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군 금서면 방곡 마을의 위령탑 바로 앞쪽에서 맞은편 쪽으로 개울을 건너 산길로 오르면 왕산의 어귀에서 꼭꼭 숨어 있던 상사폭포가 있습니다.
몇달전에 개울 건너까지 농로의 일부분을 포장을 해서 건너편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나 개울 건너에서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해야만 하더군요.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울을 건너서 상사폭포 가는 길이 헷갈리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왼쪽으로 작은 안내판에 왕산 가는길이 있지만 그 길로 가면 더 당황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100여 미터쯤 가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풀만 수북하게 난 논두렁 뿐이니까요.
다시 되돌아 와서 산 언덕배기 바로 아래에 조성된 오미자 밭을 적당히 헤치고 산 머리 쪽으로 접어들자 비로소 잘 조성된 산길이 나타나기 시작 했습니다.
건너편에는 6.25때 마을 사람들 모두가 통비 분자로 몰려 집단 학살을 당한 위령탑이 조성 된 모습이 한눈에 들어 오기도 합니다.
그 곳부터 약 1.4km 호젓한 산길이 나타나며 산길이면서 그렇게 가파르지도 않고, 산청군에서 상사폭포로 가는 길을 잘 닦아 놓았더군요.
어린 아이 걸음으로 딱 30분 걸리는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상사폭포는 높이가 약 20여m 이고 바로 이웃엔 높이가 약 50여m 되는 상사 바위가 있습니다.
상사라는 낱말에 호기심이 많이 발동하여 쌍재가 고향인 공수님한테 핸드폰 전화를 하여 보았습니다.
상사 폭포 인근엔 쌍재 , 묵은터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쌍재 마을에 공수님네 뿐이고 그 큰 마을의 흔적만 있을 뿐이지요.
옛날 상사 폭포가 있는 마을에 살고 있던 어느 한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가슴속에 심어 두었던 한 아가씨를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어여쁜 아가씨의 고운 자태에 총각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했던가 봅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 꼭 그 마을을 거쳐 가는 곳을 택했으며, 아가씨가 있는 마을에서 일을 부탁하면 급한 자기네 일을 제쳐 두고 밭을 가는 일이나 집을 짓는 일, 상여를 메는 일이나 억새풀로 엮은 것으로 초가집의 지붕을 이을 때 빠짐 없이 총각의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습니다.
총각의 가슴 속에는 아가씨의 고운 모습으로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와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 대한적이 한번 있었는데 바로 우물가에서 아가씨로부터 바가지에 담긴 물을 얻어 마신 것이 고작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아가씨의 모습을 본 이후로 총각의 가슴은 더 울렁거리기 시작 했습니다.
하지만 왕산 어귀에서 논마지기가 제법 되고 소도 두마리 정도 기르는 부잣집 딸인 아가씨 집안과 나무꾼으로 살아가는 자기네 집안의 처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총각의 마음은 그냥 짝사랑으로만 일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가씨도, 이목구비가 훤칠하며 건강한 총각의 모습을 본 이후에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고, 성당 과정에서 누구나가 겪는 사춘기 시절에 으레히 있을 법한 총각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당시의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유교적 분위기에서는 아가씨가 총각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는 것은 요원한 실정이었지요.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 아가씨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깊어 갔으나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기회나 용기가 매우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내성적인 사람에게 잘 걸리는 가슴앓이 병이 그 총각한테 여지없이 걸려 버린 것이지요.
서로간에 흠모를 하는 마음이 깊어 갈 무렵, 이웃 마을에 살고 아가씨의 나이는 차고 혼담이 오고 간다는 소문을 들은 총각의 가슴은 자꾸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감히 자신의 위치에서는 도저히 아가씨에게 법접할 수 없다는 것에서 절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계의 부잣집으로 아가씨의 혼담이 확정되었다는 또 다른 소문을 들었을 때 총각은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에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놓을 상대가 없었으며, 그 누구에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 보았자 대책을 세워 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총각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는 재미가 없어졌지요. 나무를 팔아 소도 한마리 사고, 자신의 힘으로 초라한 집안 살림을 올려 세워 볼려고 한 이면에는 아가씨를 향한 흠모의 정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 가는 상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한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던 그 총각은 며칠 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 갔고, 총각의 집에서는 굿을 하는 소리가 두어번이나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총각의 가슴속에는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아가씨로 꽉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실성한 사람이 되어 버린 총각은 상사폭포가 있는 큰 바위에 올라가 높다란 바위 아래로 떨어져 자살을 해 버렸습니다.
