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자료는 함양군에서 함양군 도록을 편찬하기 위한 자료이다.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중에 있으며 일부는 보충하였다.
아직 책이 발간되기 전이며 휴천면에 관하여 자료가 필요하신 분들은 이자료를 참고 하시면 될 것이다.
(김용규)
휴 천 면 (休 川 面)
군의 남동부에 위친한 면. 면적 60.60㎢, 인구 0000명(94년 현재) 면소재지는 목현리이다.
본래 함양군지역으로 휴지면(休止面)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휴지면 11개마을과 엄천면 19개마을 그리고 산청군 서상면의 방곡동을 병합하여 휴지면의 休 자와 엄천면의 川자를 따서 휴천면이라 개칭하였다
하천유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500m이상의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의 서부에 법화산(法華山, 991m)이 있다. 엄천강의 지류인 옥계천이 면의 북부를 동류하고, 엄천강이 중앙을 동류하며 동부유역에 좁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식량작물과 무. 배추. 마늘. 토마토 등이 생산되며, 특히 잎담배가 많이 생산된다.
교통은 거창∼가흥간 지방도가 면의 남부를 지나며, 함양과 연결되는 지방도가 북동부를 지나고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유물.유적으로는 목현리에 구송(九松) 대천리에 법화사(法華寺)와 법화사동탑인(法華寺銅塔印)이 있으며, 금반리에 아기를 낳지 못 하는 여인들이 정성들여 제를 지내면 아기를 낳게 된다고 전해지는 5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休川面 文化財 資料
********** 야 리 부(夜 理 腑)
種 類 : 文化財 資料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금반리
沿 革
김문창 (金文昌 1714∼ 1786)의 자는 태화(太和), 호는 운옹(雲翁)으로 과거시험 초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답안지로 가로 149.5cm x 73.5cm의 장지에 세필로 정교하게 쓰여 있으며, 감독관의 수결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제도 등을 잘 알 수 있는 자료이다.
********** 고대일록 (孤臺日錄 )
種 類 : 冊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목현
沿 革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1556-?)이 지은 책으로 선생이 직접 쓴 것을 엮은 존서본으로 10대손이 보유하고 있다.
선생은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의 손자로 선조조에 학행으로서 동몽교관을 제수받았고, 임진왜란때는 스승인 내암 정인홍(鄭仁弘)을 도와 창의(倡義)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남계서원의 위패를 유림 진경윤(陳慶胤)등과 함께 연화산에 가매안 하였다가 구라로 옮기는 등 위패의 훼손을 예방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중 함양읍을 중심으로 고장을 지키면서 도내에 격문을 전하고 이웃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의거할 것을 촉구하고 의병군의 소집유사로서 계속 의병을 모집하였고 무기와 식량을 확보하여 전선에 보급하는등 그 공로가 지대하였다.
이 책은 4책 54쪽으로 선조25년(1592) 4월 23일부터 광해군 원년(1609년) 10월 7일까지 18년간 임진왜란중 경상우도 지역에서 자신이 체험한 일과 가족간의 신변이야기, 의병들의 활동상황과 왜적들의 동태와 당시 보고 들은 국내 사정들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책이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본 책에 대한 연구를 하여 함양문화원을 통하여 서술하였으며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가 남명집연구 2∼3집에 영인하여 실었다.
임진왜란사와 내암 정인홍 학파, 나아가 남명학파의 연구에 있어 필요한 귀중한 자료이다.
********** 충의공 김문기 영정(忠毅公 金文起 影幀)
種 類 : 影 幀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 임호
沿 革
선생은 조선 세조때 사육신의 단종 복위계획에 연루되어 순절한 문신(文臣) (1399∼1456, 세조2)으로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으로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아버지는 관(觀)이다.
충청도 옥천 출생으로 1426년(세종 8)에 생원시 및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사간원좌헌납, 함길도 도진무를 지내고 병조참의를 거쳐 함길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세조로부터 온성읍성의 축성 유시를 받아 수행한 공으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1456년 박팽년,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사육신(死六臣)과 같이 역적으로 몰려 순절하였다..
1731년(영조7)에 복관되고 1757년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문적을 널리 고증하게 하여 결정한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삼중신(三重臣= 閔伸, 趙克寬, 金文起)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성삼문등은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으로 분류하여야 한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가묘를 마련하여 봉안하였는바(死七臣이라 한다) 학자들 사이에 찬반 양론이 있다.
