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동부자락 옛 기록물

양대박선생의 두류산기행록 (1586)

배꼽마당 2015. 11. 12. 11:12

 

 

▲일시 : 1586년(선조 19) 9월 2일~9월 12일
▲동행 : 오적․양길보․양광조와 기생 및 종
▲일정 :
•9/2 청계→양길보의 집→운봉현(1박)
•9/3 운봉현→황산 비전→인월역→이화정→웅담수→백장사(1박)
•9/4 백장사→변사정 구거지→도탄→실상사→두모담→군자사(1박)
•9/5 군자사→용유담→군자사(1박)
•9/6 군자사→의촌→초정동→백문당→곡암(하동바위)→제석당터(현 장터목 근처)→제석신당→제석봉→천왕봉 성모사(1박)
•9/7 천왕봉→제석신당→하동바위→백문당→군자사(1박)
•9/8 군자사→용유담→사담→엄천리→목동 이모댁(1박)
•9/9 목동(1박)<벗들이 오지 않아 마을 사람들과 지내다>
•9/10 목동 우중평의 집(1박)<연회>
•9/11 목동→사기현→팔량원→황산비전(1박)
•9/12 비전→안신원→귀가



붉은 구름이 만리에 뻗치고


두류산을 다시 유람하게 되었다. 지난 경신년(1560) 봄, 승주(昇州)의 관아(官衙)로 부모님을 찾아 뵙고 돌아오는 길에 봉성(鳳城)을 거쳐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 화개동으로 들어갔다. 쌍계사∙청학동 및 신흥사∙의신사(擬神寺)를 두루 돌아보고 그쳤다.

그 뒤 을축년(1565) 가을, 상사(上舍) 신심원(申深遠) 등과 더불어 운성(雲城)을 거쳐 황산(荒山)을 돌아 백장사(百丈寺)에 투숙하였다. 수석(水石)을 구경하며 계곡을 따라가도 곧장 천왕봉에 올라, ○신(○神)∙좌고대 등 몇 곳을 바라보았다. 또 경진년(1580) 가을, 고담(孤潭)(이하 2장 缺)과 더불어 연곡사(燕谷寺)로부터∙∙∙∙∙∙∙(이하 50자 결). 봄에 꽃 피고 가을에 낙엽질 때마다 내 마음이 그곳에 가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산이 바다를 삼킬 듯이 웅장하고 천지간에 우뚝 서 있어서 신선들과 고승들이 모여 살기 때문이리라.

마침 병술년(1586) 가을. 춘간(春澗) 오훈중(吳勳仲 : 이름은 積)이∙∙∙∙∙(이하 11자 결)하고, 분연히 탄식하기를 “인간 세상에 30년 동안이나 살면서 천상의 세계에 날아오르지 못했네. 번뇌 많은 이 세상에 살다가 염부(髥婦)가 되고 말았으니, 애석하도다! 그대는 어떻게 나로 하여금 이 속세에서 벗어나 허공에서 손을 흔들며, 뜬구름을 발고 천지 사방을 아득히 바라보면서, 조물주와 더불어 넓고 넓은 곳을 유람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내가 답하기를 “좋은 날 깨끗한 유람을 하는 것도 청계(淸溪)에서 덕을 넓히는 것에 지나지 않으이. 산수가 빼어난 곳에서도 가슴속의 티끌을 씻고 세속의 근심을 없앨 수 있네”라고 하였다. 오춘간이 말하길 “아닐세. 나는 그런 시시한 유람은 싫네!”라고 하여, 내가 말하길 “기필코 큰 구경을 하려면 두류산 정상에 올라야 할 걸세”라고 하였다. 마침내 서로 마음이 통했다.

그리하여 나란히 말을 타고 길을 나서 청허정(淸虛亭) 주인 양길보(양吉甫)를 찾아갔다. 그는 곧 오춘간의 외삼촌이다. 본디 어질고 지혜로운 성품을 지니고 있었는데, 우리들의 말을 듣고서 곧바로 마음이 맞아,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이 날이 9월 2일이었다.

노래 부르는 애춘(愛春), 아쟁 타는 수개(守介), 피리 부는 생이(生伊)를 데리고 갓는데, 이들은 모두 유람할 때 흥을 돋우는 자들이다. 나와 오춘간은 먼저 동쪽 시내로 길을 나서 만귀옹(晩歸翁)을 찾아갔고, 청허주인은 곧장 산길로 향했다. 날이 저물녘에 영원(嶺院)에서 모여 조금 쉬었다가 저녁에 운봉현(雲峰縣)에 도착하여 묵었다. 그현의 수령 이군회(李君會)는 나의 재종(再從) 인척이다. 우리를 동쪽 행랑으로 맞아들여 반가운 눈길로 접대하였다. 일행 모두 실컷 먹고 마셨다. 종들도 쌀밥을 배불리 먹었다.


초3일(갑오).