산골 마을에 건장하고 마음씨 착한 총각의 자살은 아주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총각을 죽인 사람은 이웃 마을의 아가씨였다는둥 아가씨의 사주 팔자가 세서 신랑을 잡아 먹을 팔자라는둥 하는 소문이 금세 왕산 어귀에 퍼져 나갔습니다.
총각의 죽음은 소문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고, 죽음으로 못 이룬 사랑의 표현에 대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총각에 대한 연민의 정도 함께 합세를 해 소설을 지어내기까지 했습니다.
'아가씨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 처녀가 임신을 했다더라. 처녀 총각이 어른들 몰래 자주 만나는 것을 직접 봤다 카더라.'
이런 소문은 이내 혼인 날짜를 받아 놓은 부잣집 총각의 집안까지 흘러 들어갔고, 결혼 약속은 없었던 것으로 통지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총각의 자살로 인해 아가씨 집안까지 불똥이 튀어 버린 것입니다.
그녀 역시 그 총각을 흠모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엄격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연애 편지의 교환이나 산골에서 순박한 처녀 총각들 사이에서 속삭거리는 몰래 사랑의 짜릿한 연애 사건 한번 없었던 말하자면 순정 하나로만 가슴에 품고 있었던 처녀였기에 그녀 역시 너무나 충격적이었지요.
그 이후로 이 아가씨도 총각이 떨어져 죽은 상사폭포 옆의 큰 바위에 날마다 찾와와 그 총각을 그리워 하다가 그리워 하다가 결국 그녀는 구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쌍재에 살고 있는 공수님이 마을 어른들로부터 어릴 때 들었던 상사 폭포, 상사바위와 관련된 전설입니다
몇달전에 개울 건너까지 농로의 일부분을 포장을 해서 건너편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나 개울 건너에서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해야만 하더군요.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울을 건너서 상사폭포 가는 길이 헷갈리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왼쪽으로 작은 안내판에 왕산 가는길이 있지만 그 길로 가면 더 당황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100여 미터쯤 가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풀만 수북하게 난 논두렁 뿐이니까요.
다시 되돌아 와서 산 언덕배기 바로 아래에 조성된 오미자 밭을 적당히 헤치고 산 머리 쪽으로 접어들자 비로소 잘 조성된 산길이 나타나기 시작 했습니다.
건너편에는 6.25때 마을 사람들 모두가 통비 분자로 몰려 집단 학살을 당한 위령탑이 조성 된 모습이 한눈에 들어 오기도 합니다.
그 곳부터 약 1.4km 호젓한 산길이 나타나며 산길이면서 그렇게 가파르지도 않고, 산청군에서 상사폭포로 가는 길을 잘 닦아 놓았더군요.
어린 아이 걸음으로 딱 30분 걸리는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상사폭포는 높이가 약 20여m 이고 바로 이웃엔 높이가 약 50여m 되는 상사 바위가 있습니다.
상사라는 낱말에 호기심이 많이 발동하여 쌍재가 고향인 공수님한테 핸드폰 전화를 하여 보았습니다.
상사 폭포 인근엔 쌍재 , 묵은터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쌍재 마을에 공수님네 뿐이고 그 큰 마을의 흔적만 있을 뿐이지요.
옛날 상사 폭포가 있는 마을에 살고 있던 어느 한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가슴속에 심어 두었던 한 아가씨를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어여쁜 아가씨의 고운 자태에 총각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했던가 봅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 꼭 그 마을을 거쳐 가는 곳을 택했으며, 아가씨가 있는 마을에서 일을 부탁하면 급한 자기네 일을 제쳐 두고 밭을 가는 일이나 집을 짓는 일, 상여를 메는 일이나 억새풀로 엮은 것으로 초가집의 지붕을 이을 때 빠짐 없이 총각의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습니다.
