪽에 있으며 소소당(昭昭堂)이 있다.
【역원】 제한역(蹄閑驛)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운봉(雲峯) 고갯길이 시내 곁에 났는데, 나귀를 편하게 타고 긴 휘파람 한 번 분다. 서쪽 산이 만 길 높다 말하지 말라. 객이 여관에 들어도 석양이 못 되었네.”하였다. 사근역(沙斤驛) 군 동쪽 16리이며, 역승(驛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이 14인데, 유린(有麟)ㆍ안간(安澗)ㆍ임수(?水)ㆍ제한(蹄閑)ㆍ정곡(正谷)ㆍ신안(新安)ㆍ신흥(新興)ㆍ정수(正守)ㆍ횡포(橫浦)ㆍ마전(馬田)ㆍ율원(栗元)ㆍ벽계(碧溪)ㆍ소남(小南)ㆍ평사(平沙)이다.

○ 승(丞)이 1명이다.

○ 신우(辛禑) 6년에 왜선 5백 척이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3도를 침략하였다. 상주(尙州) 부고(府庫)를 불태우고, 경산(京山)을 경유하여 사근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 등 아홉 장수가 역 동쪽 3리쯤에서 싸웠으나, 패전하여 박수경(朴修敬)ㆍ배언(裵彦) 두 원수가 죽고, 군사도 5백 명이나 죽어서 냇물이 다 붉었다. 그리하여 지금 혈계(血溪)라 부른다. 이로 말미암아 왜적의 군세는 더욱 성하여, 군 성을 무찌르고 남원을 향해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했다가 우리 태조에게 섬멸되었다. ○ 이첨의 시에, “운봉산 밑에는 가을 바람이 이르고, 햇살이 엷고 날씨가 추우니 나뭇잎이 마른다. 이때에 우리 군사가 왜놈에게 패하여, 피를 함양 언덕의 풀에 뿌렸네. 양부의 원수가 진 앞에서 죽었으니, 하찮은 군사들이야 신명 보전도 어려웠으리라. 슬픈 피리 두어 곡조에 장부도 눈물 지으며, 늙기 전에 국치(國恥)를 씻으리라 맹세하였네. 남쪽으로 출정한 장수 누가 군사 없으랴마는, 깃발도 천천히 갔던 길 돌아가도다.” 하였다. ○ 역 남쪽에 제법 넓게 트인 정자가 있다. 이숙번(李淑蕃)의 시에, “객의 귀 밑에 눈서리 더하여도, 흐르는 세월은 조금도 멈추지 않네. 윤음(綸音)이 금궐(金闕)에서 내려오니, 옛 벗들 우정(郵亭)에서 전송한다. 시내와 산은 집을 둘러 훌륭하고, 소나무는 구름을 스칠 듯 푸르도다. 임금의 은혜를 갚기는 어려우니, 어찌 반드시 궁궐에 가야 하리.”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가는 길 우리 고향과 가까워, 더욱 기쁘다. 말 머리가 내일에는 산음을 지나리. 사람들은 왕인(王人)이라 보지만, 재간 없는 취한 한림인 줄 어찌 알리오.”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5년에 승(丞)은 혁파하고 찰방을 두었다.

