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도 막바지에 다달았다. 이때쯤이면 찬 날씨가 주변을 자꾸 맴돈다. 건조함과 함께 쌀랑한 날씨는 나를 무척 괴롭게 한 기억들로 가득차 있다.
아버지께서는 창호지 생산을 위한 원가 절감을 위해 창호지 주 원료가 되는 닥나무를 직접 구매해서 닥나무 삼굿을 하기 시작했는데 딱 이때쯤 삼굿 작업을 시작했고 그 주된 노역의 삼매경에 빠져야 했던 주인공은 나였다.
평촌마을 강가에 덩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삼굿 가마솥은 이때부터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약 보름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닥나무 삼굿을 해야 했으며 나무 해 오기, 한나절 이상의 시간동안 큰 삼굿 가마솥에 불을 때야 하는 작업, 삼굿솥 안에 약 80KG 정도 되는 닥나무 단을 지게도 져다 넣는 작업, 김이 물씬 솟아 오르는 익은 닥나무 단을 솥에서 꺼집어 내는 일, 마을 사람들이 닥 껍질을 벗겨 내면 그 닥나무 껍질을 운반해서 빨래줄에 말리는 작업등등 고된 일과가 하루도 쉼이 없이 게속된 기억을 아련하다.
그 때마다 문정을 거쳐 한남 마을 아래로 형성된 엄천강의 찬 골 바람이 귓전을 때렸다. 엄천골짜기의 겨울 바람은 언제나 그랬듯이 차고 건조한 칼바람이었다. 손등이 자주 텄던 이유든 차고 건조한 겨울 날씨 때문에 난 언제나 손등이 갈라져 있었다. 건성피부였던 탓도 있었지만 손이 텄던 이유는 바로 엄천골의 건조하고 찬 겨울 날씨때문이었다고 다시금 생각해 본다. 딱 이때즘 그때의 기억을 해 본다면 매력적인 기억은 아니다.
엄천강의 강 바람이 휘익 불어 댈때면 삼굿 가마솥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던 나에게 매운 연기가 숨을 멎게 하고 눈물이 핑 돌 정도의 매운 연기맛을 맛보게 했다. 그것도 한 두번이면 괜찮은데 하루 종일 바람이 불어대니 짜증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이야 지리산 아래에서의 어려운 환경속에서 나름대로 경제 활동이라는 목표때문에 일 자체에 재미를 느꼈을 지 모르지만 당시의 나 자신은 그런 목표가 없었고 오직 부모님이 시키시는 일 그 자체일 뿐이었으며,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돕는 의도 하나만 가지고 고된 일 자체에 버티기는 아주 힘이 들었다. 그래도 피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런 일은 내 몫이었기에 숙명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내 뇌리에 꽉 차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내 사주 팔자라고 생각했기에 그냥 그렇게 일을 해 댔다.
11월 말 쯤이면 그때의 기억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
" 요즘 어떻게 지내니?"
" 말도 마라 추워서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겠다!"
고향에서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지리산 엄천골은 많이 춥단다. 이곳 거제는 지라산 보다 한참 아래이니 그렇게 춥다는 느낌이 없는데 고향의 날씨가 많이 춥다하기에 순간 옛날의 닥 삼굿 하던때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 그래 딱 이때쯤엔 언제나 추웠지!'
엄천골 칼바람은 매서웠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 얼어 붙은 징검다리를 건널 때 그 칼바람이 기억나고, 한참 후에 다리가 건설되고 그 다리위를 건널 때 찬 바람이 또 기억난다.
" 이곳의 겨울 날씨는 매섭기 때문에 단열재에 많이 신경을 써야 합니다!"
도시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하는 분들의 전원주택 시공 현장에서 매번 이런 말을 건넸다. 겨울의 찬 바람과 지리산 아래의 낮은 겨울 날씨를 이겨 낼려면 애초부터 그 준비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힌트였다.
그런 기억 때문에 고향에 대한 집착성이 나도 모르게 길러져 왔는가 보다. 구석구석 고향의 자연과 교감이 되었고, 그 구석구석마다 어쩔 수 없이 허둥대야 했던 많은 기억들 때문에 지리산 엄천골이란 블로그를 만들어 고향의 이야기를 자꾸 기록하는 지도 모른다. 방학때마다 나무를 했던일, 여름철이면 언제나 소를 몰고 소먹이는 일, 꼴베기 작업, 창호지 생산일 돔기(베개꼴 채취하기, 닥 삼굿하기, 닥 껍질 수매하기, 닥 껍질을 쉽게 벗겨내기 위해 닥껍질을 강물에 얼렸다가 집까지 나르는 일) 많은 농사일로 벌려 놓은 논에서 볏짚 나르기, 소죽 끓이기 등이 그것이다.
구차하고 아린 기억들이 가끔은 추억으로 바꾸어지기도 한다. 조용하고 늦은 저녁이면 그때의 기억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간다. 내 블로그에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저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 참 아름다운 기억들이야! 나이가 들어가니 아이 한테 난 그 이야기들을 조금 씩 꺼내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귀가 닳도록 해 댔던 그것 처럼 나도 아들 딸 한테 이야기를 조금씩 해 대는 습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별로 좋은 것은 아닌데 말이다. 내가 고생했다는 말을 하지 말란다. 그 당시엔 누구나 집안 나름대로 모두 고생을 한 시절이었으며,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들이 많다고 말이다. 집사람이 나에게 건네는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 당시엔 누구에게나 비슷한 아린 추억들이 많다고 말이다.
겨울 날씨가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한꺼번에 많이 몰고 왔다. 지금의 그 기억들은 아련한 추억으로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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