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커뮤니티(ofof.net)에서 지리산 최화수의 지리산 산책중 최화수님의 글을 퍼옴
지리산 골짝골짝마다 어김없이 사찰이나 암자가 자리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것이 지리산 자락의 사암(寺庵)들이지요. 하지만 지난 세월 오랫동안 지리산에 터를 잡고 있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사암들이 더 많을 거에요. 심지어는 이름난 대가람마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도 더러 있지요. 지리산 북쪽 함양 땅의 엄천사(嚴川寺)와 군자사(君子寺)가 바로 그러합니다.
엄천사! 지리산 엄천사를 아시나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사찰이니 가보았다면 엄천사터가 되겠네요. 지리산 동남쪽의 단속사(斷俗寺)터는 보물 5층 쌍탑이 있어 지리산 문화유적 답사 코스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지요. 하지만 엄천사는 고작 부도 2기만 남아 있을 뿐이어서 일부러 찾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실 자동차로 엄천사터 바로 앞 도로를 통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엄천사란 이름이라도 떠올리는 이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리산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엄천사입니다. 이 엄천사는 신라왕실과 밀접했던 것과 지리산 차문화(茶文化)의 또다른 산실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지리산의 차문화라면 대개 주능선 남쪽을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도 쌍계사와 칠불사 일원의 화개동천, 그리고 화엄사 주변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요. 지리산 주능선 북쪽의 차문화라니, 다소 의외로 생각될 법도 합니다.
경남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원기마을 절골. 절골이라는 이름에서 지난날 대가람이 자리했던 것을 유추해볼 수 있겠네요. 남호리는 동호, 원기, 한남마을로 나뉘는데, 원기마을이 곧 엄천사가 자리했던 절골에 해당합니다. 마천에서 임천(臨川)과 엄천(嚴川)을 따라 60번 지방도로 휴천 50리가 이어져 있지요. 천왕봉과 반야봉 등 지리산 북쪽의 칠선골과 한신골, 뱀사골 등의 계류를 모아 흐르는 물줄기가 용류담을 거쳐 바로 이 남호리 절골 앞으로 흘러갑니다.
엄천 건너편으로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릉이 있는 왕산(王山)이 우뚝하고, 서쪽으로는 법화산과 삼봉산, 뒤로는 활인산이 병풍을 둘러친 듯합니다. 수려한 산세의 명당이니 이곳에 대찰이 자리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네요. 엄천사는 신라 헌강왕 9년(883년) 당시 화엄사에 있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왕명을 받아 창건했답니다. 왕은 선사를 궁궐로 초청하여 특별히 당부를 했다는 군요.
"우리나라는 불도로써 나라를 다스렸소. 법흥왕의 도리사, 진흥왕의 황룡사, 무열왕의 감은사, 애장왕의 해인사, 경문왕의 숭복사는 다 선왕을 위해 지은 것이오. (중략)내가 그 일을 잇지 못한다면 선왕을 저버리는 것이겠지요. 듣건대 해동의 명산이 많지만, 지리산이 가장 높고 깊다고 하니 선사가 그곳에 가서 터를 잡고 절을 지어 영원히 우리 선고왕(先考王)을 위해 명복을 비는 원찰로 만들어준다면 그 자비와 보시가 클 것이오."
결언선사는 왕명을 받들어 지리산에 와서 산을 따라 맥을 점치고 시내를 따라 거슬러가다 마침내 이곳 명당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왕은 곧 백성을 동원하고 조세를 돌려 쓰게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네요. 절이 지어지자 왕은 '엄천사'란 이름을 하사하였답니다. 그 뜻은 엄히 계율을 지켜 한량없는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엄천사 낙성식 법회에는 경문왕이 친히 행차하여 선고왕을 위하여 불공을 드렸고, 결언대사를 보정사(輔政師)로 삼아 사라국사(娑羅國師)라고 칭하였고,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네요. 또한 왕비 김씨는 곡식 천 섬을 희사하여 죽은 아우를 위해 명복을 빌고, 천하의 대문장가 최치원에게 명하여 발원문을 짓게 했답니다. 엄천사는 왕비가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빠지지 않고 꼭 찾아와 기도를 올린 절로서도 유명합니다.
