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이야기

마지막 빨치산과 지리산 선녀굴

배꼽마당 2023. 11. 15. 19:24

   마지막 빨치산과 지리산 선녀굴

  

2008년 8월 25일 오전 10:52



* 아래의 글은 지리산 선녀굴에 얽힌 비화이며 본인이 직접 자료를 조사하고 1962년 당시에 사실을 목격한 분과 수색작전에 직접 참여를 했던분들로부터 들었던 것들을 정리를 한 것입니다. 그분들 대부분이 연로하시어 생존해 계실때 지리산에 묻힌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해 놓으려고 스토리텔링화 한 것입니다.




지리산은 겨울에 눈이 참 많이 내린다. 지리산 중턱은 한겨울엔 예사로 영하 10도를 오르내린다. 남부지방에서 가장 일찍 첫눈이 내리기도 하고 단풍의 빠알간 색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천왕봉 주위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마치 열대 우림이 질펀한 아프리카의 평지에서 만년설에 뒤 덮여 있는 킬로만자로 설원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겨울이 빨리 찾아오고 봄 또한 늦게 찾아오는 지리산 어귀마다 숨어 있는 전설이 참 많기 도 하다. 잊혀져 가는 전설도 있고, 잊혀질 뻔한 전설도 있고 새로 생겨나는 전설도 있다.

1962년 2월로 접어 든 마천의 추성골에는 아직도 겨울이 한창이었다. 천왕봉 아래의 칠선 계곡 쪽에는 눈이 희긋희긋 쌓여 있는 모습이 추성 쪽에서 치어다 보노라면 겨울의 기운이 지나가기는 요원해 보였다. 사찰 경찰(유격대 성격의 보조 경찰업무) 소속의 문영만과 지동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칼빈 소총의 잠금 장치를 한 채로 흙으로 채워 놓은 마대로 쌓은 토치카 안에서 지루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55년 2월에 이르러 빨치산의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7월 이후 분산해 있던 빨치산들은 다시 집결하여 조직을 복구하고 점차로 활동을 강화하였다. 경찰의 작전이 55년 후반기부터 시작되어 56년까지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55년 조국출판사, 전북도당, 전북의 남원, 정읍군당, 전남 남부 지도부 등의 빨치산 부대가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이현상이가 빗점골에서 사살되고 이후 지리산에 빨치산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당국에 의해 공식 선포된 때는 1955년 5월 23일이었다.
이런 공식 발표와는 무관하게 지리산에서는 56년 말까지, 43명의 빨치산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경찰에서는 끈질기게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 작전은 계속 되었고 하나씩 하나씩 빨치산의 숫자는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1953년 7월에 휴전이 되었고 그 이후 거의 10년이 지났어도 지리산에서는 빨치산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정황에 따라 경찰 당국에서는 넓은 지리산 일대를 방위하거나 구석구석을 일일이 수색을 할 수 없었던 사정 때문에 경찰서에서는 경찰서장의 재량으로 사찰 경찰을 임시로 임명하여 향토를 방위하거나 빨치산 소탕 작전 때는 도우미 역할을 하게 했다.

문영만과 지동식도 이런 사찰 경찰로서 추성골 구역에 대한 빨치산으로 부터의 방어와 신고의 책임을 맡고 나타나지도 않는 빨치산들과의 정신적 전쟁을 치루고 있는 중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 가까이 지난 탓에 전쟁에 대한 아픈 상처나 빨치산들의 침투로 인한 식량이나 가축 약탈에 관한 소식도 없었고, 마천 지서의 지시에 따라 무한정 지리산 쪽으로 향한 산길 입구의 경계 근무만 열심히 하는 것이 그들의 소일 거리였다.

가끔은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칼빈 소총을 소유하고 있는 덕분에 마천 지서에 있는 순경들의 눈을 따돌리고 몰래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그럴 때면 지리산 구석구석에서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는 숯 꾼 들에게서 농주 몇 사발을 얻어 마시는 재미도 있었고, 재수가 좋은 날이면 불법으로 굵은 나무들을 벌목하여 숯을 생산해 내는 사안에 대해 눈을 감아 주는 조건으로 그럴싸한 용돈도 몇 푼 건질 수 있는 제법 매력적인 직업이기도 했다.

비상 사태가 발생할 때면 마을 청년들로 구성된 향토 방위대를 소집할 권한도 일부 부여 받은 탓에 마을에서는 제법 거들먹거려도 누구 하나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고사리나 산채를 채취하러 가는 마을 사람들을 빨치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일일이 감시를 할 수 있는 특권도 있었고 땔감으로 가장 매력이 있으며 시장에 지고 가면 가장 잘 팔려 나가는 관솔(소나무 기름이 엉긴 나무)을 채취하러 갈 때면 일일이 이 두 사람의 사찰 경찰로부터의 허가를 얻고서야 통과 할 수가 있었다.

몇 년 동안 이렇다 할 전투하나 치루지 못하고 기약 없는 방위 임무만 부여받은 채 하루 하루를 축내고 있던 문영만과 지동식은 추성골 뒷산에서 곰을 보았다는 나무꾼의 제보에 따라 몇 달 동안 뜸했던 곰 사냥 생각이 간절했다. 꼭 곰이 아니라도 좋았다. 송아지만한 노루 한 마리를 혼자서 거뜬히 사냥을 한 경험이 있는 사냥개 한 마리를 길동무하여 사냥 길에 한번 나서 보는 것도 그렇게 나쁜 계획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추성 안 동네에 살고 있으면서 나무꾼이나 석이 버섯의 전문 채취꾼으로 유명한 허정갑을 길 안내자로 동행한다면 사냥 계획은 완벽을 갖춘 셈이다. 18세의 기골 장대한 허정갑에게는 5년 생 대나무로 깎은 죽창 하나를 쥐게 하고 그네들은 벽송사의 뒤 쪽 산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6.25를 거쳐 너무나 자주 출몰하던 빨치산들의 은폐물을 제거하기 위해 군에서 일부러 불을 질러 댄 탓에 큰 소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곤 주변이 온통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약초꾼들이나 나무꾼들이 오르내리던 길목이었지만 빨치산들의 출몰 위험 때문에 산길은 다져져 있지는 않았다.