맑음. 새벽녘에 북소리를 듣고 숲 속으로 나가보니, 수령이 벌써 나와 있고 활 쏘는 도구가 진열되어 있었다. 숲 속의정자는 관아와 가까이 있었는데 제법 아름다운 운치가 있었다. 수령이 우리들을 맞아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활을 쏘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여, 얼큰하게 취한 뒤에야 자리를 파했다.

느지막이 출발하여 길을 가다가 황산의 비전(碑殿)에서 잠시 쉬었다. 이 비석은 바로 우리 태조께서 왜구를 물리친 공적을 칭송한 비다. 전(殿)은 비(碑)를 지미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 이 비석으로 인하여 비전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출발하였다.

인월역(引月驛)에서 좁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골짜기 입구에 이화정(梨花亭)이 있었는데, 유람하는 사람이 말을 맡겨두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뻗은 잔도를 따라 산을 빙 돌아 10여 리를 갔다. 서리 맞은 나뭇잎이 붉게 물들었는데, 연하기도 하고 진하기도 하였다. 가을 시냇물은 매우 맑아서 굽이굽이 볼 만하였다. 웅담수(熊潭水)가에 이르러 북쪽을 향해 산으로 올랐다. 산허리를 두른 좁은 길이 굽이굽이 돌았다.

거의 9부 능선에 이르러서야 백장사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에 걸맞는 이름을 붙였으니, 부끄러울 게 없다. 날아갈 듯한 누각과 우뚝 솟은 불전(佛殿)이 골짜기에 그들먹하였다. 이 절의 승려 천지(千指)가 합장하며 나와 우리를 맞이하였다. 이 절은 참으로 이 산에서 제일가는 총림(叢林)이다. 남쪽 누대가 가장 높고 상쾌하여, 돗자리를 빌려 깔고 큰 대자로 누웠다. 멀리 천왕봉∙반야봉∙영신봉∙제석봉 등을 바라보니, 푸른빛을 머금고 허공에 솟아 동남쪽으로 가로질러 있었다. 장엄하도다!

조금 쉬면서 차와 과일을 먹었다. 발길을 돌려 법당으로 들어갓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뒤편에 금당(金堂)이 있는데 경관이 맑고 빼어나 감상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나와 오춘간은 지팡이를 짚고 함께 올랐다. 선방(禪房)이 고요하고 깨끗하였다. 이곳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남쪽 누대에서 볼 수 없던 곳도 보였다. 데리고 온 애춘 등이 서리 맞은 복숭아를 가져다주어 다소 갈증이 풀였다. 담장 밖에 또 무르익은 돌배가 있어, 어린종을 시켜 나뭇가지에 올라 마구 털게 했는데, 잠깐 사이에 한 움큼이나 되었다. 잠시 그 광경을 보며 즐겼다.

날이 저물어 법당으로 돌아왔다. 청허옹(淸虛翁)은 그때까지 남족 누대에 누워 있었다. 이 절의 승려 지암(智巖)은 고향 사람으로,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밥을 지어 푸짐한 음식을 마련해주었는데, 정의(情意)가 매우 도타웠다. 애써 마다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마침내 앞기둥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밤에 현묘당(玄妙堂)에서 잤다.


초4일(을미).

맑음. 새벽에 일어나 흰죽을 먹으며 세 사람이 상의하기를 “산 속에서 즐겁게 해줄 사람은 양광조(梁光祖)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했다. 양군은 천령(天嶺)의 성곽 밖에 사는데, 노래와 춤을 잘하고 게다가 우스갯소리도 잘하여 우리들이 항상 배우라고 그를 놀렸다. 곧바로 서신을 띄워 그를 불렀다. 어스름녘에 산에서 내려와 시내를 따라 10여 리를 가서 변산인(邊山人: 이름은 사정(士貞), 호는 도탄(桃灘)이다)이 은거했던 곳을 찾았다. 대나무 울타리에 띠집이었고, 복숭아나무∙버드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곁에 초라한 몇 채의 민가가 있었는데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리니, 완연히 진나라 때의 풍속 그대로였다.

이곳은 초막이 잘 어우러진 산간마을, 곡식이 잘 자라는 토양, 과일이 잘되는 밭, 고기잡이하기에 제격인 시내가 있다. 참으로 넉넉하고 한가로운 동네로, 한적한 물가에 위치하여 은자가 노닐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산옹이 이 산을 떠나자 경물이 황량해져, 향기로운 풀로 엮은 장막이 텅 비었고 원숭이와 학이 원망하는 듯하였다. 나와 오춘간은 시 한 수씩 지어 벽에 적어놓았다.

