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엄천사를 건립하게 된 배경에 관하여 기록된 엄천사 흥폐 사적문을 김윤수 교수(인산 죽염 김일훈 선생의 셋째)가 번역한 글입니다. 휴천면 남호리 절터의 유래를 보다 정확히 기록한 것으로 휴천면지에도 실어 놓았습니다.
휴천면 남호리 동호마을을 보통 절터 마을로 더 많이 불려졌는데 이는 그 유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숙종때 절터마을에 있던 엄천사를 중건했는데 그 규모가 18동 100칸 크기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동호마을 전체가 엄천사 사찰터였다고 봐야겠지요.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으며 그나마 유물들이 발견되면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방치한채로 골동풍상 한테 헐값에 넘겨 버린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엄천사 흥폐 사적문은
함양역사관(김윤수교수 개인홈) 홈피에서 퍼 온글입니다.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는 신라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창건한 것이다. 당나라 건부(乾符) 10년(건부는 6년에 그치고 이때는 中和 3년임) 계묘(883,신라 헌강왕9) 봄에 헌강대왕이 화암사(華岩寺:화엄사)에 사신을 보내어 결언선사를 초빙하였다. 선사가 이르자 왕이 예로써 대우하고 분부하였다.
"궁궐에 선사를 초청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도로써 나라를 다스렸지요. 법흥왕의 도리사, 진흥왕의 황룡사, 무열왕의 감은사, 애장왕의 해인사, 경문왕의 숭복사는 다 선왕을 위해 지은 것입니다. 때때로 그 절에 불공을 드려 선왕의 명복을 빌고 국운의 연장을 기원했으니 이것은 대대로 계승하는 대업입니다.
내가 그 일을 잇지 못한다면 선왕을 저버리리는 것입니다. 선사를 번거롭게 이곳에 오게 한 것은 선사를 통해 그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듣건대 해동의 명산이 많지만 지리산이 가장 높고 깊다고 하니 선사가 그곳에 가서 터를 잡고 절을 지어 영원히 우리 선고왕(先考王)을 위해 명복을 비는 원찰로 만들어준다면 그 자비와 보시가 클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사가 명을 받들어 지리산에 와서 산을 따라 맥을 점치고 시내를 따라 거슬러올라가다 마침내 이 땅을 얻었다. 보고를 받은 왕은 백성을 동원하고 조세를 돌려 쓰게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같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절이 지어지자 왕은 엄천사라 하사하였다. 그뜻은 엄히 계율을 지켜 한량없는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낙성식의 법회를 열 때 왕도 친히 행차하여 선고왕을 위하여 불공을 드렸다. 드디어 결언대사를 보정사(輔政師)로 삼고 사라국사(娑羅國師)라고 칭하였고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왕비 김씨가 곡식 천 섬을 희사하여 죽은 아우를 위해 명복을 빌고 최치원(885년 귀국)에게 명하여 발원문을 짓게 하였다.
고려 시대에 절이 퇴락했으나 보수하지 못하였다. 남송 건염(建炎) 2년 무신,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고승 성선(性宣) 대사가 강을 건너 서유(西遊)하다가 이 절에 유숙하고는 절의 퇴락상을 보고 발분하여 중수할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시주자를 구하여 중수하니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성선대사는 강법사(講法師)가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절은 다 불에 소실되었다. 강희(康熙) 25년 정묘 우리 임금님 즉위 14년(숙종13,1687)에 안양사(安養寺:지금의 문정리 법화사) 승려 인욱(印旭)과 혜문(惠文) 등이 안양사가 험고한 데 있어 왕래가 어렵다며 평탄한 엄천사 터로 절을 옮기자고 대중에게 동의를 얻고 군수와 관찰사에게 진정하여 승낙을 받아 수백 명의 승려들이 재물을 모으고 공역을 담당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 땅은 향교의 수세지(收稅地)로 편입되어 있어 절을 지을 수 없는 형편이라 세월이 천연되었다.
경오년(숙종16,1690) 봄에 동의를 얻어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 벽암 각성(碧巖 覺性:1575-1660)의 손자인 침허(枕虛)의 아들 죽계당(竹溪堂) 승현(僧絢) 대사가 지휘하여 중건하였다. 옛 주초를 인하여 18동(棟) 100간의 건물을 지었다. 임신년(1692) 봄에 왕명이 내려 4결(結)이 면세전으로 되었다.
승민(勝敏)이 사적을 지어달라고 청하여 강희 32년 계유(1693,숙종19) 2월 5일에 무가암(無可菴)의 탄부(坦夫)가 사적기를 지었다. 이후 48년 기축(1709,숙종35) 6월 2일에 시와 서문을 지었다. (시서 생략)
*엄천사는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절터 마을에 있던 큰절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 신라 시대에 하동, 구례, 함양 등지에 김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나무를 심어 전래되는 것을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함양군수(1471-1476)로 부임한 뒤 새로 차밭(茶園)을 조성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기념하는 사적비가 마을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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