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향자료

[스크랩] 산청. 함양 양민 학살사건의 전말

배꼽마당 2012. 11. 4. 11:25

 다음글은 지리산 커뮤니티의 최화수님께서 시리즈로 연재하고 계시는 지리마당 코너에서 복사해 온 글입니다.

6.25때 산청군 가현, 방곡,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 유림면 서주 마을에서 자행된 양민 학살 사건의 전말이지요.

학살된 사람의 숫자가 정확히 확인된 수가 704명이며, 확인되지 않은 숫자가 상당히 됩니다. 왜냐하면 일가족 모두가 몰살당하여 유가족이 전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누가 증언을 해 줄 사람이 없는 경우이지요.

이 문제는 아직도 미 해결 상태이며, 세상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똑 같은 부대에 의해 자행된 거창 신원 사건은 당시(6.25당시)에 밝혀졌지만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당국에서 철저히 여론화 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며 최근에 와서야 유가족들에 의해 문제 제기를 함으로 해서 세인들에게 알려지고 있으며 정부에서도 문제를 확인하고 산청군 방곡마을에 위령탑을 만들어 영혼을 위로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이웃에 살고 있으면서도 문제 사태를 정확히 모르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내고향 엄천의 이야기이기도 하여 글을 복사해 올립니다.

다음글은 최화수님에 의해 연재되는 즉시 울려 드리겠습니다.


(방곡 사건의 전말)

대지가 펄펄 끓던 지난 8월 12일이었습니다.
부산의 한 환경단체 회원들과 함께 지리산을 1박2일 일정으로 찾게 됐습니다.
지리산을 안내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함께 길을 나선 것이지요.
40여명의 환경단체 회원에게 지리산의 어느 곳이 좋을 것인지, 필자는 나름대로 고심을 했답니다.

정말 무더운 삼복염천입니다.
지리산에서 더위를 쫓아낼 곳이라면 너무 많지요. 시설이 좋은 휴양림도 있고, 명경지수가 흐르는 계곡, 구름도 걸려 있는 능선, 아름답고 서정적인 강, 부처님의 자비가 서린 사찰도 있지요.
하지만 필자가 안내한 곳은 납량과는 전혀 무관한 곳들이었습니다.
덕천서원, 성모석상, 전구형왕릉...그런 곳들이었지요.

지리산에서의 두번째 날인 13일, 이 날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어요.
아침부터 날씨는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듯했어요.
이 날 필자가 안내한 곳은 날씨와는 전혀 무관한 곳이었어요.
환경단체 회원들에게 필자가 좀 엉뚱한 놈으로 생각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필자가 안내한 곳은 능선도 계곡도 사찰도 아닌, 추모공원이었어요.
정확하게는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이지요.

경남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722번지 일원 2만2000평이 그 현장입니다.
이곳은 이른바 '산청 함양사건' 합동묘역으로 2001년 12월13일 착공 이후 4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거의 준공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합동묘역과 희생장소 보존지역, 참배단과 참배광장, 위패봉안각과 복예관, 위령탑과 회양문, 관리동 등이 드넓게 자리하고 있답니다.
지리산의 아픈 역사를 새겨놓은 새 명소이지요.

'산청 함양사건'이란 무엇일까요?
그 사건의 개요는 이 칼럼('최화수의 지리산 산책') 제13, 14호(2002년 2월)에 이미 실려 있습니다.
지리산이 안고 있는 현대의 비극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니까요.
1951년 2월7일 설 다음날, 지리산 양민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국군들에 의해 무참하게 희생이 되었답니다.

당시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는 공비토벌작전을 벌이고 있었어요.
이들은 '견벽청야' 작전명에 따라 명절을 즐기고 있던 지리산 주민들을 떼죽음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지요.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 등지서 무려 705명의 양민을 참혹하게 살해했답니다.
양민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총탄을 맞고 쓰러졌던 것이에요.