말을 타고 떠나, 도탄 하류를 건너 실상사(實相寺) 옛터를 찾았다. 절은 폐허가 된 지 1백 년이 지나, 무너진 담과 깨진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 있었다. 오직 깨진 비석이 길 옆에 쓰러져 있고 철불이 석상(石床) 위에 우뚝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절은 고려조에 창건한 대가람으로, 그 뒤 병화에 소실되었습니다. 지난날 화려하게 단청했던 불전이 지금은 시골 사람들의 농경지가 되고 말았으니, 또한 산가의 불행입닏. 흥망성쇠는 석가여래라 하더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이지요”라고 하였다. 나와 오춘간은 말을 세우고 서성이다가 길을 떠났다.

시내를 따라 5리쯤 가서 두모담(頭毛潭)에 닿았다. 일행은 모두 말안장을 풀고 쉬었다. 웅장한 두모담은 맑고 푸르러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바위 형세가 들쭉날쭉하여 그 기괴함을 형용할 수 없었다. 바위 가운데는 절구처럼 우묵하게 들어간 것도 있고 가마솥처럼 움푹 팬 것도 있었다. 두모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밑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절구 같은 바위도 있고, 수레바퀴ㅏ 들어갈 만큼 큰 가마솥같은 바위도 있었으니, 어쩌면 신령스런 용이 구슬을 감춘 굴이거나 옥녀가 머리를 감은 대야가 아닐까? 우리 세 사람은 두모담 가에 둘러앉아 실컷 구경하고, 주거니 받거니 술을 몇 순배 돌리고서 일어났다.

날이 저물어 군자사로 들어갔다. 이 절은 두류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지만 길이 넓고 평탄하여 힘들게 부여잡고 오르지 않아도 되어싿. 그래서 이리저리 마음 내키는 대로 걸었다. 나는 지난날 풍악산(楓嶽山)을 유람할 때 몸소 소인곶(小人串)에 올랐었는데, 깊고 험한 데다 굽이굽이 돌면서 올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땀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군자는 친히 할 수 있고 소인은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두 노승이 문 밖까지 나와 우리를 맞이하였다. 음산한 행랑채는 반쯤 무너졌고 불전은 적막하여 예전의 군자사가 전혀 아니었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승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유람객들이 연이어 찾아오고 관청의 부역이 산더미처럼 많으니, 중들이 어찌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절이 어찌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서, 손가락을 꼽아가며 관청에서 시키는 부역을 헤아리며 그 까닭을 낱낱이 말하였다. 오춘간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 일이 괴로운가? 내가 수령에게 고하여 그대들의 부역을 줄여주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승려가 수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 가혹한 정치의 폐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산 속에서 걸식하는 승려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에 시달리니, 살을 깎는듯한 고통은 금수(禽獸)라도 면치 못할 것이다. 한참을 탄식한 후 법당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원통전(圓通殿)에서 불을 밝히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초5일(병신).

흐림. 아침 일찍 조반을 재촉해서 먹고 용유담으로 향하려는데 양광조가 어둑새벽에 당도하였다. 우리는 별다른 격식 없이 웃으며 서로를 맞았다.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좌중이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그 역시 좋은 벗이다.

느지막이 거문고 타고 노래하고 피리 부는 기생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한 노승이 길 안내를 자청하여 그와 함께 갔다. 마침내 문을 나서 시내를 따라 10여 리르 가니 물은 더욱 맑고 바위는 더욱 길쭉길쭉하였다. 언덕엔 서리 맞은 나무가 서 있고, 기가엔 소나무∙홰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나귀타고 길 가는 우리의 모습이 완연히 그림 속의 풍경 같았다. 고삐를 고 천천히 가니, 더딘 것도 그다지 싫지 않았다.

용유담 가에 도착해 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곳은 가까이서 구경하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위대하고나, 조물주가 이 경관을 만들어냄이여. 비록 한창려(韓昌黎)나 이적선(李謫仙)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수수방관하며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우리들이 어쩌겠소. 차라리 시를 읊기보다는 우선 여기서 술이나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껏 즐기다가 파하였다.

오춘간이 못내 재주를 발휘하고 싶어 시 한수를 지었다. 그중에서 “신령들의 천 년 묵은 자취, 푸른 벼랑에 남은 흔적 있네”라는 구절은 옛 사람들일지라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구니, 어찌 잘 형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군자사로 돌아오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한 종이 천령의 남촌(南村)에서 홍시와 떡 상자를 지고 왔는데, 내일 상봉을 오를 때 점심거리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초6일(정유).

흐렸다 개었다 함. 한밤중에 불을 켜고 일어나 앉아 상봉에 오를 채비를 하여쓴데, 짚신∙대지팡이와 베로 만든 행전(行纏)이 전부였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문을 나서서 말을 타고 의촌(義村)을 거쳐 곧바로 초정동(初程洞)으로 들어갔따. 상봉에 오르는 사람은 반드시 이 길을 거쳐야 한다. 마을 위아래에는 감나무가 대자리처럼 빼곡히 서 있었다. 잎은 다 떨어지고 감만 주렁주렁 달렸는데, 골짜기 가득 붉게 빛나고 있었다. 이 또한 하나의 기이한 볼거리였다.

