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돌격앞으로'와 '나를 따르라'의 차이

배꼽마당 2012. 11. 8. 10:00

'돌격앞으로'와 '나를 따르라'

 

2007년 8월 18일 오후 11:16

 

인구의 전체가 300만 밖에 되질 않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3억의 인구 숫자를 자랑하던 아랍권 국가와의 중동 전쟁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도 6차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그때마다 이스라엘의 승리로 결말이 나곤 했다.
2000년 전에 잃어 버렸던 나라를 다시 되찾았다는 민족적 긍지와 단결력이 거대한 아랍 국가와의 싸움에서 버티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많이들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기억들이 벌써 아득한 옛날 이야기로 되어 버렸다.

그 중에서도 6일만에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을 내고 수에즈 운하까지 진군을 하자, 전 세계 사람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로 받아 들여졌다.
아무리 뛰어난 전략 전술이 있었다 하더라도 300만 밖에 되질 않는 이스라엘의 군대가 거대한 아랍 연합국의 군대와 싸워서 이겼다는 것이 기적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이 사실은, 20세기의 또 하나의 불가사의한 전설이 되어 갔다.
이 6일 전쟁을 통해 전설과도 같은 영웅 한 사람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애꾸눈 모세 다이안 장군이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온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외신기자 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 6일 중동 전쟁에서 거대한 아랍국가에게 이길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 ‘돌격 앞으로’가 아닌 ‘나를 따르라’ 라는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라는 답변이 끝이었다 한다.
큰 전쟁에서 어디 영웅 한사람만의 힘으로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기적같은 사실이었기에 총 지휘자였던 그 만의 노하우가 있지 않았나 해서 던졌던 질문에 아주 단순한 답변 하나만 듣고서 처음엔 많이 실망을 하였다는 후문이다.

‘돌격 앞으로!’와 ‘나를 따르라!“하는 명령어는 군사 용어로써 지휘관이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 쓰이는 지시어이며, 여기에는 반드시 전 부대원의 절대적인 행동적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든지, 명령 사항을 어길 경우 군사 재판에 회부되거나, 전시에는 지휘관의 즉결 처분권을 부여 할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돌격 앞으로’ 라는 명령어나 ‘ 나를 따르라 ’하는 명령어는 그게 그것인 셈이며, 꼭 같이 적을 향하여 공격하라는 지시어인데 모세 다이안은 그 말의 가치 철학에 많은 차이점을 둔 것 같다.

‘ 돌격 앞으로’의 명령어에는 지휘관의 위치가 뒷 쪽에 있고, ‘ 나를 따르라 ’라는 명령어에서는 지휘관의 위치가 앞 쪽에 있는 차이가 있다. 지휘관의 위험도는 분명히 앞 쪽에 있는 지휘관이 훨씬 더하다.

거창한 고전적 말의 넋두리가 아니더라도 난 학습의 현장에서 모세 다이안의 행동 철학처럼 학습의 효과와 목표 달성적 측면에서 비슷한 현상을 많이 경험할 수 있었다.
실과 교과의 화단 가꾸기 단원의 실습 시간에 화단의 잡초를 제거 할 계획을 세웠다.
내심 너무 나약하게 커가는 반 아이들에게 극기 훈련을 시키는 목적도 있었다. 화단의 면적이 너무 넓었던 탓에 막상 작업을 시작 하려고 하니, 3학년 아이들로서는 너무 벅찬 양이었지만 그대로 강행 해보기로 했다.

중앙 현관의 왼쪽 화단은 아이들에게 책임 구역만 정해주고 자기 스스로 뽑아 보게 하였고, 오른쪽 화단의 작업은 나와 함께 뽑기 시작했다.

“ 선생님하고 같이 잡초를 뽑아 볼까?”

나하고 같이 작업을 하는 파트는 굉장히 열심이었고, 시골 아이들이라 해도 요즘은 집에서 호미 한번 잡아보지 않고 커 가는 탓에 무척 힘겨워 하면서도 1시간이 지나갈 무렵 오른 쪽 파트에서는 일이 깔끔하게 마무리 되었다.
왼쪽 파트에서는 일의 진척이 거의 없었다. 거의가 빈둥빈둥 놀면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선생님의 눈치만 살피면서 시간만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구나!”

“ 선생님 너무 힘이 듭니더!”

“ 너무 더워서 힘이 듭니더!”

“ 선생님 물좀 마시고 오면 안되겠심니꺼?”

일도 많이 하지 않은 파트의 아이들이 오히려 불만이 많고, 더 힘 겨워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나와 같이 작업을 한 아이들은 일의 양이 훨씬 많았는데도 피로의 기색이 거의 없었고 의기 양양해 했다.

“ 아직 다하지 못한 부분을 선생님하고 같이 해 볼까?”

“ 선생님 우리도 도와 줄랍니더.”

이미 일을 끝 낸 아이들은 흐뭇함과 만족감 때문이었는지 한 술 더 떴다. 어떻게 보면 왼 쪽 파트의 아이들은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한 셈이고, 오른쪽 파트의 아이들은 사제 동행 문제 해결 학습인 셈이다.
열린 학습 이론이 우리의 교육계에 많이 흐른 적이 있다. 나 역시 열린 학습의 방법에 많이 찬동을 한다. 그렇다고 모든 학습에 열린 학습 이론을 적용하는 것도 문제이지 않을까?
그동안 교육 일선 현장에서 열린 학습의 비판적 시각이 많았던 것은, 열린 학습의 취지 보다도 오히려 자유 방임적 요소가 많았던 탓에 학습의 목표 도달 율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지 않았나 하는 관점이다.
7차교육과정의 이해, 수준별 교육과정 운영, 특별활동의 세분화등의 용어들이 우리네 교사들의 귀를 따갑게 한다. 새로운 교육 이론이 도출되고, 새로운 교육의 방법이 동원 되어지고, 새로운 교육과정이 나온다 해도 우리의 고전적 교육자적 자세는 변함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모세 다이안의 행동 철학처럼 항상 같이 전투를 치르는 장군과 병사처럼, 학생과 교사가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적 자세로의 틀로 자리 매김 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아이들과 함께 동화되어, 아이들의 세계에 푸욱 빠져 보면서, 아이들의 관점으로도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면서 상황을 분석해 볼려고 해도 가끔은 마음 뿐일 때가 많다.
때로는 너무 관념적 틀에 얽매여, 고정 관념 속에서 편견적 가치 관념으로 굳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될 때도 참 많다.

이제까지의 넋두리는 옛날부터 써 왔던 사제동행, 눈높이의 관점, 교사의 솔선 수범등 선생님들에게 많이 강조 되어왔고 많이 요구되어 왔던 그런 교육 철학의 한 이야기 일뿐이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강렬한 레포 형성 즉 적극적인 인간적 교감의 형성이 된 연후에 효율적인 학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새삼 느껴본다. 모세 다이안의 말을 조금 바꿔 ‘ 공부해라’가 아닌 ‘우리 같이 문제 해결을 해 보자’라는 자세로 좀더 아이들에게 접근 해야겠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서 특히 많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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