경북 김천시 지례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5세손 김현(金峴)이 안의 등지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며, 이 영정은 고종의 어진을 비롯하여 흥선대원군, 최익현, 황현, 최치원등의 초상화를 그린 채용신이 그렸다.
참고문헌 : 세종.문종.단종.세조.숙종.영조.정조실록,
秋江集, 死六臣訂正論의 허점(이재호) 성씨의 고향(중앙일보사),
한국사대사전, 함양군지
**********고려대장군 여림청지묘
(高麗大將軍 呂林淸之墓)
種 類 : 記 念 物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 임호
沿 革
고려조 여진족 정벌시 순국한 대장군 여림청(呂林淸)의 묘로서 함양여씨 묘표음기(墓表陰記)는 삼송(三宋)의 한사람인 동춘당(同春當) 송준길(宋俊吉 1606∼1672)이 현종 6년 (1665)에 지었다.
함양박씨(시조 朴實), 함양여씨(呂林淸), 함양오씨(吳光輝)는 삼동서지간으로 토성이다
막내동서인 오광휘상장군은 풍수를 잘보며 화장산 10리안에 묻힐 삼동서의 묘자리를 살아 생전에 잡아 묘지를 썼다.
나라에서 임야 10여 정보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였고 묘제는 군에서 지내 오다가 일제때부터 중단되고 문중에서 묘제를 올리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장군의 묘가 오래되어 백골이 드러나게 되자 밤에 함양군수를
찾아왔으나 매번 사망을 하여 아무도 함양군수로 부임하지 않으려 함에 따라 전라감사를 지낸 이서구 군수가 부임하여 그 연유를 조사하게 되었다.
야밤에 장군이 나타났으나 이군수는 졸도하지 않자 장군이 반가워하며 묘지를
정비해 달라고 하니 군수가 약속하였고 장군은 삽살개를 보내 안내 해주겠다고 하였다
이튿날 삽살개의 안내로 현장에 도착하니 삽살개는 현장에서 바로 죽었다.
묘지를 정비한 연후에 삽살개는 돌무덤을 하였다.
산두마을 앞 도로변에 하마비가 있어 장군에게 절을 하도록 되어있으나
지금은 없다.
********** 강개암선생 지묘 (姜介庵先生 之墓)
種 類 : 記 念 物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산 29번지
沿 革
강익 (姜翼 1523∼1567) 선생은 조선 명종때의 학자로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庵),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2년 고을내의 30여명의 선비들과 함께 남계서원의 건립을 발기하고 徐九淵, 尹確, 金于弘의 3대에 걸친 함양군수의 지원과 각계 각층의 지원을 받아 10년에 걸친 공기끝에 완공하였으며 사액상소를 올려 1566년에 사액을 받았다.
명종 21년(1566년)에 유생(儒生) 33인의 소두(疏頭)로 鄭汝昌의 신원복원에 앞장섰으며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선조초에 천거를 받아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다.
저서로 시조3수, 한시 22수, 서간6편, 기문 2편으로 된 "개암문집"을 남겼으며,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참고자료 : 명종실록, 함양군지, 국조인물고, 천령지
********** 춘당 박공지묘 (春塘 朴公之墓)
種 類 : 記念物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목현
沿 革
춘당(春塘) 박맹지(朴孟智)는 단종 2년(1454)에 문과 급제, 삼사현감(三嘉縣監) 승문원 교리 등을 역임하고 함양읍 백천리 한징기 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성종 23년(1492)에 영면하였으며 수동면 구천서원에 봉향되었다.
비문은 효종 10(1659)에 6세손 박이혁(朴以爀)이 지었고, 비석은 1978년에 다시 세웠다.
********** 구 룡 정(九 龍 亭)
種 類 : 亭 子
時 代 : 現 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沿 革
지리산 북부의 명승지인 용유담(龍遊潭) 위에 부산과 함양의 계원(契員)들이 수계하여 이 지역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용유담에 용 아홉 마리가 살았다는 전설에서 정자 이름을 짓고 선현들의 명성을 계속 이어가자는 뜻에서 1908년 건립하였다.
1912년에 강기대(姜起大)가 기문을 지었다.
********** 화 한 정(華 漢 亭)
種 類 : 亭 子
時 代 : 現 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정
沿 革
한말에 중추원 의관을 지낸 화산(華山) 강주룡(姜周龍)과 그 아우 한계(漢溪) 강주백(姜周伯) 형제가 소요하던 조은대(釣隱臺) 근처에 한계의 아들 강현종(姜玹種)이 1947년에 정자를 세우고 호의 첫 글자들을 따서 화한정이라 이름하였다.