험준한 벼랑이 다투듯 서 있고, 수석(水石)이 웅장하고 아름다워 어제 본 것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다시 산길 10여 리를 가서 백문당(白門堂: 혹 백무당(百巫堂)이라고도한다)에 도착하였다. 이 집은 길가 숲 속에 있는데, 잡신들이 모셔져 있고 무당들이 모이는 곳이다. 밤낮없이 장구를 치고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사당 안에는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희한하고 괴이하였다. 이곳은 얼른 떠나야지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곳이었다. 밥을 재촉해 먹고 얼른 신을 신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종을 시켜 안장을 풀고 말을 쉬도록 하였다. 지팡이를 짚고서 발길 닿는대로 한걸음 한걸음 험한 곳을 올랐다. 저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니 까마득하여 어디가 천왕봉인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오르고 또 오르면 언젠가는 반드시 정상에 오르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여기서부터는 한 치 나아가면 한 치 오른 것이 되고, 한 자 나아가면 한 자 오른 것이 된다. 한 번 발을 들면 한 계단을 오르고, 한 번 굽혔다 펴면 한 층을 오르게 된다. 숨이 차 헐덕거렸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정오에 비로소 곡암(哭巖)에 도착하였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옛날 하동(河東) 수령이 상봉에 오르다가, 이곳에 이르러 힘이 다해 통곡을 하고서 돌아갔습니다. 그 대문에 곡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비루하구나. 하동 수령의 나약한 의지여. 자기의 힘을 헤아려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험한 곳을 덤벼들어 무모하게 아름다운 경관을 구경하려 하다니. 겨우 숲 속에만 들어갔을 뿐 백 리 길을 반도 못 가고 말아 한 삼태기의 공이 허사가 되었으니, 어찌 수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종에게 물을 길어오게 하여 한 바가지씩 들이켰다. 여기서부터는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밟는 듯하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면서, 넝쿨을 잡거나 나무를 부여잡고 올라가는데, 그 괴로움을 감내할 수 없었다. 지팡이를 짚고서 서 있기도 하고, 바위에 걸터앉아 쉬기도 하였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힘내 오르게나, 하동 수령처럼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말게”라고 하였다. 서로 격려하면서 올라갔다.

간신히 폐허가 된 제석당(帝釋堂) 터에 이르렀다. 천왕봉을 올려다보니 보다 더 높은 것이 없고 보다 더 큰 것이 없어,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없는 하늘과 같았다. 다음으로 제석봉을 바라보니 그 형세가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 장엄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러나 상봉에 비하면 발돋움을 하여도 미치지 못할 듣하였다. 상봉의 동쪽에는 소년대가 있는데 바위가 우뚝하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형세였다. 소년대 조금 아래쪽에 독녀봉(獨女峰)이 있는데, 봉우리의 형세가 홀로 우뚝하여 짝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그 외 마음에 드는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는 말로써 형용할 수 없었다. 여러 산을 둘러보니 모두 발 밑 저 아래에 가물거렸다.

마침 몇 개월째 가뭄이 들어 물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과(西果) 한 쪽씩 먹고 나니 갈증이 조금 풀렸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더욱 험하고 다리가 더욱 떨려 한 걸음 내딛기가 매우 어려웠다. 동행한 승려 일원(一元)과 각련(覺蓮)으로 하여금 번갈아 잡아당기게 하면서 올랐다. 오춘간도 그렇게 하였다. 청허옹 및 양군(梁君)은 종들의 등에 업혀 올랐다. 양군은 그때 등에 업힌 채로 팔을 들어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들은 매우 피곤하였지만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다시 10여 리를 갔는데, 기이한 바위가 길가에 우뚝 서 있었다. 높이는 수 백 척이나 되었고 삼면은 깎아세운 듯하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아찔하였다. 그 아래에는 돌창포가 수북이 자라 있었는데, 서리와 눈이 내렸는데도 빛깔이 더욱 파랬다. 마치 조물주가 보호해주고 있는 듯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매를 잡기 위해 설치한 움막이 많았다. 매 잡는 사람이 밤낮으로 산곡대기에 엎드려서 그물을 지키니 심신이 매우 피로하리라. 아! 매는 허공을 나는 새로 기이한 재주를 아끼지 않고 오만하게 먹이를 찾아다니는 놈이다. 그러다 끝내 덫에 걸려 고삐에 매이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명예를 탐하고 이익을 좋아하는 자가 이를 본다면 조금은 경계가 될 것이다.

저물녘에 제석신당(帝釋新堂)에 올랐다. 이 또한 신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층층이 늘어선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가 모두 내 앉은자리에서 한눈에 들어왔다. 앉아 있자니 몸은 풀어지고 마음은 오롯하여, 희이(希夷)의 경지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사에 미련이 없었다.