실탄을 수발 채운 탄창 집을 총의 몸통에다 밀쳐 넣었다. 아무리 자신을 방어 할수 있는 총을 들고 산을 오른다지만 문영만과 지동식은 내심 긴장을 하고 있었다. 신출귀몰하다던 정순덕의 무리가 언제 어디서 숨어 있다가 그네들에게 집중 사격을 할 지도 모른다는 강박 의식이 그네들의 뇌리에 감싸 돌고 있었기에 긴장을 풀지 못했다. 벽송사 뒤쪽의 줄기 능선을 따라 선녀굴을 거쳐 독 바위를 넘어서 쑥밭 재까지 돌아볼 계획이었다.

마천 지서에서 알게 된다면 빨치산 수색을 위한 작전이었다고 변명을 할 요량으로 내심 느긋함도 함께 그네들의 뇌리에 쌓여 있었다. 그럴싸했다.
양지바른 곳을 제외하곤 북 서쪽으로 향한 산 능선에는 겨우 내내 쌓였던 눈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짐승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산돼지나 곰의 향방을 추적하기에 아주 용이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 동안 사냥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터에 날씨가 맑고 눈이 쌓여 있는 지리산의 지리적 상황을 놓치지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계획이었다.

또 하나는 아직도 지리산 어딘가에 숨어 지낸다는 정순덕이가 활동한다면 눈 위의 발자국으로 추적하기에 아주 용이하다는 계산도 함께 계획 속에 담고 있었다.

누가 알랴! 운이 좋으면 지리산 어딘가에 꼭꼭 숨어서 신출귀몰한 망실공비 정순덕이라도 잡거나 사살을 한다면 그 보상금으로 평생을 행복으로 보장받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산 능선을 두어 시간을 올랐을 때 갑자기 개가 이상한 신음과 함께 발버둥을 치며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 짐승의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

문영만의 뒤를 따르던 지동식이가 외쳤다.

" 개를 풀어 놓아야 하겠네요."

사냥꾼들을 자주 따라다녀 보았던 추성 토박이 허정갑이도 흥분을 한 듯 한몫 거든다.

문영만은 잽싸게 사냥개의 목줄을 풀어 주었다. 무엇인가 냄새를 맡은 듯 개는 산 능선 의 위 쪽이 아닌 맞은 편의 선녀 굴 쪽으로 쏜살같이 달린다. 어떤 냄새를 맡은 게 분명했다.

" 곰일까요? "

허정갑의 신음하듯 나지막한 목소리 외엔 일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총을 바투 쥐고 선녀 굴 쪽을 향하여 총구를 겨냥했다. 납작 엎드린 두 사람의 표정에는 몹시 긴장을 한 모습과 함께 신경이 축 늘어져 나태해진 여태까지의 동작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그 동작이 무척 날쌨다. 뒤쪽에서 망을 보고 있는 허정갑를 향해 엎드리라고 손짓을 한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몹시 긴장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송 맺히기 시작했다.
만약 건너편에 곰이 있다면 사냥개 한 마리가 우람한 곰과 맞 상대 하기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은 더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 조준하여 곰의 정수리를 쏘아서 일격에 쓰러뜨려야만 승산이 있으며, 섣불리 건드렸다간 상처를 입고 화가 난 곰의 분노에 사냥개의 목숨은 물론, 가까이 있는 세 사람의 생명도 완전하게 보장받지는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맞은편의 능선 쪽에는 선녀 굴이 있다.

6.25 무렵에는 약 2만 여명이나 되는 빨치산들이 이 지리산에서 네 활개를 치며 하나의 새로운 질서와 조직화된 세력으로 독립하여 군, 경찰이나 지리산 인근의 양민들을 참 많이도 괴롭혔다. 마을의 젊은 사람들에게 보급 투쟁이라는 명목으로 마을에서 약탈해 온 식량이나 생활 물품들을 그네들에게 운반하게 하여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이나 과거의 행적이 그네들의 이념에 부합되는 사람은 총살을 하고, 나머지들은 세뇌 교육을 시켜 빨치산 부대로 편입하곤 했다.

빨치산이란 낱말이 뭐였던가!

비정규 유격대를 가리키는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에서 온 말이며, 넓게는 어떤 정당이나 단체의 열렬한 지지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이 빨치산이란 용어는 상당 기간 금기 시 되어 온 게 사실이다. 해방 이후, 남북 대치의 특수 상황에서 빨치산이란 용어는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하며 주로 산악지대를 근거로 전투활동을 벌이는 민간인으로 조직된 비정규 유격대원을 가리키는 말로 한정되어 쓰였다. 이 때문에 빨치산은 폭력 공산주의자를 가리키는 제한적인 언어 의미를 갖게 된 것이기 때문에 무장공비로 많이 쓰였다가 빨치산이라는 용어도 함께 쓰이게 되었다.

빨치산이 가장 많이 출몰하였던 마천 지역에서는 경찰의 힘으론 그네들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어서 마을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향토 방위대를 조직하여 빨치산과 대적할 수 있도록 편제를 하였으며 이 향토 방위대와 빨치산과의 최초의 전투는 선녀 굴과 아주 가까운 독 바위 아랫마을 노장대에서였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향토 방위대와 빨치산과의 전투는 후에 여러 번의 마천 지서 습격사건, 면 소재지인 당벌 마을의 보루에 대한 대대적인 빨치산의 공격 등이 있었다.