엄천사는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불교문화를 꽃피워 왔지만, 임진왜란 때 지리산의 다른 사찰처럼 소실됐어요. 숙종 16년(1690년) 봄, 벽암 각성의 손자 승현대사가 중건을 하는데 18동 100간의 건물 규모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쩐 셈인지 조선 후기에 이 사찰은 쇠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도 2기만 쓸쓸히 남아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이 엄천사는 지리산 차문화의 색다른 유적지로서 아주 주목이 되는 곳입니다.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군자사(君子寺)는 원래 신라 진평왕이 숙부 진지왕이 즉위(576년)하자 도성을 떠나 피신하여 은거했던 별궁이었지요. 경주에서 지리산록까지 몸을 숨길 정도였다니, 권력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네요. 3년 뒤 진지왕이 폐위되자 그는 다시 도성에 돌아가 즉위하고 별궁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기려 군자사를 창건한 거에요.
이 군자사의 우물가 미나리밭에는 예부터 개구리가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 살충제 광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지요. 군자사 미나리꽝에 개구리가 없는 것처럼, 이 세상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더러 있어요. 영가(永嘉, 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는 것이나,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칡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엄천사가 법우화상으로 하여 무당의 성지로 일컬어진 것도 예사스럽지가 않습니다. 법우화상은 그 도(道)가 매우 높았다고 해요. 어느날 그가 보니,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냇물이 크게 불어나지 않겠는가! 화상은 그 근원을 찾다가 천왕봉 꼭대기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키가 크고 힘센 한 여인과 마주쳤다고 하네요. 그녀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성모천왕(聖母天王, 지리산신)으로 인간계에 귀양 내려왔는데, 그대와 인연이 있어 마침 물로 도술을 부려 스스로 중매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법우화상은 성모천왕과 결혼했는데, 딸 8명을 낳아 자손이 번창하였고, 무술(巫術)을 가르쳤다는 거에요. 무당이 굿을 할 때 한 손에 금방울을 흔들고 한 손에 채색 부채를 들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너울너울 춤을 추며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또한 법우화상을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답니다.
법우화상으로 하여 엄천사가 무당의 성지가 되었다...!? 하지만 엄천사가 사라졌듯이 법우화상의 자취나 무당의 흔적이 남아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무당의 원조인 성모천왕과 법우화상은 천왕봉과 백무동, 용유담에 더 많이 그 자취를 남겨놓았지요. 무속의 성지로는 엄천사보다 위의 세 곳이 주로 언급이 되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엄천사는 '한국 무당의 성지'가 아니라 차밭, 그것도 관영차밭(官營茶園)인 '함양다원(咸陽茶園)'으로 그 이름이 더 빛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관영차밭? 지리산 유일의 관영차밭이지요.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엄천강변 엄천사지 입구에는 요즘 이런 글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어요. '점필재 김종직선생 관영차밭 조성터(점畢齋 金宗直先生 官營茶園 造成址)' 비석 뒤에는 그이의 시(詩)가 새겨져 있습니다.
'영험한 차를 올려 우리 임금 오래오래 사시도록 하고 싶은데, 신라 때 심었다는 종자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겠네. 이제야 두류산 아래서 차나무를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기쁘구나. 대숲 밖의 황폐한 밭 몇 이랑을 개간했으니 새 부리 같은 보랏빛 찻잎 언제쯤 볼만해질까. 백성들의 마음속 걱정을 덜어주려는 것일뿐 무이차처럼 명차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라네.'
지리산 자락을 끼고 있는 함양 땅에 지도자(관리)로 왔다 간 이들 가운데는 아주 훌륭한 인물도 있었어요. 891년 함양태수를 지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 1471~1474년 함양군수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 선생, 1495년~1498년 안의현감으로 재직한 일두 정여창(一斗 鄭汝昌) 선생, 1791년~1796년 안의현감을 지낸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선생이 그들이지요.
이들 가운데 김종직 선생은 특히 지리산 기행록으로 지리산 매니아들에게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이가 1472년에 썼던 '유두류록(遊頭流錄)'은 너무나 유명하지요. 그이는 함양군수를 지낼 때 엄천사에 '관영차밭'을 조성한 거에요. 그런데 관영차밭을 조성한 그 사연이 아주 기가 막히답니다.