구형왕릉 들머리인 금서면 화계리에서 엄천강을 따라 서쪽으로 잠시 거슬러 오릅니다.
자혜리를 지나면서 엄천강을 버리고 방곡천을 따라 다시 남쪽으로 따라갑니다.
이 골짜기를 계속 따라들면 지리산에서 전기가 가장 늦게 들어온 마을인 오봉리에 닿게 되지요.
오봉마을에선 왕등재나 새재가 눈앞에 바로 올려다 보입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첩첩오지였던 방곡 골짜기였어요.

지금은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있는 곳까지 2차선 포장도로가 열려 있습니다.
추모공원의 규모나 시설도 놀랄만합니다.
'원혼소생상(寃魂甦生像)'이란 위령탑도 대단하고, '비탄의 벽'과 '고통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물들도 비극의 상황을 생생하게 떠올려 줍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강희근 시인의 헌시(獻詩)!
필자가 환경단체 회원들을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를 이 '헌시'가 설명해줍니다.

'양민을 적이라 하고
작전을 수행했던 이상한 부대
하늘 아래 있었습니다'
강희근 시인의 헌시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를 토하며 되묻고 있답니다.
"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은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합니다.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드넓은 부지에 합동묘역과 추모 조형물 등이 들어서 있지요.
2001년 12월13일 합동묘역 조성사업 착공 이후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사실상 준공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하지만 아직 준공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어째서일까요?
정부가 국회에서 통과된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거부하고 국회에 재의를 요청한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족에 대한 보상 등의 문제가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어요.
이런 사정 등으로 추모공원 준공식도 미뤄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산청, 함양사건'의 전말을 모른 채 지리산을 안다고 말할 수 없어요.
가현, 방곡, 점촌, 서주마을의 참극을 모르면서 지리산 역사를 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추모공원 복예관에는 영상실이 있어요.
이곳에서 '산청, 함양사건'의 개략적인 전말과 양민학살 등의 장면을 재구성한 17분 짜리 영상홍보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보다 먼저 강희근 시인의 헌시(獻詩)를 읽어볼까요.
위령탑은 억울하게 가신 님들이 반세기 이상 묻어둔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위령탑과 함께 '희생자의 상', '비탄의 벽', '고통의 벽'이 자리합니다.
그와 더불어 헌시를 통해 억울한 외침을 듣게 됩니다.
'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

'헌시'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양민을 적이라 하고
작전을 수행했던 이상한 부대
하늘 아래 있었습니다.

가현, 방곡, 점촌 사람 몰살하고
그 아래 야지 마을 사람 반으로 나눠
무차별 사살했던 이상한 부대
이 나라 땅위에 있었습니다.

대대로 살아온 것 죄가 되는가
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
제 나라 군대의 총알에 맞아죽은 백성들
산발한 채 원혼으로 반세기
하늘을 떠돌아 다니는 나라
이 나라 말고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부대 대장들이 붙들려
눈 가리기로
재판 받고 감옥 갔다 풀려나
승진해 가는 동안
나라의 권력은 善으로부터 고개를 돌렸으니
하늘 아래 권력이 이처럼 오래
죄인의 손 들어주고 다닌 나라
이 나라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는 義人들을 내고
진실 화안히 드러내니
이제는 냇물이 제 소리 내며 흐르고
노을과 이슬 저희 허리 펴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오! 반세기
자리에 한 번 앉아보지 못한 7백여 원혼이여
이제는 나라가 법으로 그대들 양민이라 하고
겨레가 입으로 그대들 님이라 부릅니다.
자리에 앉아 편히 쉬세요

진달래 피고 보리가 익는데
님들이 그리워 새들이 재잘거립니다
님들이시여 힘 들어도 오히려 불쌍한 죄인
죄인들
새들의 노래 안에 불러 들이세요.

중매재 고개마루
깨곰이 달리고 산머루 탐스레 익으면
거기 그 빛깔로 도란도란 오세요

오세요 저의 살아남은 자 곁으로
나라 잘못된 나라 되지 않게
염원 알알이 목에 걸고 어서 오세요.]