광혜원(廣惠院) 성 남쪽 2리 지점에 있는데, 다락집이 있으며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다. ○ 이항무(李恒茂)의 시에, “총총히 겨를 없어 누에 못 오르다가, 이날에야 올라보니 눈이 잠깐 트인다.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구름이 아득하고, 남으로 지리산 쳐다 보니 눈만 높이 쌓였네. 2년 동안 녹 먹으며 무슨 일 했나. 천리 밖 고을을 맡았으나 재주 없는 것 부끄러워라. 어찌하면 호탕하게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송백(松栢)이나 잘 가꾸워 볼까.”하였다. 사근원(沙斤院) 사근역 동쪽에 있다. 도현원(桃峴院) 도현(桃峴) 밑에 있다. 덕신원(德信院)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교량】 사근교(沙斤橋) 사근역 남쪽에 있다. 대교(大橋)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견불사(見佛寺) 지리산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절이 명산 속에 있으니, 창건된 때가 아주 옛날이네, 선상(禪床)엔 일월이 한가하고, 강석엔 인천(人天)을 설하는구나. 너에게 무생(無生)이라는 이치 들었고, 내 신선 못 배웠음이 한스러워라. 얘기 끝에 도리어 취미가 있으니, 눈앞에 풍경이 좋기도 하이.” 하였다.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10년 동안 떠들 적에 내 어이 견디었던가. 구름 산에 자취 감추고 한바탕 꿈 달게 여기자. 지는 해에 번쩍이는 놀 취점(鷲岾)에 비꼈고, 긴 바람은 비를 몰아 용담(龍潭)에 지난다. 흰 구름과 푸른 학은 속절 없이 아득한데, 아간(牙簡)과 경고(瓊膏)를 어찌 싫도록 참례하였나. 오늘 밤에 솔바람 창을 스치니, 가벼운 노을에 뚜렷한 달을 누워서 보리라.” 하였다.
승안사(昇安寺) 사암산(蛇巖山)에 있다. 선열암(先涅菴)ㆍ고열암(古涅菴)ㆍ신열암(新涅菴)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화장사(花長寺) 화장산에 있다. 엄천사(嚴川寺) 엄천 북쪽 언덕에 있다. 마적사(馬迹寺)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馬迹)이 살았다는 것으로 명칭을 하였다. 앞에는 유가대(瑜?臺)가 있고, 밑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으며 탄 위는 곧 용유담(龍遊潭)이다. 금대암(金臺菴)ㆍ보월암(寶月菴)ㆍ안국사(安國寺)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본조 중 행호(行乎)가 창건한 것이다.

무주암(無住菴) 지리산에 있다. ○《보한집(補閑集)》에, “중 무기(無己)가 스스로 대혼자(大昏子)라 호하고 이 산에 숨었다. 장삼 하나로 30년 동안을 지냈고, 매년 겨울과 여름이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새끼 띠로 감아 묶고서, 봄 가을이면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는데, 하루에 3ㆍ4말 밥을 먹었다. 한 곳에 앉으면 반드시 열흘이 넘었고, 일어나 걸으면서 게(偈)를 지어 크게 읊었다. 산중에 70여 개 암자가 있는데, 한 암자에서 한 끼씩 먹으면서 게 한 수씩 남겼다. 무주암 게에, ‘이 지경에 본래 주거하는 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집을 지었는가. 오직 무기(無己)란 자만이 남아서 가거나 머물거나 처음부터 거리낌 없다.’ 하였으니, 말이 엉성하고 쉬운 듯하나 숨긴 뜻이 깊다. 혹시 한습(寒拾)의 무리인가.” 하였다.
덕봉사(德峯寺) 천왕점 밑에 있다. 등귀사(登龜寺) 오도봉(悟道峯)에 있다.

『신증』 유호인의 시에, “두류 만첩 산아 잘있었는가. 잠깐 여가 타서 여기 올랐노라. 금당(金堂)과 옥실(玉室)의 옛 언약을 찾으니, 푸른 고개 붉은 벼랑이 모두 옛 안면일세. 해 저물어가니 기러기 북쪽으로 가고, 누런 국화 떨어질 제 객이 남쪽으로 돌아온다. 난파(?坡)가 멀리 운림(雲林)과 격했구나. 양(兩) 지역에서 돌아오니 귀밑머리 반백일세.” 하였다.