함양 쪽에서의 빨치산의 주요 거점 지역은 노장대 인근의 신밭골이나 쑥밭 재였으며 산청 쪽의 빨치산 부대와 정보 교환을 할 때는 주로 사립 재에서 주요 지시 사항이나 공격 목표, 부대 사항등의 정보를 주고받았다.

특히 함양독 바위 인근에는 천연의 요새인 선녀 굴을 위시해서, 노장대 마을의 위쪽에 박쥐 굴, 금낭 굴, 상대 굴등이 있어서 눈, 비를 피하거나 한겨울에 불어오는 칼 바람을 피하기엔 아주 적당한 장소였기에 많은 빨치산들이 거의 기거를 하다시피 했던 곳이 바로 선녀 굴 근처였던 것이다.

갑자기 개가 흥분을 하여 짖는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적막이 감도는 그 소용돌이속에 사냥개가 짖는 소리는 골짜기 구석구석까지 메아리가 된 탓인지 아주 둔탁한 소리로 들려왔다.

" 무엇이 있는 게 분명합니더! "

문영만의 곁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엎드려 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지동식이가 나직하게 읖조린다.

개는 일회성이 아닌 계속 울부짖듯 짖어댔고 소리의 톤은 한층 더 높아져 갔고 요란했다.
갑자기 움푹 파여진 골짜기에는 개 짖는 소리의 파장이 물결이 되어 골짜기로 골짜기로 울려 나갔다.

" 타 앙 "

고막을 찢어낼 듯한 총 소리의 굉음이 천지를 진동하며 다시 요동 쳤다. 맞은편의 엄천강 건너 견불동 뒷산에서까지 총소리는 반향 되어 돌아 온 소리는 아주 둔탁한 울림으로 변화되어 오금을 저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순수한 사냥용으로만 쓰이는 엽총의 소리가 아니었다. 6.25가 끝나고서도 지리산 일원에서 계속 활동을 하고 있는 빨치산 소탕을 위하여 의용 향토 방위대의 일원으로 활동해 왔던 문영만은 방금 들렸던 소리가 칼빈 총의 총구에서 울린 소리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총소리와 함께 그렇게나 요란하게 짖어대던 개의 소리도 함께 뚝 끊어졌다.
세 사람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송 맺혀지기 시작했다. 식은땀이었다.

문영만과 지동식이 방위하고 있는 이 구역에서 칼빈 총 소리가 난 것은 분명 공비의 소행이라 확신했다. 6.25가 끝난지도 벌써 10여 년이 지난 이 지리산에서 군사용으로 쓰이는 칼빈 총의 소리가 났다는 사실은 공비가 쏜 것이 분명했다. 만약 지서의 순경이 쏜 총 소리였다면 사전에 자신들과의 조우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총소리는 분명 공비의 소행이라고 확신했다.

잠시 후 선녀 굴의 가파른 바위 위에 물체가 어른거렸다.

" 공비입니더! "

문영만과 지동식의 뒤쪽에서 납작하게 엎드려 있던 허정갑이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지동식과 문영만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 탕 탕 탕 탕 탕 타앙 "

80도의 경사진 선녀 굴의 바깥 쪽 바위 위에 시커먼 사람의 물체가 어른거림과 동시에 두 발의 총구는 그 물체를 향해 집중 사격이 가해졌다. 골짜기는 다시금 요란하게 콩 볶는 듯한 소리로 천지를 진동시켰다.

바위 위에 있던 검은 물체가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나무 사이에 어른거린 물체는 분명 사람같이 보였다. 짐승이 아니었다.
연이어 두 사람의 총구에서는 계속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 탕 탕 탕 탕 탕 "

선녀 굴 위의 우람한 바위에 총알이 튀면서 시뻘건 불꽃이 팽 팽 돌았다.
둔탁한 총소리의 굉음이 어느 순간엔가 멈추는가 싶더니 또다시 무서울 정도의 고요가 시작되었다. 더 이상의 광란적인 총소리하고 개 짖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사냥꾼의 안내자 역할을 맡아 따라나섰던 허정갑의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세 사람의 등에서는 땀에 절여진 탓에 찬 늦겨울의 찬 공기 사이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가끔씩 천왕봉 쪽에서 하강하는 찬바람에 심한 한기를 느꼈어도 세 사람은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내 심한 한기를 느낄 정도로 차가움이 감지되어 왔다. 해가 기울어진 골짜기에선 벌써 어둑해져 갔다. 심한 공포의 기운이 주위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사격을 멈춘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엎드려 쏴 자세를 계속 견지하고 있다.
마치 사격 자세를 취하다가 갑자기 얼어서 몸이 굳어버린 동사자의 모습 그대로이다. 약 30여분이 시간이 흘러갔다고 생각되었다.

" 공비일까요? 공비가 분명하지예? 분명히 사람이 총에 맞고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데...... !"

 

 

                                                       ( 애절한 사연의 현장 지리산 선녀굴)

 

 
허정갑의 뇌까림에 문영만과 지동식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그 때까지 이마에서는 계속 식은땀이 송송 흘러 내리고 있다.

짙은 산 그림자가 조금씩 조금씩 위에서부터 아랫 쪽으로 흘러내린다고 생각이 되었다. 모습이 참 아름다웠지만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그런 감성적 느낌이 전혀 발동이 되지 않는 것은 반사 신경의 탓이었을까! 위쪽에서 내려다보이는 선녀 굴의 주변은 몹시 아름다웠다. 나무가 가려서인지 동굴 주변은 정확히 보이질 않지만 무엇인가 사건이 발생한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네들은 지금 귀신에 홀려 있는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 비몽사몽하는 어리벙벙한 상태로 넋을 잃고 아래쪽만 계속 주시를 하고 있은 것이다.