[산청, 함양 양민학살사건은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중심이 되어 1951년 2월7일(음 1워2일)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의 명목으로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휴천면과 유림면 일원에서 양민 705명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학살 현장은 금서면의 가현, 방곡, 휴천면의 점촌, 유림면의 서주마을 등 4개 지역이고 관련 피해 마을은 앞 4개 마을 외에 자혜, 주상, 화계, 손곡, 화촌을 포함한다.
같은 작전에 의해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이틀 뒤부터 3일간, 1951년 2월9일에서 11일까지 양민 719명이 학살되었다.

이 사건이 이른바 거창 양민학살사건인데,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12월16일 대구고등군법회의는 9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3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각각 언도했다. 최종책임자인 신성모(국방장관)나 최덕신(사단장)은 무혐의로 재판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이 재판은 같은 사건이었던 산청, 함양 양민학살사건이 철저히 은폐, 축소, 조작되는 가운데 진행된 것이다. 재판과정에서의 피고들의 진술이 시종 앞뒤가 맞지 않았다는 점, 국방부의 해당 작전일지의 탈루 현상 등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글은 시인 강희근님이 쓰고 산청, 함양사건 희생자 유족회가 펴낸 '산청, 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이란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국군이 무고한 양민을 이렇게도 많이 학살하다니요! 도무지 이해될 수 없고, 용남도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만행을 자행한 것일까요? 산청, 함양, 거창에서 국군 11사단 9연대는 어째서 1424명이라는 엄청난 주민을 학살했던 것일까요?

직접적인 원인으로 앞의 책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적시합니다.
'11사단의 작전지구가 빨치산들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 사건 직전에 적정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종래 군경에 피해를 많이 주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보복적 발본색원을 가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간접적인 원인들도 있습니다. 그 첫째가 '인적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11사단장 최덕신은 이른바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사단의 기본작전을 제시했지요.
이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 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하게 확보하고, 부득이 포기하는 지역은 인원과 물자를 철수하고 적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 빈 들판을 남겨준다는 것이에요.

이 견벽청야 작전은 최덕신이 중국군 장교로 복무할 때 국부군이 즐겨 쓰던 작전명이기도 했답니다.
견벽청야 작전이 국군부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의 중심이 된 것도 최덕신이라는 중국군 출신이 사단장이 되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군요.

그밖의 간접원인으로는 '6.25의 전황'과 '전쟁의 부도덕성', 그리고 부대적 요인, 전과적 요인, 심리적 요인 등을 꼽고 있습니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든 산청, 함양 양민들은 '견벽청야' 작전에 참담하게 희생되었으니 엄청난 비극입니다.
더구나 산청, 함양사건의 비극은 아직도 종결이 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글은 강희근 지음 '산청, 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에서 발췌초록한 것입니다.)

산청, 함양 사건의 양민 희생은 가현마을과 방곡마을, 점촌마을과 서주리 등에서 자행됐어요. 그리고 묵은터와 자혜리 등에선 방화가 저질러졌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은 가현마을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역시 산청, 함양사건 희생자 유족회가 펴낸 '산청, 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강희근 지음)에 실려 있는 내용을 발췌하여 옮겨봅니다.

[....11사단 9연대 3대대 2개 중대는 수철리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1951년 2월7일(음력 1월2일) 새벽 5시께 가현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작명 제5호'에 따른 첫번째 작전 실시 행보일 뿐만아니라 작명 제5호 부록의 1행 "미복구 지대의 적 수중에 든 주민은 전원 총살하라"(변조되지 않은 내용)을 집행하기 위한 행보였다.