미타사(彌陀寺) 사근성산(沙斤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모사(聖母祠) 사당이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천왕봉 위에 있고, 하나는 군 남쪽 엄천리에 있다. 고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 “성모는 태조의 모친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한다.” 하였다. 성왕사 군 동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읍성 관변리(官邊里)에 있는데, 지금 고을 관아와 4리 거리이다. 공안부곡(功安部曲) 군 동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마천소(馬川所) 천(川)은 옛날에는 천(淺)으로 썼다. 군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말 방울 울리며 마천에 들어오는데, 빈종(賓從)도 또한 점잖구나. 그늘진 구렁엔 얼음이 얼려하고, 양지쪽 벼랑엔 단풍이 아직도 곱다. 눈이 신모묘(神母廟)를 덮었고, 우레가 칩룡연(蟄龍淵)에서 울려온다. 굽은 언덕엔 시참(柴慘 형벌의 일종)을 남기고, 수목 우거진 사당엔 지전(紙錢)이 걸려 있네. 나무를 깎아서 시냇가엔 자귀밥 있고, 숯을 굽느라 골짜기엔 연기가 난다. 일하는 사람은 메밀을 베고, 작은 색시는 목화를 거둔다. 그럭저럭 임기가 가까워졌으니, 이 놀이를 응당 그리워하리.” 하였다. 의탄소(義呑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소의 아전들이 지금은 군 서쪽 웅곡리(熊谷里)에 옮겨가 산다.

월명총(月明?) 수지봉 위에 있다. 전설에는, “옛날에 동경의 장사꾼이 사근역 계집 월명을 사랑하여 며칠 동안을 머물다가 갔다. 월명이 사모하다가 병이 되어 죽었으므로 여기에다 묻었다. 그 뒤에 장사꾼이 그 무덤에 가서 곡하다가 또한 죽어서 마침내 같은 무덤에 묻혔다.” 한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무덤 위에는 연리지(連理枝) 푸르구나. 길손이 그를 위해 화산기(華山畿)를 부른다. 지금도 달 없으면 여우가 우는데, 꽃다운 넋은 나비되어 날고 있겠지.” 하였다.

【명환】 신라 영충(令忠) 헌덕왕(憲德王) 14년 웅천 도독(熊川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켜서, 무진(武珍)ㆍ완산(完山) 등 주를 협박하여 제 편으로 만들었다. 완산 장사(完山長史) 최웅(崔雄)이 영충과 함께 서울에 도망쳐 와서 보고하였다. 임금이 곧 영충을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로 임명하였는데, 위계는 급찬(級?)이었다. 최치원(崔致遠) 치원이 해인사 중 희랑(希朗)에게 보낸 시 끝에 방로태감 천령군태수(防虜太監天嶺郡太守) 알찬(?粲) 최치원이라 적었다.

본조 송희경(宋希璟)ㆍ이차약(李次若) 숭인(崇仁)의 아들이다. 채륜(蔡倫)ㆍ최덕지(崔德之)ㆍ조상치(曺尙治)ㆍ정종소(鄭從韶) 모두 수령[知郡]이었다.

『신증』 김종직 고을 사람이 추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조위(曺偉).