" 바위에서 떨어진 것이 공비가 아니고 그냥 사냥꾼이면 어떡하지예? "

엎드린 채로 무엇엔가 쫒기는 듯한 허정갑은 혼자서 계속 대꾸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문영만과 지동식과는 조금 다르게 허정갑만 긴장이 풀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약 30여분이 흘러갔어도 선녀 굴의 주변에서는 1시간 전처럼 산골짜기에 흐르는 전형적인 늦겨울 날씨와 을씨년스러운 찬바람에 억새 잎과 싸릿대가 비벼대며 사각이는 소리만 나지막하게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 혹시 공비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우릴 공격해 오면 어떡합니꺼? "

계속 불안한 마음과 공포감으로 산길 안내자인 허정갑은 빨리 이곳을 피하자는 애절어린 표정과 함께 두 사람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다.

" 이제 이곳을 빨리 뜹시더. "

드디어 결단을 내린 문영만은 지동식, 허정갑과 함께 선녀 굴과의 반대쪽 산언덕으로 미끄러지듯 달음박을 쳤다.

큰 소나무의 뒷 쪽에서 산 죽 비트에서 공비들의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서 세 사람은 머리 뒤쪽이 시큰하면서도 이상야릇한 공포감을 함께 머금은 채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고요하고 적막의 연속이던 선녀 굴의 인근에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산골 아래의 우남 마을, 세동마을, 송대 마을 추성, 광아리 마을 등지에서는 사람들이 불안감에 몸들 바를 모르고 있었다.

" 또 난리가 났나? "

선녀 굴로부터 약 2km 아래에 위치한 송전리 송대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문을 꼭 걸어 잠근 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초저녁부터 불을 켜지도 않은 채 마을 사람들 거의가 뜬눈으로 밤을 지샐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저녁 사찰 경찰이었던 문영만과 지동식은 오금이 절인 몸을 뒤로 한 채 허겁지겁 마천 지서로 달려가서 공비 사살 사실을 신고했다. 저녁이 되고 날은 이미 저물었는지라 다음 날 새벽에 사살된 공비의 시체 확인을 위해 출동하기로 하고 면소재지인 당흥 마을의 청년들로 구성된 향토 방위대와 추성 마을의 향토 방위대의 비상 소집과 함께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선녀 굴 주변의 수색 작전에 참여를 하기 위함이었다.

추성의 석덕완을 위시한 20여명의 향토 방위대, 마천 지서의 순경 2명, 사찰 경찰인 문영만, 지동식, 길 안내자로 선녀 굴까지 함께 따라갔던 허정갑, 6.25 전후로 마천 지서장의 지시에 다른 마천 대항군의 일원으로 획획한 전공을 세웠던 윤갑수 이동근 이동식도 함께 동행을 했다.

" 내가 그렇게나 잡을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못 잡고 어디서 못된 짓을 하고 있는
지 모르겄구먼! "

" 누구 말인데예? "

마천 대항군의 일원이었던 이동근에게 허정갑이가 호들갑스럽게 묻는다.

" 누구긴 누구야. 안완도 강우형을 말하는 거이지! 그 놈들일 수도 있어! "

" ? "

" 김희준, 이은조, 이홍희, 지동선, 이용순, 이재봉, 정순덕이가 함께 뭉쳐 다니
다 가 늦게까지 남았던 놈들 중 김희준, 지동선이는 안의 동도에서 54년 10월쯤
사살되고, 정순덕이 하고 이은조, 이홍희가 아직도 지리산을 헤매고 다닌다카더
라. "

담배를 한 개피 꼬나 물던 이동근은 다시 말을 꺼낸다.

"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몇 놈의 빨갱이 놈들이 이 지리산
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

" 정순덕 이은조 이홍이 이 세 놈 뿐입니더. 이 세 놈들만 잡으면 지리산에는 더
이상 빨 갱이가 없는기라예 "

마천지서 소속 박 순경이 함께 거들었다.

" 안완도 강우형이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 ! "

' 혹시 어제 총 맞은 놈이 정순덕? '

만약 정순덕이를 사살했다면 그에 대한 보상금이 다른 빨치산 보다 훨씬 비싸다고 알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을 보장받는 보상금이 나올지도 모른다.

정순덕은 1933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을 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출신 성석조씨와 열 여섯에 결혼을 하였고, 지리산 산골에 살던 성석조는 자기 마을에 진주한 인민군에게 포섭을 당하여 빨치산이 되었고 그 해 9월 남편을 찾아 지리산에 입산을 하게 된다.

1951년에서 1953년까지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 편입되어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되며 1952년 대성골 전투에서 남편의 전사를 확인하게 되고, 1953년 노영호 부대에 편입되어 활동 무대를 덕유산으로 옮기게 되고 덕유산 일대와 기백산, 월봉산, 금원산, 황석산, 괘관산을 거쳐 다시 지리산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된다.

지리산의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순덕을 가리켜 '순딕이'라고 불려졌고,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약하는 전설의 여인 정순덕을 지칭하던 지리산 사람들의 무딘 발음에서 나왔던 말이었지만 사실 정순덕의 본명은 호적상 정순점으로 나와 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제국은 수세에 몰린 태평양에서의 해상 전쟁을 일본 쪽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이상한 작전을 하나 펼쳤다.
가미가제 특공대 작전이다.
그 젊디젊은 일본군 병사들은 폭탄을 가득 실은 전투기를 몰고 가서는 미군의 함대와 함께 자폭을 하거나 아니면, 돌아올 연료 부족 때문에 100%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아랑 곳 하지 않고, 영광스럽게 출전하여 죽어 갔다. 그네들은 조국을 위하여, 그네들이 자랑스럽게 신의 하나로 경배하던 일본 천황을 위하여 영광스럽게 죽게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는지도 모른다.

정순덕은 어떠했는가!

사실 6.25가 발발했던 1950년의 산청군 삼장면 내원골은 지리산 오지중의 오지였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잘 포장되고 길이 쭉쭉 뻗어 외래 관광객을 맞이하는 관광지가 되어 있지만 당시의 지리산 일대의 문화는 19C의 옛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원시의 냄새가 풍길 정도의 수준이었을 게다.   

