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잘먹고 잘산다는 의미

배꼽마당 2012. 11. 8. 09:54

 

2007년 9월 13일 오전 3:07

물질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가치중 어느것이 귀중한 것일까?

이 명제에 대하여 난 오랫동안 고민을 해 왔다. 물질적인 것의 대명사는 돈이다. 돈이란 존재는 사람들에게 참 많은 것들을 가져다 준다. 돈이란 존재는 힘이 축적된 것이니 당연히 힘을 발휘하며 그 힘이 우리들의 삶을 풍족하게 하고 더 다양하게 하는 존재임에는 분명하다.

술집에 가서 돈을 내 밀면 주인장은 좋아라 하고 또 반갑게 맞이한다. 아는 사람이 개업을 할 때면 인사를 한다는 것이 그 곳에 가서 손님이 되어 주는 것일 것이다. 무엇이라고 딱 부러지게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주인은 그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무언중에 인지를 하고 고마워 하는것이다.

결핍 상황이 벌어지고 극한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돈을 내밀면 욕구 충족이 쉽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돈은 힘을 축적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돈이란 것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고 욕심을 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 문화를 진단해 볼때 그중에서도 조선시대의 선비 사상에 대해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고찰 해 본다면 긍정적인 측면은 고고한 정신 세계의 추구였다고 단정을 해 보며 반대적인 측면은 너무 정신 세계를 추구한 나머지 현실을 무시한 경제적인 빈곤을 초래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결론지어 본다.

사농공상이란 의미속에는 공업과 상업 즉 경제적인 가치를 뒷쪽에 둔 듯한 언어상의 가치정립이전에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문화가 자본주의 가치를 뒤로 한듯한 분위기였지 않은가.

한국 문화론을 공부할 때 ' 가난한 것은 자랑이 아니다!' 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되어진다. 그렇다. 가난은 결코 자랑이 아닌 것이다.

" 너 왜 공부하니?"

갑자기 이렇게 누군가에게 물어 본다면 학생들은 대개가

" 훌륭한 사람이 될려고 공부를 합니다!" 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막연한 가치관이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속에는 모든게 포함되어 있다.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회적인 지위, 힘, 남에게 영향력이 있으며 또 경제적인 조건도 갖춘다는 의미가 내포 되어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명제에 대해서 파고 들어가 보면

' 잘먹고 잘살려고 공부를 한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가식적인 베일을 벗겨 보면 말이다.

그렇다. 잘먹고 잘 살려고 사람들은 발버둥을 치고, 사기를 치기도 하고, 남을 속이기도 하고, 유산때문에 형제끼리 갈등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고, 도둑질까지 하는 것일게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잘먹고 잘 살려고 막 발버둥을 치다가 오히려 잘못 사는 경우의 예를 그동안 역사적인 사례나 요즘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좋지 않은 사례들이 참 많다.

TV뉴스 화면에 얼굴을 가리고 수갑을 차고 자신의 모습이 공개되는 것을 극히 꺼리는 사람들의 이면에는 잘먹고 잘 살려고 발 버둥을 치다가 잘못된 경우이지 않은가!

지리산 밑에서 어렸을때 많이 들어 본 소리가 있다.

" 누구네 아들은 출세를 했다더라!" 하는 말이다. 그 출세를 했다는 말을 들어 왔고 그 출세를 했다는 사람의 직업도 기억을 하고 있다. 출세를 했다는 사람은 높은 직위의 고급 공무원이나 갑자기 경제적으로 수직 상승을 한 부류를 대개 의미했다. 당시에도 고급 공무원은 일정 월급을 주었을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당한 보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동네 어른들의 말 속에는 정당하게 받는 월급 이외의 따로 생기는게 많은 직위를 가진데 대한 출세의 의미가 더 많았던것 같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그 출세를 위해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출세의 이면에도 역시 자기 잘먹고 잘 살려고 하는 욕망이 분명히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곳에도 문제가 자꾸 제기되고 있다. 옛날에 내가 들어 왔던 출세의 의미가 가꾸 쇠락해져 버렸다. 출세란 말의 의미속에는 평범한 사람과는 분명하게 다른 삶을 영위하는 부류일텐데 요즘은 빈부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60년대처럼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집이 없어서, 부도가 나서 떠돌이 신세를 지기도 하고 한끼 끼니 걱정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옛날처럼 굶어 죽는다던지, 병원비가 없어서 아주 경미한 병으로 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것이다. 나름대로 사회 보장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비싼 차는 아닐지라도 자가용이라는 이름으로 차를 굴리는 사람이 거의 전부이고, 밥을 굶는 부류는 많이 적다고 봐야하지 않는가! 옛날엔 부의 상징이 쇠고기국에 하얀 쌀밥을 말아 먹는것이라 했다. 내가 어렸을때 6,70년대의 말이다. 그것도 지리산 아래에서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이 웃는다. 참 우스운 이야기라면서 말이다. 하얀 쌀밥이 부의 개념이 아닌지는 아주 오래가 되어 버렸다.
다들 차를 소유하다 보니까 부자들은 부자다운 분위기를 만끽하기 위해서 남하고 구분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차별을 둘 수 있는 것이 비싸게 주고 사야만 하는 외제차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외제차는 일반 서민들이 감히 흉내를 낼 수 없는 부자들의 성역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문제가 생겨 버렸다. 외제차가 국산차보다 싸져 가는 분위기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얼마 가지 않아 너도 나도 외제차를 몰고 다닐 때 부의 상징이었던 외제차 대신에 부자들은 무엇을 서민들과 차이를 둘려 할까?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현재까지 내가 생각하고 고민 해 왔던 물질주의 우선과 정신주의 우선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분석이었다. 물질주의의 행복은 어느 한계점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시기까지는 상당한 행복으로 연결되어지나 그 물질주의 행복은 영원하지 않고 어느 수준 이상의 단계까지는 영위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면 물질과 정신에서 어떤 것을 더 가치롭게 추구해야 될까?

주희의 설명에 따르면 중(中)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기울지도 않으며 지나침도 못미침도 없는 것을 일컫고, 용(庸)이란 떳떳함(平常)을 뜻함으로써 인간 성품(性品)의 이치를 담고 있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바로 중용이라는 것이다.

비중을 동등하게 두면서 중용의 도를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의 행복의 극치를 이루게 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사이에 중용을 선택하여 두 세계를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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