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숟가락과 엿장수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는 1970년대 초기부터이다. 초가집 없애기, 마을 안길 넓히기가 대부분 주 운동이었다.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새마을 운동은 지리산 골짜기 오지인 엄천골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을마다 지붕 개량, 마을 길 넓히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정부에서는 무상으로 시멘트를 제공하면 그것으로 작은 다리를 놓기도 하고 시급한 곳의 정비를 해 나갔다.
대 혁명적인 변화이기도 했다. 가장 큰 변화는 차량이 접근을 할 수 있도록 마을 길을 넓혀 놓은 것이었다.
그 이전에는 시골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집과 집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은 오솔길이었다. 집 앞도 그랬고 물을 길로 가는 샘터 길도 좁았다. 혹시 눈이라도 온 이후엔 잘못하다가는 좁은 길에 물동이를 이고 오고 가다가 눈길에 미끄러질 수도 있었으며 큰 나무 짐을 지고 오다가 좁은 길옆의 담장에 부딪혀 짐을 지고 가기가 거북할 땐 무겁고 부피가 큰 나무 짐을 옆으로 해서 날라야 했다.
이 때는 방물장수가 마을을 많이 드나들었는데, 보따리에 옷이나 삼천포 멸치같은 건어물장수, 꿀 장수, 냄비나 솥을 때우는 사람, 가끔은 똥 장군을 메우거나 수리를 하는 사람, 상을 고쳐 주는 사람들이 마을에 자주 들락거렸다.
설을 한달여 남겨둘 때면 으레히 티밥을 티우는 사람도 방문을 했다.
이런 것들은 아이들과는 동떨어진 관심 밖의 존재였는데 가장 인기를 끈 사람은 바로 엿장수였다.
가게라고 하면 학교가 있는 모실이나 강 건너 절터 마을 뿐이었으니 군것질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엿장수가 올 때 엄마를 졸라 엿을 사 먹는 것이었다.
엿장수와 관련되어 지금까지 강하게 기억을 하고 잇는 것 하나가 있는데 바로 늦봄에 있었던 도둑 엿 사먹기였다.
윤호, 윤식이, 태조, 위춘이와 나 모두 다섯은 항상 또래 친구로서 같이 어울리며 주로 강가에서 놀았다.
내려가는 도랑물을 줄기를 막아 댐 쌓기 놀이나 다리 떠 내려 보내기 놀이 아니면 주먹마한 공을 가지고 공차기 놀이, 또는 대나무로 만든 죽마 타기 놀이등이 주 놀이었는데 그 때도 우리들은 강가에서 흙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귓전에 스치는 가위질 소리가 아주 경쾌하게 들려 왔다.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는 아주 경쾌했다. 그 장단이 너무나 멋져 세마치인지 굿거리 장단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아이들을 흥분시키고 모아 들이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은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였다.
우리들은 물놀이 흙 놀이를 하는 것을 중단하고 약속이나 한듯이 집으로 달음박을 쳤다.
아마 초등학교 2.3학년으로 기억을 한다. 근 1년만에 나타난 엿장수였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나는 집으로 뛰어가 본댓자 아무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 역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제하며 집으로 뛰어갔다.
우리 모두는 엿장수의 바지게 주변을 에워쌌다.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길이 오솔길이었으니 니어카나 다른 운반 도구는 절대로 근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지게에 엿이나 성냥, 비누, 핀, 이약, 파리약등 방물들이 얹혀져 있었고 엿판의 아래엔 신발 떨어진것, 머리카락, 쇠붙이등이 가득 얹혀져 있었다. 어른들은 비누나 성냥과 같은 생활 필수품에 관심이 많았고, 아이들은 오직 엿을 사먹은 일에만 관심이 많았다.
엿판 위에 넙적하게 하얀 가루와 함께 깔려져 있는 박하 엿의 향기가 아이들의 코를 자극하였고, 이미 어머니로부터 엿을 받아 든 아이들은 자랑이라도 하듯이 질척한 엿을 입속에 넣었다가 내 뱉었다가 달콤한 엿을 널부러지게 음미하고 있었으며, 이에 자극을 받은 아이 몇은 집으로 뛰어가서 엄마를 졸라 떨어진 고무신짝 하나를 가지고 와서는 엿장수와 협상을 했다.
" 조금 더 줘요! "
" 옛다 조금 더 줍니다."
하고 인심을 쓰듯이 엿판 위의 엿을 정과 가위를 이용하여 딱 딱 떼어 아이에게 건네 주었다.
그런데 나는 엄마에게 떼를 쓸 수가 없었다. 항상 우리집은 농사 일에 바쁜 엄마가 집에 안 계셨기 때문에 엿장수가 올 때마다 떼를 쓸 수가 없었고, 1년에 한번 우리 동네를 방문한 엿장수와의 인연을 맺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 옆에서 침만 꼴깍꼴깍 삼키던 나는 집으로 털레털레 오고 말았다.
화가 나기도 했다.
' 우리 엄만 엿장수가 올 때마다 집에 없으니 엿을 사달라고 조를 수가 없어!'