봉우리 중 가장 높은 것은 영신봉∙좌고대∙영랑봉(永郞峯)∙신녀봉(神女峯)∙반야봉∙무주봉(無住峯)∙백두봉(白頭峯)∙지장봉(地藏峯)∙미타봉이다. 우뚝 솟아 있는 것도 있고, 불쑥 홀로 하늘에 매달린 것도 있고, 구부정하게 몸을 굽힌 듯한 것도 있고, 다소곳이 엎드린 듯한 것도 있어서 뾰족하고 우뚝하고 쭈뼛하고 겹쳐진 모양을 다 기록할 수 없었다.

깊숙한 구역은 제석동(帝釋洞)∙나한동(羅漢洞)∙월락동(月落洞)∙대암동(臺巖洞)∙실상동(實相洞)∙엄천동(嚴川洞)∙백복동(百福洞)이다. 구불구불 뻗은 산줄기도 있고 빙 두른 산줄기도 있으며, 확 트여 넓은 골짜기도 있고 뻗어나가다 굽이쳐 되돌아오는 듯한 골짜기도 있었다. 오목하고 휑하고 우묵하고 움푹한 계곡이 푸른빛과 흰빛으로 어우러져 숨김없이 드러나 보였다.

기이하도다. 궁벽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조물주가 빼어난 경관을 다 모아 놓은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마침 밤에 된서리가 내려 나뭇잎들이 한껏 붉게 물들고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어, 원근의 지역이 진하게 보이기도 하고 엷게 보이기도 하였다. 마치 천만 겹의 수묵화를 그려놓은 병충 같기도 하고, 3백 리나 펼쳐진 비단 휘장 같기도 하였으니, 부유하도다. 승려 일원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빈도가 이 산에 머문 지 10년이 다 되었습니다. 매년 가을에 자주 사람들을 안내하여 이 당에 올라 이런 관경을 본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이번 가을처럼 눈부시게 찬란한 모습을 본 적이 아직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리저리 거닐며 구경하는 사이,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갈 길은 아직 먼데 일행이 모두 피곤하여 일어날 수 없었다. 머물러 묵고 싶었지만 물과 불이 다 떨어져 달리 계책이 없었다. 마침 뜰 아래서 맷돌을 만들고 있던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향적사가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사람을 보내 밥을 짓고 물을 떠서 가져오게 하여 상봉에서 만나기로 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 방안일 것입니다. 혹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함께 가겠습니다”라고 하여, 일행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의 말대로 곧장 지팡이를 짚고 출발하여 급히 제석봉에 오르니 해는 벌써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남해(南海)를 굽어보니 넘실대는 큰 파도가 하늘과 맞닿았고, 놀에 물든 구름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여 여러 섬들이 보였다. 가렸다 하였다. 나와 오춘간은 나무에 기대 마음껏 바라보았다. 내가 말하기를 “봉우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어찌 이 봉우리가 높은 줄 알았겠는가? 저 넓은 바다를 보지 않았다면 저 바다가 저리 큰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제야 지위가 높으면 소견도 커진다는 말을 바야흐로 믿게 되었네. 그렇지만 상봉을 우러러보니 태연히 우뚝하게 솟아 있구려”라고 하였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실로 ‘우러러보면 더욱 높게 보인다’는 것이라 할 만하이. 이는 두류산 맨 꼭대기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듯하네. 그대와 내가 저 꼭대기에 우뚝 서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길게 휘파람을 불며 그 즐거움을 한껏 즐기고 그 적의(適意)함을 실컷 맛보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여, 내가 “그러세”라고 하였다.

여기서부터 바위의 형세가 허공에 매달린 듯하여 위로 오르기가 어려웠다. 가파른 벼랑을 부여잡고서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내딛듯 어렵사리 혈암(穴巖)에 닿았다. 으스름한 땅거미가 멀리서 몰려오자 둥근 바위 구멍 사이로 보이던 물체를 더 이상 분변할 수 없었다. 이른반 혈암이란, 길을 막고 서 있는 바위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이 구멍이 없으면 이 길을 가기 어려울 것이다. 지리지(地理誌)에 “야계산(耶溪山)에 우혈(禹穴)이 있고, 도산(塗山)에 지기혈(支祁穴)이 있고, 아미산(峩嵋山)에 구지혈(仇池穴)이 있다”라고 한 것이 이런 류가 이니겠는가? 무슨 굴이 이다지도 기이할까?


여기서부터는 밤길을 걸어서 몇 리를 갔는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 알 수 없었다. 맨 꼭대기에 오르자 매우 좁고 누추한 판잣집이 있었는데, 예전에 본 것과는 전혀 달랐다. 집 안에는 시렁이 있었다. 시렁 위에 성모상(聖母像)이 놓여 있었는데, 곧 석가모니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부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동방으로 1만 8천 리 길을 날아가 두류산 제일봉의 주인이 되고 싶다’라고 하여, 석상을 모셔놓고 천년토록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이분은 공경해야지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껄걸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혹세무민하기에 족하니, 무당들이 몰려드는 것도 당연하겠군”이라고 하였다.