【인물】 고려 박충좌(朴忠佐) 과거에 올라 벼슬이 판삼사사에 이르렀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하여 비록 재상이 되었으나, 사는 집과 의복은 벼슬하기 전과 같았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본조 박자안(朴子安) 벼슬이 도총제에 이르렀고, 장수의 재질이 있었다. 여칭(呂稱) 벼슬이 지의정부사에 이르렀다. 박실(朴實) 자안의 아들이다. 태조조에 자안이 경상ㆍ전라도 도안무사가 되어서 항복한 왜인을 응접하다가, 군사 기밀을 잘못 누설하여 죄가 참형에 해당하였다. 조정에서 베어 죽이도록 공문을 보냈으나, 저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이기에 비밀에 붙이고 선포하지 않았다. 박실이 듣고 곧 태종의 사저에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아비 목숨을 살려 주도록 청하였다. 태종께서 마음으로 슬프게 여겨서, 곧 자안의 사형을 감형하도록 계청하였다. 태조께서 처음에는 노하였으나 얼마 뒤에 중추원 녹사 심귀수(沈龜壽)에게 힘껏 빨리 달려가서 자안의 죽음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귀수가 반 넘어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역리를 시켜 명령서를 대신 보냈다. 명령서가 도착하기 전에 감형관은 이미 자안의 낯을 칠하고 옷을 벗겼으며 칼도 갖추고 있었다. 역리는 멀리 들판에서 갓을 휘둘렀다. 감형관이 바라보고 형 집행을 정지하고 기다렸다. 그리하여 자안은 죽지 않게 되었다. 박실은 본래 학술과 무예가 없었으나, 태종이 그 아비 구한 것을 어질게 여겨서 금려(禁旅)를 맡게 하였다. 직위가 총제에 이르렀다. 오응(吳凝) 정축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신증』 여자신(呂自新) 무과에 올랐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성품이 청렴 결백하고 소탈하며 곧았다. 여운철(呂允哲) 자신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렀으며 청렴 결백한 것이 그 아비와 같았다.

【우거】 본조 유호인 과거에 올랐고 시를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다. 성종(成宗)이 일찍이 그가 저술한 것을 베껴서 바치도록 하였다.

【효자】 본조 박안행(朴安行) 효행이 있어서 정려되었다. 박유효(朴由孝) 아버지의 무덤에 시묘하는 때를 당하여, 어미 병이 위독하였다. 변을 맛보니 맛이 달므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더니 어미가 죽자 아비의 무덤에 합장하고 6년을 여막에서 거처하였다.

【열녀】 고려 송씨 역승(驛丞) 정인(鄭寅)의 아내이다. 홍무(洪武) 연간에 왜구에게 잡혔다. 왜적이 겁탈하고자 하였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복종하지 않다가 드디어 살해당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본조 김씨 이양(李陽)의 아내이다. 양이 자식도 없이 죽으니, 사직 여자근(呂自勤)이 장가들고자 하였다. 김씨는 지아비의 무덤에 달려가서 사흘 밤을 풀 속에서 잤다. 그 뒤에 박용덕(朴龍德)이란 자가 또 아내로 삼고자 하였으나, 김씨는 응하지 아니하고 목매어 죽었다. 성종 3년에 고을 원을 시켜 그 무덤에 제사하고 정문하였다.

【제영】 함양소현난산심(咸陽小縣亂山深) 이색(李穡)의 시에, “함양 작은 현은 많은 산이 깊고, 깎아지른 벼랑은 다시 만 길이나 되네.” 하였다.

함양구물단청산(咸陽舊物但靑山)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함양 옛 물건은 청산뿐이니, 몇 차례 흥망 겪으며 한 고을에 딸렸던가.” 하였다.

천극두류기반공(天極頭流倚半空)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하늘 끝 두류산은 반공에 기댔고, 호남을 한 번 채운(彩雲) 속에 바라보네. 시험삼아 누 위에서 난간에 기대보니, 천고에 푸른 얼굴 두루두루 같아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안의(安義)에 예속시켰다가 이어 나누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영조 5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정조 12년에 군으로 강등시켰다.

【정지】 읍성 영조 5년에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7천 35척이며 동ㆍ서ㆍ남 3문이 있다. 천왕봉고성(天王峯古城)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하며, 의탄(義呑)의 소재지에서 5ㆍ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고, 안에는 창고 터가 있다. 안치고성(鞍峙古城) 석축의 터가 있다.

【교량】 사근교(沙斤橋) 역 남쪽에 있다. 대교(大橋) 남쪽으로 5리이다.

【창고】 읍창ㆍ북창(北倉) 북쪽으로 30리이다. 사창(仕倉) 남쪽으로 30리이다. 역창(驛倉) 사근에 있다.