집 주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는 엿장수가 가장 값나가게 쳐 주는 것은 소가 논을 갈 때 부러진 쟁기 날이었는데 그런 것이 가끔 집 주변에 있기도 했지만 그날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낫 부러진 것이라도 있을까 보아 마루 밑을 뒤졌다. 그래도 쇠붙이라고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어머니 몰래 엿을 사 먹을 작정이었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엿을 사 먹는 방법 하나가 떠 올랐다.
' 햐! 바로 그거야!'
나는 부엌 안으로 들어가서 살강 위에 얹혀져 있는 놋 숟가락에 눈길이 갔으며 짧은 시간안에 여러개의 놋 숟가락중 가장 닳아 보이는 것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스텐으로 만들어진 요즘의 숟가락 대신 당시에는 숟가락의 전부가 놋쇠로 두드려 만들어진 숟가락이 밥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놋숟가락은 다양한 쓰임새의 용도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 하나가 부러진 놋 숟가락을 흙으로 빚은 작은 옹기안에 놋숟가락을 넣고 숯 가마에 넣어 불에 달구면 그 놋숟가락은 액체 상채로 변화 되었고 그 달구어진 액체상태의 놋쇠물을 이용하여 가마솥에 구멍이 난 부분에다가 부어서 식히면 가마솥이 알맞게 때워지는 말하자면 고급 공업용 재료로 이용되어서 엿장수가 즐겨 놋 숟가락 부러진 것을 수집하였고 아이들이 엿을 사 먹을 때 꼭 놋숟가락 부러진것 여러개가 등장하기도 했다.
난 어머니 몰래 그 놋 숟가락을 이용해 엿을 사 먹기로 결심을 했다.
살강에서 내려 놓은 놋 숟가락 한개를 있는 힘을 다해 부러트려 버렸다. 부엌문 틈 사이에 숟가락의 손잡이를 끼어 넣고는 한 쪽 방향으로 틀어 버리자 놋 숟가락은 쉽게 부러져 버렸다.
혹시 들에 나가신 어머니께서 돌아오시다 들키는 날엔 난 집을 나가야 한다.
무거운 죄를 진 나는 부러진 놋숟가락 두 동강을 손에 걸머쥐고 다시 부엌의 구석을 뒤지자 누나가 긴 머리를 단발 머리로 잘랐을 때 생긴 머리카락 절반을 챙겼다.
당시에는 가발이 수출 효자 종목이어서 시골 같은데서 머리를 빗을 때 나오는 머리카락도 엿장수가 즐겨 수집하는 고물중의 하나였다.
누나의 머리카락은 너무 짧았다. 짧은 머리카락은 엿장수가 받아 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난 어머니께서 머리를 빗을 때 조금 발생한 긴 머리카락 한 뭉치와 함께 누나의 머리카락을 같이 뒤 엉키기 시작했다.
제법 그럴듯 해 보였다. 긴 머리카락 뭉치와 작은 머리카락 뭉치가 함께 뒤 엉켜 그것으로 엿을 사 먹기에는 충분하리라.
빨래터로 이용이 되는 아랫집의 감나무 밑에는 그때까지 엿장수는 가끔 가위질을 하면서 혼자서 엿 판을 올려놓은 바지게를 지키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음을 감지한 나는 양 호주머니에 놋 숟가락과 머리카락 뭉치를 집어 넣고는 엿장수에게 달려갔다.
" 엿 주세요."
두 손 안에 쥐어진 놋숟가락과 머리카락 뭉치를 건네 받은 엿장수는 숟가락의 이모 저모를 뚫어지게 살피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것 같았다.
이일을 어쩌나!
엿장수가 눈치를 챈 것이 아닐까?
" 이 숟가락 아침에 부러진 것이니? "
" 네 "
엿장수에게 내 밷는 나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만 했다.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엿장수는 의미있는 웃음을 살짝 짓더니만 큰 가위와 정으로 엿판에 갖다 대더니만 탁탁 엿을 떼기 시작했다.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한줄 가득히 엿을 떼더니만 나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양손으로 받아 쥐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뚱뒤뚱 오리걸음으로 집으로 돌아 왔다.
집 모퉁이를 돌아서는 장독대 뒤 쪽으로 가서 숨듯이 살그머니 앉았다.
꿈에도 그리던 엿의 한 쪽 끝 부분을 살짝 입에 갖다 대었다.
박하엿의 향기와 함께 달콤함이 혀 끝에 와 닿았다. 무척 감미로웠다.
은은하게 엿의 맛을 음미하며 사립문쪽을 한번 살피고 또 장독대 뒤에 숨어서 엿을 입속에 넣고 또 달콤함을 즐기기 시작 했다.
그 때서야 뒷동산에서 버꾸기가 뻐꾹뻐꾹하고 울어대고 있었다.
뒷 동산에서 풍겨대는 철쭉꽃의 싱그러운 향기도 함께 코 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뒷 동산에서는 뻐꾸기 울고 있었건만 새삼스럽게 내 귀에까지 뻐꾸기의 소리를 정겹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놋 숟가락으로 엿을 사서 먹은 탓이라고 한참이나 되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