                                               
그런 환경에서 좌, 우에 대한 무슨 사상적 개념이 있었으며 무슨 이데올로기의 철학이 있었을까? 주어진 환경에 순종을 하며 여자로 태어나서 한 남자를 만나 집안 살림을 야무지게 해 나가며 아들 딸 쑥쑥 잘 낳고 살림을 조금씩 불리어 나가는 재미로 정순덕은 평범한 여자로서의 꿈을 가졌을 게다. 17살이라고 하면 요즘엔 고등학교 1학년의 수준이 아니던가! 정순덕에게 무슨 이념적 철학과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신봉적 자세가 깃들여 있었을까?

정순덕의 비극은 6.25로부터 출발한다. 당시에 지리산 인근에 살던 사람들은 공산군이 들어오면 그네들을 환영하는 체 해야 했고, 국군들이 들어오면 역시 반기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신혼에 접어든 정순덕의 남편 성석조는 그런 와중에 빨치산에 포섭 될 수 밖에 없었고 빨갱이가 되어 버린 성석조를 잡기 위해 경찰들은 정순덕이나 정순덕의 가족들에게 많은 고통을 가했으리라. 남편이 그리워 정순덕은 결국 산으로 들어갔고 그녀도 역시 '진양군 유격대'의 일원으로 빨치산이 되고 만다.

나중에 국군에 의한 대대적인 빨치산 소탕작전이었던 대성골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빨갱이보다 더 열렬한 빨갱이가 되어 버린 것이리라. 산골 새색시로 출발한 그녀에게 무슨 사상적 이념이 내재되었을까! 6.25라는 비극적 사실에 본의 아니게 좌와 우 중 하나를 선택 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녀의 남편 성석조는 우를 선택할 권한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좌의 편에 선택되어진 남편의 운명에 정순덕의 운명도 함께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게 비극이었다.

빨갱이가 되어 버린 남편을 잡기 위해 정순덕과 정순덕 가족을 경찰은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간 장본인은 김일성이가 아닌 '국군과 경찰이다'라고 생각한 정순덕이가 아니었겠는가!
분노와 증오가 뒤 엉켜 정순덕은 더 열렬하고 광적인 빨치산이 되었을 것이리라.

문영만은 내심 긴장이 되었다. 출세의 귀로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함께 선녀 굴로 올라가고 있는 지동근의 생각과 느낌도 꼭 같았다.

" 동식이 아재하고 동근이 아재는 빨갱이 잡으러 산청 쪽에서 많이 활약했다 카던
데, 빨 갱이들이 지리산에서 어떻게 추운 겨울을 지냈을까요? "

자주 촐삭거리는 허정갑이의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 햐! 그놈들! 지독한 놈들이제. 쏙밭 재나 신밭 골 근처의 목기 나무꾼들이 만들
어 놓은 움막집에서 지내거나 선녀 굴, 독 바위 밑의 박쥐 굴 금낭 굴, 상대 굴
같은데서 지내거 나 또 어떤 때는 대낮부터 납작한 돌에다가 불을 지펴 달군 후
에 저녁에는 그걸 모포로 감싸서 그 위에 깔고 자면 추위를 이겨 낼 수 있다
더구먼. "

" 정순덕이가 몇 년 전에도 선녀 굴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카던데요. "

" 내사 마 보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전에 공비로 활동하다 자수한 서덕상의 말에
의하면 정순덕이가 선녀 굴에서 숨어 지내다가 공비 토벌대가 바로 선녀 굴 앞에
서 진을 치고 있었어도 결국 잡지 못했다 카던데 "

" 순딕이는 귀신인가 봐요! "

" 순딕이도 귀신이지만 나중에 가 보면 알것지만 선녀 굴 입구는 아주 작은데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살림을 해도 될 만큼 널찍해서 공비들이 아주 좋아하는 곳이
지! 그 안에서 이틀 밤낮을 굴의 벽 안쪽에 딱 붙어 굴 안까지 토벌대가 대강 수
색을 했는가 몰라도 결국 순딕이는 잽히지 않았다 카더라. "

" 선녀 굴까지 나무하러 많이 다녔어도 선녀 굴 안이 그렇게 넓고 깊은 굴이 있다
카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요. "

" 그런데 12년 동안이나 산 속에 있으면서 무얼 먹고 살았을까예? "

" 햐 이놈 궁금한 것도 많구나! 지리산 빨갱이들은 참 복도 많재이. 가을이 되면
논에 내려와서 나락 이삭을 많이 안 훑나! 그 훑어 놓은 나락을 어디에다가 저장
해 놓았다가 큰 소주병에 그걸 넣어서 긴 꼬챙이로 한나절 내내 비벼 대면 한 주
먹의 쌀이 만들어지는 기라. 개발딱지(개발나물)하고 쌀하고 함께 넣어서는 소금
에 간을 해서 죽도 해 먹고, 밤 버섯을 따다가 소금을 뿌려 볶아 먹기도 하고, 보
리에 쌀을 조금 섞어 밥덩이를 해서 소금에 찍어 먹기도 하구, 송이버섯, 두릅,
뚜깔 잎, 더덕, 딱주 싹, 때로는 곰이나 산돼지를 사냥해서 잡아먹기도 하지. 6.25
가 끝나갈 무렵에는 동네에서 보급 투쟁을 한답시고 참 많이도 뺏아 갔지. 그 놈
들은 쌀이나 고기들을 절대 지고 가지 않고 동네의 젊은 사람들을 시켜 일을 시
켰지. 너도 그 때 있었더라면 너 만 할 땐 빨갱이 따라 짐 꾼 노릇 참 많이 했을
끼라. "

수색대 일원은 칼빈 총을 든 사찰 경찰과 마천 지서 순경들은 앞장을 서고 멀찌감치서 나머지 대원들은 뒤따랐다. 어제 무시무시한 굿이 벌어졌던 선녀 굴 근처는 아무 흔적이 없었다. 총을 가진 대원들은 경계 자세를 취하고 나머지는 선녀 굴 근처를 샅샅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 공비 시체가 꼭 나와야 할 것인데! '

수색을 하고 있는 문영만과 지동식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눈초리로 주변을 악착 같이 수색 활동을 하고 있었다.