【사원】 남계서원(濫溪書院) 명종 임자년에 세우고,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정여창(鄭汝昌) 문묘 편에 보라. 정온(鄭?) 광주(廣州) 편에 보라. 강익(姜翼) 자는 중보(仲甫), 호는 개암(介庵), 진주 사람이며, 벼슬은 참봉이다.
○ 당주서원(?洲書院) 선조 신사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노진(盧?)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이며, 풍천(?川)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방면】 읍내 끝이 5리이며, 일명 원수면(元水面)이라고도 한다. 관변(官邊)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지내(池內)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사근(沙斤)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열음계(列音界)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휴지(休知)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엄천(嚴川)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마천(馬川)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1백 리이다. 죽곡(竹谷)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광복(廣福)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백전(柏田)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북산(北山) 북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병곡(甁谷) 북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30리이다. 유등포(柳等浦)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도북(道北)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북천(北川)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상덕곡(上德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하덕곡(下德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백토(柏吐)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모수(毛首) 동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현내(縣內)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서상동(西上洞) 처음이 50리, 끝이 1백 50리이다. 서하동(西下洞)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 공안(功安) 부곡은 동남쪽으로 15리, 마천소(馬川所)는 지금 면이 되었으며, 의탄소(義呑所)는 남쪽으로 30리이다.


[주D-001]분황(焚黃) :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그 관직이 상당히 높아지면, 그 부(父)ㆍ조(祖)ㆍ증조(曾祖)의 3대에 벼슬을 추증하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었는데, 그 추증할 때에 관직을 기재한 사령장은 누런 종이에 쓴다. 그 종이를 분묘 앞에서 불사르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분황(焚黃)이라 한다.

[주D-002]인천(人天) : 사람에 관한 여러 가지 이치와 천리(天理)에 관한 것을 합하여서 인천(人天)이라 한 것이다.

[주D-003]아간(牙簡)과 경고(瓊膏) : 아간(牙簡)은 관청 문서라는 말이요, 경고(瓊膏)는 고량진미(膏梁珍味)라는 말이다.

[주D-004]한습(寒拾) : 당(唐) 나라 중엽 시대의 유명한 중 한산(寒山)ㆍ습득(習得)을 약칭한 것이다. 그들은 기행(奇行)으로 유명하고 또 시승(詩僧)으로 유명하였다.

[주D-005]금당(金堂)과 옥실(玉室) : 여기에 금당 옥실이라 함은 부처 있는 곳을 미화시켜서 한 말이다.

[주D-006]난파(?坡) : 난파는 한림학사가 공무 보는 곳을 말함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홍문관의 관원들이 있는 곳을 난파라고 하였다.

[주D-007]연리지(連理枝) : 두 나무가 각각 나서 가지만이 서로 얽힌 것을 연리지라 한다. 옛날 전국 시대 송 나라 강왕(康王)이 한빙(韓?)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았다. 한빙이 자살하자 그의 아내도 자살하였으므로 어느 산기슭에 묻었더니, 두 무덤에서 각기 나무 하나씩이 나서 가지가 서로 얽히었다. 송 나라 사람들이 그 나무를 상사목(相思木)이라 하여 이들의 사랑을 가련하게 여겼다.

[주D-008]화산기(華山畿) :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 송(宋) 나라에 짝사랑하다가 죽은 남자의 상여가, 그 짝사랑하던 여자의 집 앞으로 지나갈 때에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여자가 나와서, “나를 연모하다가 죽었다면, 나도 그대를 좇을 것이니 원한다면 관을 열어 주오.” 하였더니, 관이 열리므로 그 여자가 그 관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모두가 놀래어 아무리 꺼내려 하여도 이미 죽었으므로 할 수 없이 합장하였다. 그것을 노래한 곡조가 화산기(華山畿)이다.

[민족문화추진회 역]

출처 : 화남초등학교 총동창회(경남 함양 유림)
글쓴이 : 김용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