잠시 뒤 그 맷돌 만들던 사람이 과연 밥과 물을 가지고 왔다. 골짜기에선 바람소가 웅웅거리고 허공에선 영뢰(靈籟)가 윙윙거렸다. 판잣집의 벽이 무너지고 부서져 한기가 몸으로 파고들었다. 종들은 모두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나뭇등걸을 주워다 밤새 불을 지피게 하였다. 열어구(列禦寇)의 수레를 몰 수 있다면 또한 춥더라도 좋지 않겠는가. 상제의 궁궐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라 감히 소리 높여 말할 수 없었다. 각자 모피를 깔고 베개에 의지하여 누웠다. 뼈가 서늘하고 혼이 맑아졌다. 전날처럼 정신이 혼몽해져 잠드는 일은 없으리라.


초7일(무술).

흐림. 해가 뜰 때 구름이 짓궂게 방해할까 두려워서 밤중에 일어나 앉아 조용히 기원하였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밖으로 나와 하늘을 우러러 날씨가 어떨지를 점쳤다. 그때 문득 하늘이 한쪽으로 쏠리고 달과 별이 기우는 듯하여, 움찔 물러서며 놀라고 두려운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춘간이 웃으며 말하기를 “검푸른 하늘이 여전히 그대로 있고 위아래 보이는 것이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인데 ‘하늘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함부로 생각힌, 그대 또한 기(杞)나라의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 같구려”라고 하고서, 서로 마주보며 한바탕 웃었다. 그런 뒤에 비로소 하늘과 가까운 지극히 높은 곳에 몸을 두면, 소견이 예전과 달라짐을 알게 되었다.

승려 일원이 급히 다가와 말하기를 “장경성(長庚星)이 반짝이니, 날이 밝아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급히 밖으로 나가 천왕봉 꼭대기에서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너무 이른 시각이어서 온 세상이 어두컴컴하여 상하를 분별할 수 없었다. 시초가 잇는 듯하기도 하고 없는 듯하기도 하여, 이 세상이 아직 열리기 전의 혼돈한 모습 같았다. 온 누리가 닫혀 있고 아득하여 어떤 조짐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뒤 금계성(金雞星)이 새벽을 재촉하자 동방이 바야흐로 열리려하였다. 시초가 있는 듯한 것은, 기운이 쌓여 아무 조짐 없이 고요하다가 서로 의지해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이다. 청탁(淸濁)이 제자리를 잡으면 극(極)이 없는 듯한 가운데 극이 있게 된다. 시초가 잇는 듯하기도 하고 없는 듯하기도 한 상태에서 청탁이 제자리를 잡는 상태에 이르기까지는 성인이 이 자리에 계신다 해도 논할 수 없을 것이니, 우리들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한참 동안 앉아 기다리니 밝은 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붉은 기운이 하늘에 비치자 동방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려 하자 붉은 구름이 만리에 뻗치고 서광이 천 길이나 드리웠다. 해가 불끈 솟아오르니 여섯 마리 용이 떠받들고 나오는 듯하였다. 천오(天吳)는 달아나 숨고 해약(海若)은 깊숙이 숨어버렸다. 자라는 놀라 뛰어오르고 파도는 거세게 솟구쳤다. 해가 하늘에 솟자 온 세상이 환해졌다. 작은 바다의 미세한 티끌이나 터럭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게 되어, 깊숙이 숨어 사악한 짓을 하는 무리들이 그 안에서 농간을 부릴 수 없었다.

내가 오춘간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저 하늘과 물을 아는가? 물이 하늘에 떠 잇는 것인가, 하늘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인가? 하늘 밖에 물이 없고, 물 밖에 하늘이 없는가? 하늘이 회전하지 않고 물은 증감이 없는가? 그대처럼 박식하고 통달한 사람이 아니면 내가 어디서 얻어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오춘간이 말하기를 “내가 망령된 말을 해볼 터이니 그대도 허튼 소리로 들어두게. 하늘의 끝이 물에 잠겨 있는데 하늘은 어찌 쉬지 않고 강건하게 운행하며, 땅의 축이 허공에 서려 있는데 땅은 어찌 만물을 싣고 그 무게를 감당할까? 큰 바다는 넓고 넓어 온 세상을 감싸고 있네. 해와 달이 오가니 황도(黃道)와 적도(赤道)가 그 길이며, 별들은 여기저기 벌여 있으니 12궁(宮)이 그것일세. 한 기운이 무르녹고 엉켜 산과 강이 되었으며, 양의(兩儀)가 처음 나뉘어져 사람들이 마침내 번성하게 되었네. 풀과 나무가 무성하며 사름과 돼지가 뛰오니, 도가 유행하여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없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천지는 하나의 큰 흙덩어리’라고 하겠네. 큰 흙덩어리가 하나의 물 위에 떠 있느넫, 만물이 그 큰 흙덩어리에 매달려 있는 것일세. 하늘이 회전하는 것은 북두성이 주관하고, 물이 불었다 줄었다 하는 것은 미려(尾閭)가 주관하네. 그대는 내 말을 어찌 생각하시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매우 기뻐서 “두 가지를 물었는데 열 가지를 얻어들었으니, 대단하구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기다란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우고, 하늘빛이 점점 낮아졌다. 산 아래를 굽어보니 운기(雲氣)가 자욱하였다. 서둘러 지팡이를 찾아들고서 나는 듯이 산에서 내려왔다. 혈암에 이르기도 전에 봉우리와 골짜기가 구름에 덮여 어두워졌고, 눈이 허공에 가득 날리기 시작하였다. 일행 모두 맨몸으로 그 눈을 다 맞아 옷이 젖어 걸을 수 없었다. 간신히 새로 지은 제석당에 들어갔다. 불을 지피고 옷을 말렸다. 각자 떡 한 조각과 물 한 그릇씩 먹고 누워 날이 맑기를 기다렸다.