사실 시체 한 구의 발견으로 두 사람을 평생 행복으로 보장되어지는 보증수표가 되는 것이므로 그네들은 그 보증수표를 꼭 찾아야만 했다. 오늘 중으로 꼭 찾아야만 했다. 아니면 나머지 빨갱이들이 시체를 꼭꼭 묻거나 감춰버리면 만사가 도루묵이 된다. 증거가 없는데 국가가 무슨 돈이 많다고 공짜로 거액을 보상해 줄 것인가 말이다.

" 사냥개 시체를 찾았다! "

주변을 수색하던 대원 한사람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순간 주변의 대원들은 개가 있다는 주변으로 우르르르 모여들었다. 선녀 굴 입구엔 바위 틈에서 나오는 샘물이 있다. 계곡의 아래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손쉽게 물을 구할 수 있어서 6.25 전후에는 이 선녀 굴이 빨치산들의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말하자면 은폐와 엄폐가 가능하고 아래쪽이 훤히 내려다보이며, 경찰이나 국군이 올라오더라도 보초 두서명만 능선의 요소에 배치하면 나머지 빨치산들의 안전은 완벽하게 보장이 되는 그런 천연 요새였다. 
                   

 

 

 

  (해발 1000m상에 위치한 지리산 선녀굴 내부의 모습)

 

                                                            지리산 선녀굴 위 천정 모습

 

 

                                                                      선녀굴 바닥 모습

 

 

           굴안은 좌측 우측 2개의 굴이 요새화 되어 있다 처음 들어서면 넓은 첫번째 굴 , 천연의 요새를 자랑한다.

 

 

두번째 좌측 굴 (군경 수색대가 이 굴 앞에서 3일동안 진을 치고 있었어도 정순덕은 선녀굴 내부 굴에서 용케도 들키지 않았다)

 

 

                                                돌 사이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우측 세번째 굴이 있다


 

 


한 겨울에 찬 북서풍이 불더라도 천왕봉에서 불어 내려오는 찬 칼바람이 불어오더라도 동굴의 안은 오목하고 아늑해서 우람하고 견고한 선녀 굴의 바위가 바깥바람을 완벽하게 차단 해 주는 그야말로 요새중의 요새이다.

산불에 타다 남은 나무 뿌리와 삭정이가 쭈삣하게 튀어 나와 있는 그 아랫 켠에 시커멓게 그을린 개의 시체 한 마리가 쳐 박혀 있었다. 수북하게 털이 나 있어 그렇게나 용맹하고 날쌘돌이로 유명한 사냥개였지만 누군가의 총에 맞고 쓰러진 것 같은데 불에 그을려 있을 뿐, 그들이 찾고자 하는 공비의 시체는 도무지 찾을 길이 막막했다.

" 허 참 이상한데? "

지동식이가 뇌까린다. 어제 자신이 쏜 총에 빨갱이가 맞고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게 분명한데 아무런 흔적이 없으니 귀신 곡 할 노릇이 아닌가!
사람이 총에 맞았다고 하면 주변에 핏자국이 나 있을 법도 한데 전혀 그런 흔적이 없으니 입이 바싹바싹 마를 정도로 속이 타고 있었다.

" 빨갱이를 쏘았다고 해 놓구선 아무 흔적도 없는데 혹시 바위를 쏘아 굴러 떨어
진 것을 잘못 보고 착각한 게 아니야? "

6.25 직후 향토 방위대 중대장까지 지낸 윤갑수가 짜증을 내듯 한마디 내 던진다.

" 그럴 리가? 분명 내가 쏜 총알을 맞고 떨어진 것은 사람이었는데......! 그러면
이 개는 누가 죽였을까요? 이렇게 불에 태우기까지 했는데 "

문영만은 더 속이 탔다. 사람의 시체가 나와야만 신고를 한 보람이 있고 그렇게나 기대하던 보상금도 탈수 있을 텐데, 그것보다 지금은 그 많은 사람들을 이곳까지 오게 한 장본인으로서 체면에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마천 지서에서 나온 박순경은 난감함을 느꼈다. 잘못하다가는 이 사건이 확대되기라도 한다면 정순덕이가 잡힐 때까지 상부에서는 계속적인 출동 명령이 하달 될 것이고, 공비의 소행이라는 확신이 섰던 그였지만 귀신같이 활동했던 정순덕의 일행이 이 근처에 머물고 있을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추측하는 것은 평범한 상식이었다.

문제가 확대되는 것이 두려워졌다.

애가 닳은 문영만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구석구석을 더 수색해보자고 애원을 하다시피 재촉을 했다.

" 혹시 빨갱이 놈이 총상을 입고 다른 곳으로 기어갔을 수도 있으니까 아래쪽 골
짜기 까 지 더 수색 해 보시오! "

마천 지서 소속의 박순경은 문영만의 조금 전의 말에 체면은 세워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향토 방위대를 세 개조로 재편성하여 주변 500m 반경으로 다시 정밀 수색을 하게 했다. 근 1시간이나 사람의 시체를 찾았지만 피 한방을 발자국 하나 찾을 수 없었다.

" 혹시 독 바위 아래의 노장대 마을로 숨어 들어간 게 아닐까요? "

문영만보다 더 급해진 지동근이가 박순경을 보고 한마디 더 거든다.
선녀 굴에서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주 가깝게 독 바위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그 바위 위에 올라서면 엄천 강은 물론 함양 읍과 멀리 왕산과 산청의 주변까지 훤히 보이는 곳이다. 
                      

