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옛날엔 우리집에 창호지를 참 많이 생산해 내었다. 농사철이 끝나는 늦가을 부터 늦 여름까지 시도 때도 없이 부단하게 움직여야 했던 고된 기억 하나가 나의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몰라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겨우 내내 닥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했었고 이른 봄부터 창호지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어떻게 하는 일인지는 모르고 옆에서 구경을 하다가 일을 거들어야 했고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제법 아버지와 일을 함께 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일이 창호지 만드는 공장을 지소라 하는데 1년동안 묵혀 놓았던 지소를 정비를 하는 것이었다.
공장이라 하니까 요즘의 중소 기업쯤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가내 수공업 형태로 이루어지는 창호지 제작 과정은 그야말로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해야 했기 때문에 아주 고된 작업이었고 힘이 요구되는 일이기도 했다.
이른 봄에 아버지께서는 꼭 나를 대동하고 지소를 가셨는데 지소에 가서 하는 일이란 개울물 정비작업이었다.
드럼통으로 만든 큰 솥에서 닥 껍질을 삶아 내면 다음 작업이 그것을 넓은 바위위에 얹어 놓고 죽처럼 부드럽게 두드린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흐르는 개울물에 모기장처럼 생긴 촘촘한 그물망에 닥나무 섬유질을 넣어서 씻는 작업이 필요했다.
양잿물로 삶은 후기 때문에 닥 껍질속의 엽록소 성분이나 기타 오염물질을 깨끗하게 씻어 내기 위함이었다. 양잿물은 닥껍질을 부드럽게 하는 작용과 함께 일종의 표백 역활도 이루어지는 성분이나 그 성분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물에 깨끗하게 씻어 헹궈야 했다.
창호지 만드는 작업은 우리집 뿐 아니라 다른 집에서도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닥 껍질을 씻기 위한 도랑 정비 작업을 미리 해야 했으며 그 작업은 내 몫이기도 했다.
중학생때부터 손이 모자라던 우리집에선 나를 상 일꾼으로 취급을 했다. 감당해 내기 힘든 일도 어쩔수 없이 해야 했던 게 당시의 풍속도이기도 했다.
여름의 장마철에 떠 내려 온 큰 돌멩이도 치우고 그물대를 설치할 돌멩이도 알맞게 놓아야 하고 닥 껍질을 대량으로 삶아 내기 위한 큰 드럼 솥 주변엔 진흙이나 자갈로 아궁이를 만들어야 하고 꼬박 하루의 시간을 요구하는 대 작업이기도 했다.
겨우내내 우리집에서 재배를 한 닥나무 껍질을 말려 두고, 또 다른 집에 가서 닥 껍질을 수매를 해 와서 저장을 하는 일도 참 번거러웠다. 그 껍질을 모두 백피로 만드는 작업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도랑이나 강물에 꽁꽁 얼렸다가 다시 물에 닥 껍질을 불려 그것을 지게에 지고 집에 가져 오면 어머니나 이웃집 아주머니들께서 공동 작업으로 닥 껍질 벗겨내기 작업이 겨우 내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닥 껍질은 흑피와 백피가 있는데 닥나무의 바깥 껍질 부분인 진한 갈색 껍질을 닥 도마하고 닥 칼을 이용하여 제거하는 작업이 참 고된 노동이기도 했다.
내가 하는 일이란 하루 종일 닥 껍질을 계속 벗겨내는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강에 가서 얼렸다가 반복하여 다시 물에 불려 놓은 닥 껍질을 계속 공급하는 것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강 얼음을 깨어 내고 쇠스랑으로 닥 껍질의 다발을 꺼집어 내고서는 그것을 지게에 올려서 지고 올때면 물이 등짝으로 칠칠 흘러 옷이 젖기 일쑤였다.
그런 작업은 끝도 없었고 청소년기에 누구나 소유함직한 활달한 놀이의 자유도 없었다. 숙명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환경에 묵묵히 복종을 했고, 그런 나를 참 착하다고 가끔은 칭찬을 듣기도 했으나 정작 내 자신은 참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일이 끝이 없었으며 고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당시에는 뚜렷한 경제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엄천 골짜기에서는그래도 목돈을 쥘 수 있는 경제 활동이기도 했다. 힘이 많이 들었지만 말이다.
그런 부모님의 노력의 댓가로 자식인 내 자신도 혜택을 보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힘들었던 안스러움의 기억이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
부모님, 고향이란 낱말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엄천골 태생이라 하면 누구에게나 때로는 힘들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인내와 인고의 세월을 견뎌 왔는가!
5회가 주관한 화남초등학교 총 동창회를 다녀 와서 느껴 본 소감은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무언가 가슴 한 모퉁이를 찡 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코를 질 질 흘려 가며 학교에 공부하러 간답시고 책 보따리를 어깨나 허리에 메고 엄천골을 오고가고 했던 촌스런 모습에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서 당당하고 세련된 사회의 중역이 되어 나타난 모습들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세월과 함께 우리네 사는 수준은 옛날하고는 판이하게 다르다. 춥고 어려웠던 우리네 고향이야기는 집집마다 다를 것이나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데 많은 효소 역할을 한것 같다.
가끔은 이런 기억과 함께 문화 생활을 하고 더 재미 있는 여가 활용을 위해 고민을 할 때 옛날의 힘들었던 것들과 대비를 해 보면 작은 것에도 쉽게 감사해 하고 더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참 많다.