오춘간이 삼베옷 입은 두 사람을 만나 물외(物外)의 일을 헤아리며 선취(仙趣)에 대해 토론하였다. 또 그들이 간간이 피리 반주에 맞추어 몇 편의 시를 읊조렸는데, 매우 맑고 빼어났다. 이들의 말은 세인과 전혀 달랐으니 아마도 노오(盧敖)가 약사(若士)를 만난 것이나 혜강(?康)이 왕렬(王烈)을 만난 경우와 같으리라. 이들이 참된 비결을 전해주려 하였지만 오춘간이 속세의 때가 묻어 방을 수 없었으니, 애석하도다.

오후가 되어서야 구름이 조금 걷히고 비도 잠시 그쳤다. 산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햇빛이 구름장 사이로 비추었다. 이리저리 거닐다가 내가 먼저 산을 내려가니 이행이 모두 따라나섰다. 중간에 잠시 하동바위에서 쉬며 물을 마셨다. 백문당에 이르렀는데도 산간의 해가 아직 남아 있었다. 옛 사람이 “높은 곳을 부여잡고 오르기 어렵지만, 낮은 곳은 구릉처럼 가기 쉽다”고 한 말이 참으로 맞구나.

백문당 주인이 거친 밥을 내왔지만 맛있게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아이들이 서리 맞은 과일을 소매 속에 가득 따가지고 와주었다. 이 또한 산행하는 한 가지 즐거움이었다. 저물녘에 군자사로 들어가 묵었다. 청명한 달이 봉우리에 떠올라 넝쿨 뻗은 창가에 환히 비추었다. 마음이 매우 쓸슬하여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8일(가해).

맑음. 아침 일찍 조반을 먹고 길을 나서 다시 용유담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나는 이모를 찾아뵈려 목동(木洞)으로 향하려 하였고, 오춘간 등은 천령(天嶺) 원의 요구로 다시 용유담 가에 모여 놀기로 하였다. 용유담 근처에 이르니 천령군 사람이 “우리 원님께서 산음 원님에게 붙들려 술을 드시고 취해 정생(鄭生) 집에 누워 계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곧 말을 채찍질하여 길을 떠났다.

여기서부터는 맑은 못이 협곡 곳곳에 있었는데 매우 깊어 시퍼렇게 보였다. 평평한 곳은 보면 매우 시퍼렇게 보였고 급류가 흐르는 곳은 흰 물결이 쏟아져내렸다. 길이 매우 험준하여 구불구불 돌기도 하고 산세에 따라 언덕을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마치 잇몸처럼 오목볼록하게 생긴 기이한 바위가 여기저기 서 잇는데, 몇 십 리나 이어져 있었다. 이곳은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내가 동행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외갓집 논밭이 저 산 너머 가까운 곳에 있다네. 매양 띠풀을 뜯어다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늘그막을 보내고 싶었지만, 세상사가 사람을 얽매어 뜻을 품고도 이루지 못한 지 벌써 10년이나 되었네. 이젠 이도 빠지고 머리털도 희어졌으며 세상과 어긋났으니, 나는 세속을 떠나 예전에 계획했던 일을 이루어 물고기∙두꺼비∙사슴 등과 벗이 되어 지내고 싶네. 나를 따를 사람은 누구일까?”라고 하자, 헝허오이 갑자기 말하기를 “내 수레에 기름칠을 하여 그대가 은둔하는 곳으로 따라가도 싶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담(蛇潭) 근처에다 터를 잡아두고 떠났다.

엄천리(嚴川里)의 주막 앞에 이르러, 나 홀로 북쪽 고개에 올라 곧장 목동으로 향했고, 오춘간 등은 고삐를 나란히 하고 최씨의 시냇가 집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 목동에서 만나 낙모연(落帽筵)을 함께 베풀기로 약속하였다. 하룻밤 이별이지만 사람을 울적하게 했다. 저녁에 이모를 찾아 뵙고 그 댁에서 묵었다.