기문은 하기현(河琪鉉)이 지었다.
********** 효자 신영언지려(孝子 申永彦之閭)
種 類 : 旌 閭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전
沿 革
효자 신영언은 신택재(申宅載)의 후손으로 본관은 평산이다.
모친상에 시묘할 때 범이 와서 지켰다. 후에 집에 불이나 와병중인 부친에게 불길이 미치게 되자 머리를 두드리면서 불을 향해 통곡하며 하늘에 비니, 바람이 되불어 불이 저절로 꺼졌다.
고종 28년(1891)에 동몽교관에 추증하고 정려하였다. 성대(惺臺) 윤시영(尹始榮)이 신효자 정려서를 지었다.
********** 효자 정현의지문(孝子 鄭鉉毅之門)
種 類 : 旌 閭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 산두
沿 革
효자 부암(敷菴) 정현의는 20세 때 모친상에 3년간 시묘하면서 식사는 미음과 소금만으로 하였으며, 부인과는 3년간 만나지 않았다.
순조 12년(1812)에 동몽교관을 추증하고 철종 5년(1854)에 정려를 명하고, 철종 6년에 적장손의 집에 정문을 설치하였다.
이듬해 철종 7년(1856)에 호조참판을 지낸 지곡면 감모재(感慕齋)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정려기를 지었다.
부암은 산청 사람인데 그 후손이 산청군 금서면 아촌 마을에 있던 정려를 고종 15년(1878)에 함양으로 이전하였다.
********** 전주이씨 효열비(全州李氏 孝烈碑)
種 類 : 碑 石
時 代 : 現 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 임호
沿 革
이씨는 경주김씨 송계(松溪) 김필룡(金弼龍)의 처이다.
남편의 병에 임하여 집이 가난한지라 머리카락을 잘라 약을 사고 옷을 잡혀 음식을 구하여 효양을 하였다.
병세의 차도가 없어 칠성등(七星燈)을 걸어 놓고 북극성에 매일 밤낮 기도하였으며, 헌종 6년(1840)에 남편이 위독하자 단지하여 3년을 더 살게하였다.
헌종 8년 (1842)에 남편이 죽자 한날 한시에 상심으로 따라 죽었다.
향중천장문(鄕中薦奬文)과 유장(儒狀)이 있다
김필룡의 5대손 김신수(金信秀)가 자기 스승 정도현(鄭道鉉)에게 비문을 받아 1964년에 비를 세웠다.
********** 박사지처 최씨의열유적비
(朴師智妻 崔氏義烈遺蹟碑)
種 類 : 閭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목현
沿 革
처사 박공은 이름이 사지(師智)이고 본관은 죽산이다.
숙종 26년(1700) 경진에 태어나 영조 4년(1728) 정희량의 난에 29세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거창까지 추격하였고, 난이 평정된 뒤 공신 녹공도 사양하였다.
영조 8년(1732) 임자에 요절하였다.
부인 경주최씨는 최응숭(崔應嵩)의 딸로 남편과 동갑인데 남편의 병에 단지하였고,
남편의 탈상 후 자결하니 밤중에 범이 와 시신을 물어다 남편의 묘소 옆에
안치하였다.
1947년에 배환각(裵煥珏)이 비문을 짓고 후손 박희문(朴熙文)이 썼다.
********** 금재선생비 (琴齋先生碑)
種 類 : 記念物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산 29번지
沿 革
姜漢(1454 단종 2 ∼ ? ) 선생은 조선 성종때의 명필로서 자는 종지(宗之), 호는 금재(琴齋), 본관은 진주이다.
아버지 강이경(姜利敬)이 남이(南怡)장군과 함께 무고에 의하여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되자 강보에 쌓인 채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16세에 다른 사람의 상소문을 대필해 주었는바 성종께서 친견하시고 종이와 붓을 주며 글을 써라 하심에 눈물을 흘리며 글을 썼다.
성종이 연유를 물은즉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신원 복원되었다.
1496년 사마시에 올라 고산, 지례현감을 지내던중 모친상으로 낙향하였으며
사화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청 금서의 문필봉에서
여생을 보냈다.
비문 『通訓大夫行 高山縣監 琴齊 姜先生之墓
참고자료 : 영남인물고, 한국사 대사전, 함양군지
********** 법 화 사 (法華寺)
種 類 : 寺 刹
時 代 : 신라시대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沿 革
883년(헌강왕) 신라 헌강왕이 결언선사(抉言禪師)로 하여금 남호리에 엄천사를 건립하게 하였는바 그 부속암자로 범화암을 지은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종10년(1420)에 여원대사(如遠大師)가 아래쪽으로 이건하면서 안양사(安養寺)라 부르다가 1675년 학묵대사(學默大師)가 옛 유지에 새로이 중건하고 다시 법화사로 개명하였다.