 

 

지리산 상내봉

부처바위라고도 불리어지는 상내봉은 완벽한 와불 형상의 산봉우리이다. 선녀굴은 저 상내봉 아래쪽에 위치하며 함양군 휴천면송전리 송대마을 뒷쪽에 존재한다.

 



수색대는 독 바위를 뒤로하고 배 바위 주변을 수색하고 더 아래로 내려와 망 바위에 위에 서서 주변을 또 탐색해 나갔다.
노장대 근처에 있으면서 선녀 굴처럼 천연 요새로 유명한 박쥐 굴, 금낭 굴, 상대 굴까지 수색을 해 나갔다.

지리산에서 찾아보기 힘든 박쥐 떼를 노장대 근처의 박쥐 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빨치산들이 몇 년간 기거하면서 불을 피우고 한 탓에 한동안 박쥐가 사라졌으나 박쥐 굴에는 다시 박쥐 떼들이 동굴의 상단부에 더덕더덕 붙어서 한낮의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제주도의 동굴이나 석회암 지대에 많이 생성되어지는 천연 동굴과는 달리 이 지리산의 동굴은 바위의 자연스런 생김새로 인해 생겨난 동굴이기 때문에 그렇게 깊지는 않다. 그렇지만 눈이나 비 또는 세찬 바람을 피하기는 아주 용이하기 때문에 6.25 이전에는 숯 꾼들의 움막 터나 목기를 생산하기 위해 산에서 내내 생활하던 사람들의 주 안식처가 되었던 곳이었다.

6.25 이전엔 27가구까지 살았다는 노장대 마을도 빨치산의 준동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노장대의 아래쪽에 있는 운암, 세동, 송대, 동강, 운서, 모전 마을로 이주를 한 상태여서 불탄 집의 흔적만 을씨년스럽게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 어제 잡았다는 빨갱이는 돌멩이가 굴러 떨어진 게 분명한 것 같소이다! "

한나절이나 주변을 수색했으나 죽은 개의 시체만 발견했을 뿐 더 이상의 흔적이 나오질 않았기 때문에 수색 대장을 맡았던 마천 지서의 박순경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총 소리를 들었다는 사항에 대해 세 사람의 증언이 일치된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 문영만이가 그렇게나 아끼고 사랑하면서 마천 지서에 들락거릴 때면 자신이 기르는 사냥개의 이야기로 시간을 메꾸었던 기억을 되살려 본다면 본인이 직접 개를 죽였을 리 만무하고, 사냥개가 죽음을 당한 것과 개가 불에 그을린 것을 보면 분명 사람의 소행인데 이 일을 어떻게 결론 지을까 걱정이 계속적으로 뇌리를 감싸고 있었다.

지친 수색대들은 선녀 굴까지 와서 동굴 입구의 바로 앞쪽에 있는 샘물을 들이켰다. 찬 늦겨울의 날씨였지만 다들 땀이 배인 탓인지 등줄기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드디어 박순경은 선녀 굴의 주변에서 질서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대원들에게 결론적인 말을 내 밷기로 했다. 확실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상금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을 문영만과 지동식 그리고 허정갑에게 지금까지의 사실들은 모두 허구이고 세 사람의 착각으로 인한 단순한 에피소드였으며 이 선녀 굴에는 빨치산이 전혀 출몰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믿음을 심어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는지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조금 높은 바위 위로 올라서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여러분 어제 빨치산을 사살했다는 세 사람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

조금 긴장을 했는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침을 한번 들이키고는 다음을 이어 나간다.

" 공비를 사살했다고 하면 반드시 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 에 ∼ "

긴장을 했는지 나지도 않은 땀을 훔쳐내듯 이마와 목 부분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며 애써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려는 듯 했다.

" 바위에서 굴러 떨어졌다던 공비의 시체는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핏자국도 전
혀 없습니다. 문영만씨의 사냥개가 죽은 것이 사실이고 또 불에 그을려 졌습니
다. 얼핏 생각하면 이곳에 공비가 나타났다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
만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

잠시 뜸을 들이던 박순경은 말을 또 이어 나갔다.

" 에∼ 우리 쪽에서 총을 쏘기 전에 총소리를 듣고 사냥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
다는 것은 개가 어떤 짐승을 보고 뛰어가다가 개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져 갑자
기 짖는 소리를 멈출 수도 있으며, 바위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던 물체가 공비였
다는 세 사람의 주장은 도망가던 짐승이 언덕의 바위를 잘못 건드려 구르는 것
을 보고 공비였다고 착각을 할 수 있습니다. 또 개가 불에 그을린 것은 문영만씨
와 지동식씨가 쏜 총알이 바위와 스파크를 일으켜 중상을 입은 개의 털을 태웠
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공비 수색 활동의 종결을 짓겠습니
다. "

처음부터 더듬거리던 박순경의 발언은 조금 시간이 지나자 유창한 웅변조와 그 동안 경찰관의 주 업무인 6하 원칙에 입각한 사건 조서 꾸미기식의 언어적 뼈대로 정리를 하여 어제일을 전혀 목격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박순경의 결론에 동조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제 사냥을 제안했던 문영만의 얼굴이 점점 붉게 변해 갔다. 박순경의 발언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공비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분명했기에 더 이상의 반박을 한다는 것은 구차한 변명으로만 들릴 테고 그 동안 수색 활동에 지친 향토 방위대의 따가운 눈초리만 집중 될 것이란 생각에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적인 반박의 말을 꾹 참았다.