조선 성종 2년(1471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록의 함양군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김종직 군수의 눈에 먼저 비친 것은 군민들이 차(茶) 때문에 받는 고통이었어요. 함양 땅에는 차(茶) 한 톨 나지 않는데, 조정에서 해마다 백성들에게 차를 공물(貢物)로 바치라고 했거던요. 그이는 당시의 사정을 '점필재집' 제10권에 다음과 같이 썼어요.
'차를 조정에 올려야 하는데 우리 군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해마다 백성(함양군민)들에게 차를 공물로 바치라 한다. 백성들은 전라도에 가서 차를 사와서 공물로 바치는데, 쌀 한 말을 가져가면 차 한 홉을 살 수 있다. 내가 이 군에 부임한 초기에 그 폐단을 알았다. 그리하여 차 공물을 백성들에게 부담시키지 않고 군의 돈으로 차를 사서 공물로 바쳤다.'
함양군민들의 차 공물 부담을 군청에서 맡아 처리하게 했으니, 김종직이야말로 애민사상이 투철한 목민관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김종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지요. 그이는 '삼국사기'에서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나무 종자를 구해다 지리산에 심었다고 하는 기록을 본 기억을 떠올린 거에요. 그래서 그이는 이렇게 소리쳤답니다.
"우리 군(郡)이 지리산 아래 있으니 어찌 신라시대에 심은 차나무 종자가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이는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차나무에 대해서 물어보곤 했다는 거에요. 그러다가 마침내 엄천사 북쪽 대나무밭에서 차나무 두어 그루를 찾아내게 됩니다. 김일손이 '속두류록'에 고색창연한 사찰이라고 언급한 엄천사, 신라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큰 사찰이었기에 그나마 그 차나무라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김종직의 관련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나는 매우 기뻐서 그 곳에 차밭을 만들도록 했다. 그 곳 주위는 모두 백성들의 땅이라서 군에서 다른 곳의 토지로 대신 보상해주고 모두 사들였다. 몇 년이 지나자 차나무가 제법 번성하여 차밭 안에 골고루 번졌다. 앞으로 4~5년 기다리면 조정에 올릴 정도의 수량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직은 엄천사에 '함양다원(咸陽茶園)'이란 관영차밭을 조성하게 된 것을 기려 또 한편의 시를 지었어요. 그것이 지난 1998년에 엄천사터에 세운 '점필재 김종직 선생 관영차원 조성지' 기념비 뒷면에 새겨져 있답니다.
'영험한 차를 올려 우리 임금 오래오래 사시도록 하고 싶은데, 신라 때 심었다는 종자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겠네. 이제야 두류산 아래서 차나무를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기쁘구나.
대숲 밖의 황폐한 밭 몇 이랑을 개간했으니 새 부리 같은 보랏빛 찻잎 언제쯤 볼만해질까. 백성들의 마음속 걱정을 덜어주려는 것일뿐 무이차처럼 명차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라네.'
점필재 김종직이 목민관으로 얼마나 애민정신이 깊었는가를 이 한편의 글로써도 엿볼 수 있는 것이지요. 엄천사 차향(茶香)에는 김종직 선생의 그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리산 사람들은 고려 때부터 차 공물의 폐단으로 엄청나게 시달려 왔어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고려말 혼란기와 조선초의 어수선한 시기에 지리산 주민들은 차나무를 베어버리거나 불을 지르기도 했다는 군요. 지리산 사람들의 그 고통은 고려의 해동공자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아주 절절하게 묘사돼 있지요.
'...(전략) 관청에서 어린 것, 노인 가리지 않고 마구 불러내어 험준한 산비탈 다니며 간신히 찻잎 따 모아 머나 먼 서울까지 등짐으로 져 달랐네. 이는 백성의 애끊는 고혈이나니 수많은 이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졌나니 일천가지 허물어서 한 모금 차 마련하나니 이 이치 알고 보면 참으로 어이없구나. 그대 다른 날 간원(諫院)에 들어가거든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해주게나 산과 들의 차나무 불살라 버려서 차 세금을 금지한다면 남녘 백성 편히 쉼에 이로부터 시작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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