언제부터인가 몰라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겨우 내내 닥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했었고 이른 봄부터 창호지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어떻게 하는 일인지는 모르고 옆에서 구경을 하다가 일을 거들어야 했고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제법 아버지와 일을 함께 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일이 창호지 만드는 공장을 지소라 하는데 1년동안 묵혀 놓았던 지소를 정비를 하는 것이었다.
공장이라 하니까 요즘의 중소 기업쯤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가내 수공업 형태로 이루어지는 창호지 제작 과정은 그야말로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해야 했기 때문에 아주 고된 작업이었고 힘이 요구되는 일이기도 했다.
이른 봄에 아버지께서는 꼭 나를 대동하고 지소를 가셨는데 지소에 가서 하는 일이란 개울물 정비작업이었다.
드럼통으로 만든 큰 솥에서 닥 껍질을 삶아 내면 다음 작업이 그것을 넓은 바위위에 얹어 놓고 죽처럼 부드럽게 두드린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흐르는 개울물에 모기장처럼 생긴 촘촘한 그물망에 닥나무 섬유질을 넣어서 씻는 작업이 필요했다.
양잿물로 삶은 후기 때문에 닥 껍질속의 엽록소 성분이나 기타 오염물질을 깨끗하게 씻어 내기 위함이었다. 양잿물은 닥껍질을 부드럽게 하는 작용과 함께 일종의 표백 역활도 이루어지는 성분이나 그 성분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물에 깨끗하게 씻어 헹궈야 했다.
창호지 만드는 작업은 우리집 뿐 아니라 다른 집에서도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닥 껍질을 씻기 위한 도랑 정비 작업을 미리 해야 했으며 그 작업은 내 몫이기도 했다.
중학생때부터 손이 모자라던 우리집에선 나를 상 일꾼으로 취급을 했다. 감당해 내기 힘든 일도 어쩔수 없이 해야 했던 게 당시의 풍속도이기도 했다.
여름의 장마철에 떠 내려 온 큰 돌멩이도 치우고 그물대를 설치할 돌멩이도 알맞게 놓아야 하고 닥 껍질을 대량으로 삶아 내기 위한 큰 드럼 솥 주변엔 진흙이나 자갈로 아궁이를 만들어야 하고 꼬박 하루의 시간을 요구하는 대 작업이기도 했다.
겨우내내 우리집에서 재배를 한 닥나무 껍질을 말려 두고, 또 다른 집에 가서 닥 껍질을 수매를 해 와서 저장을 하는 일도 참 번거러웠다. 그 껍질을 모두 백피로 만드는 작업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도랑이나 강물에 꽁꽁 얼렸다가 다시 물에 닥 껍질을 불려 그것을 지게에 지고 집에 가져 오면 어머니나 이웃집 아주머니들께서 공동 작업으로 닥 껍질 벗겨내기 작업이 겨우 내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닥 껍질은 흑피와 백피가 있는데 닥나무의 바깥 껍질 부분인 진한 갈색 껍질을 닥 도마하고 닥 칼을 이용하여 제거하는 작업이 참 고된 노동이기도 했다.
내가 하는 일이란 하루 종일 닥 껍질을 계속 벗겨내는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강에 가서 얼렸다가 반복하여 다시 물에 불려 놓은 닥 껍질을 계속 공급하는 것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강 얼음을 깨어 내고 쇠스랑으로 닥 껍질의 다발을 꺼집어 내고서는 그것을 지게에 올려서 지고 올때면 물이 등짝으로 칠칠 흘러 옷이 젖기 일쑤였다.
그런 작업은 끝도 없었고 청소년기에 누구나 소유함직한 활달한 놀이의 자유도 없었다. 숙명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환경에 묵묵히 복종을 했고, 그런 나를 참 착하다고 가끔은 칭찬을 듣기도 했으나 정작 내 자신은 참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일이 끝이 없었으며 고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당시에는 뚜렷한 경제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엄천 골짜기에서는그래도 목돈을 쥘 수 있는 경제 활동이기도 했다. 힘이 많이 들었지만 말이다.
그런 부모님의 노력의 댓가로 자식인 내 자신도 혜택을 보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힘들었던 안스러움의 기억이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
부모님, 고향이란 낱말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엄천골 태생이라 하면 누구에게나 때로는 힘들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인내와 인고의 세월을 견뎌 왔는가!
5회가 주관한 화남초등학교 총 동창회를 다녀 와서 느껴 본 소감은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무언가 가슴 한 모퉁이를 찡 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코를 질 질 흘려 가며 학교에 공부하러 간답시고 책 보따리를 어깨나 허리에 메고 엄천골을 오고가고 했던 촌스런 모습에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서 당당하고 세련된 사회의 중역이 되어 나타난 모습들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세월과 함께 우리네 사는 수준은 옛날하고는 판이하게 다르다. 춥고 어려웠던 우리네 고향이야기는 집집마다 다를 것이나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데 많은 효소 역할을 한것 같다.
가끔은 이런 기억과 함께 문화 생활을 하고 더 재미 있는 여가 활용을 위해 고민을 할 때 옛날의 힘들었던 것들과 대비를 해 보면 작은 것에도 쉽게 감사해 하고 더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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