수색 활동의 종지부를 고하고 돌아오는 길의 맨 뒷 쪽에서 힘이 없이 툴레 툴레 내려오는 사람은 문영만과 지동식이었다. 그 모습이 처량하도록 가여운지 허정만은 뒷 쪽으로 쳐져 '무슨 위로의 말을 해야 할까?' 하고 시선의 초점을 두 사람 쪽으로 자주 두었지만 마을까지 올 동안 끝내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앞 쪽에서 내려가던 마을의 향토 방위대 대원들의 불평이 가득 섞인 말들이 뒷 쪽의 두 사람에게 연거푸 들려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금원산, 황석산, 괘관산 등지에서 뻔질나게 군, 경을 괴롭히며 전설적인 빨치산으로 활약하다 지리산으로 자리를 옮겨 1962년 2월까지 선녀 굴 일원에서 은거하며 로빈손 크루소 생활을 하던 정순덕을 이 사건 이후엔 선녀 굴에선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로부터 다음해 그러니까 1963년 11월에 산청군 내원 골에서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가 대퇴부 총상을 입고 생포된다. 

  
그녀의 입으로 증언된 사실은 당시 추성의 사찰 경찰에게 사살된 사람은 이은조였다. 이은조가 죽자 아무 흔적 없이 시체를 가까운 땅속에 묻고 산청 쪽의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 아름다운 능선과 계곡에 피가 얼룩졌던 시절의 얘기는, 그들과 같은 또래의 청춘들이 그것도 이웃 마을에서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를 함께 하며 웃던 그 사람들끼리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독한 원수가 되어 서로간에 피를 흘려야만 했던 사실이 분명 있었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 없이 수없이 많은 주검들이 지리산 어귀 어귀에서 한 줌의 흙으로 사라져 갔지만 정순덕이가 가장 오래 머무르고, 가 여리면서 젊은 20대의 시간을 거의 대부분 보낸 곳이 선녀 굴이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군, 경의 소탕 작전이 수없이 전개되었고 그럴 때마다 산청 쪽, 남원 쪽, 함양 쪽의 지리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1962년 2월까지 선녀 굴에서 자기의 집처럼 아름다운 청춘을 짓 눌러 가며 살아갔지만 선녀굴에서 이은조를 잃고 선녀 굴과는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만다.

6.25를 거쳐 전쟁이후 무려 10여 년을 지리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소설 속에서의 로빈손 크루소 생활이 아닌 실제의 로빈손크루소 생활을 했으며 국군과 경찰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점철되어진 그 반대 심리로 인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이념의 신봉자로 변화된다. 63년 11월에 산청의 내원골에서 생포되고, 비 전향 장기수로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된다.

그녀는 끝까지 자수의 권유를 뿌리치고 지리산에서 끝까지 투쟁하는 것으로 일관 해 왔다.
1963년 11월에 13년 간 지리산 빨치산 활동 중 지리산 내원 골에서 마지막 빨치산으로, 잠복 해 있던 경찰에게 대퇴부 총상을 입고 체포됨으로 해서 그 파란만장하던 지리산 전설의 종말을 고한다.

후에 총상을 입은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고, 무기징역을 언도 받은 후 대구, 공주, 대전교도소 등에서 23년 간 투옥되어 교도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5년 8.15 특사로 가석방된 뒤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을 하게 되나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던 1988년엔 꽃동네를 나와 1995년까지 자립을 위해 부산 가죽공장, 서울 가구공장, 구로동 양복걸이 공장 등지에서 노동을 하며 자립 생활을 하게 된다.

1995년엔 비 전향 장기수들의 거처인 낙성대 ‘만남의 집’에 정착을 하게 되고 1999년 뇌출혈로 쓰러져 뇌수술을 받고 왼쪽 마비 현상이 일어났으며, 인천 나사렛 한방병원에서 한방치료를 하면서 지내게 된다.

2000년 정부에서 비 전향 장기수 1차 송환 때 정순덕은 자신도 북송을 요구했으나 전향서를 이미 썼다는 이유로 해서 당국의 거부로 북송은 결국 무산이 되고 만다.

2001년 정순덕은‘전향 무효'를 선언하며 2차 송환을 촉구하게 되지만 역시 성취를 못하고 2004년 4월 1일 향년 70세로 그 파란만장하던 한 여인의 일생은 종지부를 고했다.

지금도 휴천면 송전리 송대 마을 뒷산의 선녀 굴은 도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름다운 선녀의 전설이 아닌 피비린내 나는 젊은이끼리 죽고 죽이게 했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20세기의 새로운 전설 하나가 선녀 굴에서 만들어졌다.

                               
                                                                 ( 6.25 전쟁중이던 1953년도의 사진이다)

                  합천해인사 앞의 모습이며, 당시 아버지(김명석)가 경찰이었고 낙동강 전투까지 참전했으며 
  앞줄 맨 왼쪽이 아버지의 모습이다. 당시에는 전쟁중이라 칼빈 소총을 메고 사진을 찍은 모습    이 이색적이다. 전시 상태에서도 사진을 찍을 여력은 있었는가 보다. 아버지께서는 거창 마리 파출소 소속이셨다.



*위의 이야기는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뒷산에 위치한 선녀굴에 얽힌 비화였습니다.
어렸을때부터 여러 사람으로부터 많이 들어 왔고 아득한 전설로만 기억되었던 정순덕에 얽힌 비화가 선녀굴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제가 커서 알았으며, 당시 이웃 마을에 살고 있으면서 목격자들로부터 직접 자료를 수집하였고 당시 수색 작전에 참여했던 분들과 뚜렷한 소문을 알고 있는 분들(마천, 추성, 송대, 남호, 동강, 문정)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을 참고 하였으며 거명되어지는 이름은 실명과 가명(약간)을 섞어 놓았다는 것도 참고 하셨으면 합니다.

위의 자료와 이야기는 제가 직접 조사하고 탐문하여 기록한 것이며
1962년 지리산 선녀굴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실화에 근접하도록 정리하여 보았는데 , 정충재님께서 기록해 놓으신 실록 정순덕의 책자도 참고하였으며, 위의 이야기는 이야기라기보다 6.25라는 현존역사에서 마치 드라마같이 살다 간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마지막 빨치산과 엄천골과는 불가분의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되새겨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