초9일(경자).

맑음. 오춘간 등이 천령∙산음 두 수령에게 붙들려 한나절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이 어찌 힘있는 자에게 벗을 빼앗긴 것이 아니겠는가? 1년 중 이런 아름다운 절기에 나 홀로 우두커니 앉아 적막한 가운데 있자니 즐거운 마음이 전혀 생기질 않았다. 그래서 마을 어른 서너 분과 함께 남쪽 시냇가의 작은 누대 위에 올라 국화를 따다 백료주(白醪酒)에 띄워 마실 따름이었다.

그 술자리에는 강죽년이라는 군자다운 분이 있었다. 그가 한 물가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는 그대의 외할아버지께서 낚시하며 노닐던 곳일세”라고 하였고, 한 누대를 가리키며 말하길 “저곳도 그대의 외할아버지께서 손수 세우신 것일세. 그분이 세상을 떠나신 지 어언 50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물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고 누대도 지난날과 같네그려. 그대가 지금 술을 가지고 여기에 올랐으니 어찌 감흥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이의산의 “10년 동안 저승에서 소식이 없어 중양절날 술통 앞에서 그리는 마음”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는데, 바로 오늘 내 심정을 두고 읊은 듯하였다. 술에 만취하여 집에 돌아와 밤새도록 잠못 이루고 뒤척이노라니, 마치 허공에 붕 떠서 부질없이 발자국소리를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초10일(신축).

맑음. 오춘간 등이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말을 타고 달려왔다. 약속을 어겼다고 내가 책망하자 오춘간이 말하길 “떠나고 머무는 것은 모두 조물주의 뜻에 따를 뿐이니, 수령들이 어찌 우리를 붙잡았겠으며 우리가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그렇다면 오늘 산행도 조물주가 시킨 것인가?”라고 하고서, 마주보며 한바탕 웃었다. 느지막이 우중평의 집으로 가서 조촐한 술자리를 베풀고 하루 종일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광조가 큰 소리를 내며 발을 구르는 등 미친 듯이 사람을 웃겨, 우리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11일(임인).

맑음. 아침밥을 먹은 뒤 이모에게 작별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사기현(沙器峴)을 넘어 팔량원(八良院)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비전(碑殿)으로 들어가 묵었다. 이곳은 산행을 시작할 때 지났던 길이다. 우류산을 돌아보니 벌서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멀리 백무동천(白霧洞天)을 생각해보니 어딘지 아득하기만 했다. 먼지가 날려 얼굴을 때리고대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언덕이 산을 이루고 실개천이 강물을 이루니, 매우 낮은 곳으로 내려왔구나! 밤에 오춘간과 상봉에서 보고 느낀 일을 말하자니, 마치 꿈속에서 하늘에 오르는 듯 황홀하였다.


13일(계묘).

맑음. 늦잠을 잤는데도 피곤하여 일어날 수 없었다. 종이 밥상을 차령 올렸다. 정오쯤에 안신원(安信院) 뒷고개를 넘어, 시냇가 누런 대나무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달빛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 두류산 유람은 이번이 두 번째이고, 상봉에 오른 것도 두 번째였다. 단풍잎을 감상하고 일출을 본 것은 부차적인 일이었을 뿐이다. 시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오춘간과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청허옹과 함께하고, 웃음을 선사한 양광조와 함께한 것이 정말 행운이었다. 이 세 사람은 천하에서 구하려고 해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애춘의 노랫소리와 수개의 아쟁소리와 생이의 피리소리는 늘 보는 흔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만약 물외인으로 하여금 그 소리를 듣게 한다면 우리가 산에서 만난 삼베옷 입은 사람을 흠모했던 것처럼 좋아함이 있을 것이다. 사람 근처에다 터를 잡은 일은 내가 전에 열 번이나 오가면서도 얻지 못했던 것인데 이번에 문득 얻게 되었다. 예전의 유람이 정신만 수고롭게 했을 뿐임을 바야흐로 깨닫게 되었다.

산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은 겨우 열흘이었다. 지나면서 귀로 들을 만하고 눈으로 볼 만한 것을 오춘간이 빠짐없이 모두 묶어서 일록(日錄)을 만들어따. 이를 보는 사람들은 산과 바다의 위대한 경관과 유람의 지극한 즐거움을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군더더기 같은 내 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내가 늙어서 문을 닫고 명상에 잠기는 날, 아이들에게 펼쳐 읽게 하고 안석에 기대어 듣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문을 나서지 않고도 강산이 다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유람록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내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니, 얻은 바가 어찌 많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높은 산과 큰 바다 같은 골짜기와 괴이한 바위 같은 것들은 아무리 종이와 붓이 많더라도 다 기록할 수 없을


**<최석기>님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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