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길과 어머니

배꼽마당 2012. 11. 8. 09:53

2007년 10월 11일 오전 7:02공개조회수 2 0

오도재 길이 완공되고 나서 함양의 병원에 물리 치료를 하러 가시는 어머니를 태우고서 일부러 오도재 길로 차를 몰았다. 아름다운 경치 구경도 시켜 드릴 겸 어머니께서 항상 그리워 하셨던 친정 부근의 분위기를 추억을 되살려 드릴려고 하는 속내가 있었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을때의 이야기이다.

" 아이구. 요새 사람들은 참 기술도 좋지. 이런 산중까지 길을 내다니!"

붉으레 하게 단풍으로 물이 든 지리산의 운치를 그 누구보다도 더 감탄해 하셨던것 같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주 메뉴였고 ' 내 이야기는 책으로 한권 써도 모자란다' 라는 용어가 단골 메뉴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 옛날에 운봉에 있는 너거 이모집에 가서 잘 살지도 못하는 이 동생이 불쌍타고 참깨, 찹쌀, 콩등을 싸 줄때는 어떻게나 좋던지 그것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그 먼 길을 이고 들고 집에까지 오던 길이었는데 세상 참 많이 좋아졌지!"

그 먼길! 그 먼길에 대해서 상황적인 분석을 해 본다면 전북 남원시 운봉에서 인월로, 당시에는 요즘처럼 도로가 전혀 없었으니까(1940년대 말 무렵) 산길 지름길로 주로 다녔던 길이니까 인월에서 삼봉산 오도재의 사잇길로 해서 법화산 중턱길 그러니까 휴천면 문정 마을 뒤 산길로 해서 엄천골까지 무거운 짐을 이고 오셨다는 말이 된다.

약 100리쯤 되는 길이다. 그것도 구불구불한 산 길이며 오르막 내리막이 장애물이 되어 무척 힘이 드는 그런 험한 길이 된다. 요즘 사람들의 태극종주 정도 하는 그런 거리의 험한 길이 된다.

그런 산길로 당시 어린 형님과 누나를 데리고 그 먼길을 다니셨단 말을 난 자주 들으면서 자랐다.
외갓집이 팔령 부근이었지만 어머니께서는 한번도 그곳에 가 보시지 못하셨다. 외갓집이 디른 곳으로 이사를 간 탓이기도 했거니와 고개 하나를 넘으면 존재하는 친정 곳이었어도 버스를 탈려고 하면 두번이나 갈아 타야 하는 곳이었고 빙 둘러서 가야만 했던 그런 먼곳이었으며 항상 바쁜 일상 생활 때문에 여가 문화는 전혀 었으셨던 그런 생활에 찌들으셨던 탓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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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재의 구불구불한 길)


그런 어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기 때문에 일부러 오도재 고갯길을 택하여 나는 차를 몰았던 것이다. 벌써 옛날의 이야기이다.

평범한 길이지만 어머니께서는말끔하고 깨끗하게 포장이 된 기을 아주 감탄해 하셨고 눈에서는 눈물이 괴어 있다는 것을 난 쉽게 감지할 수가 있었다.
과거에 대한 회환의 감정과 그 무거운 짐을 이고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였던 그 먼길을 오고 가셨던 삶의 무게에 대한 대조적인 느낌 때문이셨으리라.

난 평범한 감정으로만 그 길을 다녔었는데 어머니께서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 길을 가셨다.
세상에 대한 감사와 감동, 아름다운 변화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셨던 기억이 아련해 온다.

난 드라이브를 참 좋아 한다. 길이 나 있는 곳이면 구석구석까지 차를 몰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에 나 자신도 차비를 아낄거라는 생각에 먼길을 걸어 다녔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차를 몰고 여행을 하면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어머니의 젊었을 때 고생한 이야기와 맞물려 어머니의 감정 이입이 많이 된 탓이기도 했던것 같다.

길을 만들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려야 했을까?
얼굴도 모르는 그 예쁜길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에게 내가 아름다운 마음으로 길을 이용하는 그 만큼이나 감사해 질 때가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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