군인들은 잰걸음으로 6시께 고동재를 넘어 가현으로 내려 쏟아졌다. 가현마을 뒤쪽 솔밭 언저리에 당도하여 중대장의 지시를 받으며 조금 쉬고난 다음, 7시께부터 5, 6명씩 조가 되어 40여 가구를 뒤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을 밖으로 내몰고 가축과 주요 가재도구를 들어내면서 웃담의 한 집에 가현마을 주민들을 다 모았다.
중대장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검은개' '노란개' 등의 말을 섞어가면서 태극기를 보관하고 있는 집이 있는지, 군경 가족들은 손들어 보라는 등 횡설수설을 하다가 주민 전원을 뒷동산으로 몰아갔다.

군인들이 총을 겨누면서 양켠으로 서고 뒤쪽을 받치면서 주민들을 압박했는데, 그들은 화랑부대 완장을 차고 있었다.
뒷동산을 넘어 낭떠러지로 내려서면 논바닥인데, 이쪽으로 주민들을 몰아놓으면 한 쪽 벽을 두고 반대켠에서 총살하기가 용이했을 터였다.

군인들이 총대로 등을 떠밀고 치면서 주민들을 낭떠러지로 몰아칠 때 어린애들이 떨어져 사람들 틈에 깔려 죽고 그 어머니는 팔이 부러졌다.
이 때 가현마을은 화염으로 휩싸여 불길이 하늘로 솟고, 수백년 엎드려 일구어온 마을의 문화와 역사와 풍정이 한꺼번에 잿더미로 변하는 일대 개벽의 진동이 일어났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논바닥에 4열 횡대로 앉혔다.
군인 1명이 주민 4명을 대상으로 학살을 했으므로 천운이 아니고서는 살아날 길이 없었다.
여기서 학살된 주민은 123명이나 되었고, 시체더미에서 살아난 사람은 8명 정도로 밝혀졌다.

<윤한영씨(73세, 부산 거주)의 증언>

우리 집은 고동재 쪽으로부터 첫 집이었다.
6시께 변소에 가기 위해 마당을 지나가는데 뒷산 풀밭에 군들이 떼를 지어 어른거렸다. 급히 집안으로 들어가 식구들을 향해 "큰일났다. 빨리 일어나요"하고 소리쳐 잠을 깨웠다.
하지만 "뭐 별일 있을라고. 오늘은 명절 아니가" 라는 어머니 말을 듣고 그냥 있기로 했다.

...나는 4열 맨 바깥쪽에 앉고, 어머니는 3열 바깥쪽에서 두번째로 앉았다.
사격이 시작되려는 찰나 어머니가 뒤를 돌아 나를 껴안으며 소리쳤다.
"이 어미가 너를 죽이는구나. 아침에 네가 도망치려고 할 때 말리지 말아야 하는 건데!"

어머니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내 귀로 흘러들었다.
1차 사격 후 살아 있던 사람들이 뛰자 확인 사살을 했는데, 이 때 어머니의 허리에서 내장이 흘러나와 논바닥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잠시 혼절했다가 눈을 떠보니 아들을 감싼 채 머리와 허리에 총을 맞아 세상을 등지고 만 어머니의 무게가 피범벅으로 느껴져 왔다.

꿈쩍거리다가 일어나려고 하자 군인들이 소리쳤다.
"산 사람은 모두 일어나라. 살려 주겠다."
나는 갑자기 힘이 빠지고 두려워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5, 6명이 일어났다.
그러자 군인들이 사정없이 확인사살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방곡마을 쪽에서 연발의 총소리가 천지를 무너뜨리는 소리로 들려왔다.
눈앞에는 눈 뜨고는 못볼 현상이 즐비했다.
턱만 남아있고 얼굴은 없어져버린 사람이 숱하게 앉아 있는가 하면, 일부는 몸체가 화염에 덮여 있기도 하고, 일부는 시체가 타 검정 덩어리로만 남아있기도 했다.

불탄 집으로 갔는데, 기막히게도 아내가 오른쪽 무릎에 총상을 입은 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출처 : 화남초등학교 총동창회(경남 함양 유림)
글쓴이 : 김용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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