총각의 가슴 속에는 아가씨의 고운 모습으로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와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 대한적이 한번 있었는데 바로 우물가에서 아가씨로부터 바가지에 담긴 물을 얻어 마신 것이 고작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아가씨의 모습을 본 이후로 총각의 가슴은 더 울렁거리기 시작 했습니다.
하지만 왕산 어귀에서 논마지기가 제법 되고 소도 두마리 정도 기르는 부잣집 딸인 아가씨 집안과 나무꾼으로 살아가는 자기네 집안의 처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총각의 마음은 그냥 짝사랑으로만 일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가씨도, 이목구비가 훤칠하며 건강한 총각의 모습을 본 이후에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고, 성당 과정에서 누구나가 겪는 사춘기 시절에 으레히 있을 법한 총각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당시의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유교적 분위기에서는 아가씨가 총각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는 것은 요원한 실정이었지요.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 아가씨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깊어 갔으나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기회나 용기가 매우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내성적인 사람에게 잘 걸리는 가슴앓이 병이 그 총각한테 여지없이 걸려 버린 것이지요.
서로간에 흠모를 하는 마음이 깊어 갈 무렵, 이웃 마을에 살고 아가씨의 나이는 차고 혼담이 오고 간다는 소문을 들은 총각의 가슴은 자꾸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감히 자신의 위치에서는 도저히 아가씨에게 법접할 수 없다는 것에서 절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계의 부잣집으로 아가씨의 혼담이 확정되었다는 또 다른 소문을 들었을 때 총각은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에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놓을 상대가 없었으며, 그 누구에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 보았자 대책을 세워 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총각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는 재미가 없어졌지요. 나무를 팔아 소도 한마리 사고, 자신의 힘으로 초라한 집안 살림을 올려 세워 볼려고 한 이면에는 아가씨를 향한 흠모의 정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 가는 상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한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던 그 총각은 며칠 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 갔고, 총각의 집에서는 굿을 하는 소리가 두어번이나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총각의 가슴속에는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아가씨로 꽉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실성한 사람이 되어 버린 총각은 상사폭포가 있는 큰 바위에 올라가 높다란 바위 아래로 떨어져 자살을 해 버렸습니다.
산골 마을에 건장하고 마음씨 착한 총각의 자살은 아주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총각을 죽인 사람은 이웃 마을의 아가씨였다는둥 아가씨의 사주 팔자가 세서 신랑을 잡아 먹을 팔자라는둥 하는 소문이 금세 왕산 어귀에 퍼져 나갔습니다.
총각의 죽음은 소문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고, 죽음으로 못 이룬 사랑의 표현에 대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총각에 대한 연민의 정도 함께 합세를 해 소설을 지어내기까지 했습니다.
'아가씨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 처녀가 임신을 했다더라. 처녀 총각이 어른들 몰래 자주 만나는 것을 직접 봤다 카더라.'
이런 소문은 이내 혼인 날짜를 받아 놓은 부잣집 총각의 집안까지 흘러 들어갔고, 결혼 약속은 없었던 것으로 통지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총각의 자살로 인해 아가씨 집안까지 불똥이 튀어 버린 것입니다.
그녀 역시 그 총각을 흠모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엄격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연애 편지의 교환이나 산골에서 순박한 처녀 총각들 사이에서 속삭거리는 몰래 사랑의 짜릿한 연애 사건 한번 없었던 말하자면 순정 하나로만 가슴에 품고 있었던 처녀였기에 그녀 역시 너무나 충격적이었지요.
그 이후로 이 아가씨도 총각이 떨어져 죽은 상사폭포 옆의 큰 바위에 날마다 찾와와 그 총각을 그리워 하다가 그리워 하다가 결국 그녀는 구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쌍재에 살고 있는 공수님이 마을 어른들로부터 어릴 때 들었던 상사 폭포, 상사바위와 관련된 전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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