영조31년(1755)에 기암한성(機巖澣惺)대사가 중수하고 1874년(고종11)에 화악취훈(華嶽聚訓)대사가 나은익환(懶隱翼幻)대사와 더불어 중창하였다.
1950년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방치된 것을
사간운곡(사간운곡), 수갑화상(수갑화상)과 정신행자(정신행자) 해산(해산) 이강신(이강신)이 불자들과 힘을 모아 암자를 짓고 개금불사를 하였다.
1986년 부산 금정산의 안국사 주지 지명화상(知明和尙)이 수갑대사로부터 후사를 이어받아 1989년 법당 건립을 시작으로 크게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엄천사흥폐사적지(嚴川寺興廢事蹟誌)가 있다
1735년(영조11) 산청의 왕산사(王山寺)에서 이곳으로 이적한 종(높이66cm)이 있으며 엄천사의 초석인탑(礎石印塔)이 있다.
마적사의 마적도사가 신도간의 어음 거래에 사용하였다고도 하고 계율을 받을 때 사용했다고도 하는 길이 34.5cm, 밑변 크기 10cm의 동탑인(銅塔印)이 전하는데
1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문 수 사(文 殊 寺)
種 類 : 寺 刹
時 代 : 現 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전
沿 革
문수사는 원래 신라시대 마적조사가 건립한 마적사의 부속 암자였으나
마적사가 폐사된 이후 엄천사 산하의 암자로 소속되었다가 엄천사가 폐사되면서 삼존불은 밀양 표충사에서 모셔갔고 본존불은 문수사 법당에 모셨다.
흥폐를 거듭하다가 한국 전쟁 시 소실되었다.
사지로 있던 곳을 영원사에 있던 하담경률(荷潭瓊律) 대사가 1968년부터 중창하였다. 근간 능현(能玄)스님이 대웅전, 문수전, 종각, 요사채등을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찰 내에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cm정도의 금동여래입상과
조성 년대가 불분명한 목조여래좌상이 있다.
숙종32년(1706)에 견성암(見性庵)에서 옮겨 온 동종(銅鍾)이 있다.
절 입구에는 골짜기에서 출토된 화양당(花陽堂)의 부도 1기와 문수사 중창사적비가 있다.
********** 마적사지(馬跡寺址)
種 類 : 寺 址
時 代 : 新羅時代 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전
沿 革
신라 무열왕 기미년(659년)에 마적도사가 마적에 기거하면서 창건하였던 사찰로서 용유담과 더불어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는 곳이나 창건년대 및 없어진 시기등이 불분명하다.
다만 전해 내려오는바에 의하면 송전의 단군을 모신 천진전 부근으로 추정되며
그 인근에 사찰의 흔적이 있었던 유물이 보인다.
********** 엄천사지(嚴川寺址)
種 類 : 寺 址
時 代 : 新羅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동호마을
沿 革
신라 헌강왕 9년(883년) 화엄사에 있는 결언선사를 불러 부왕인 경문왕을 위하여 엄천사를 건립하게 하였다.
엄천사라 한 연유는 계율을 엄하게 지켜 흐르는 냇물같이 많은 복을 받으라는
뜻이다
왕이 행재하여 경문왕을 봉안하고 결언선사를 사라국사(娑羅國師)라 칭하고 주지를 삼았다.
왕비 김씨가 죽은 아우를 위하여 곡식 천섬을 기탁하고 최치원으로 하여금 발원문을 짓게 하였다
고려왕조가 개국됨에 따라 엄천사는 퇴락하였으나 보수하지 못하고 있던중 1128년 (인종6년) 성선대사(性宣大師)가 이곳에 중창하여 유지하였으나 임진왜란시 소실되었다.
1687년(숙종13)에 안양사(安養寺:지금의 문정리 법화사) 승려 인욱(印旭)과 혜문(惠文) 등이 안양사가 험준한 곳에 있어 왕래가 어려우므로 엄천사 터로 절을 옮기자고 대중에게 동의를 얻고 군수와 관찰사에게 진정하여 승낙을 받아 수백 명의 승려들이 재물을 모으고 공역을 담당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 땅은 향교의 수세지(收稅地)로 편입되어 있어 절을 지을 수 없는 형편이라 세월이 천연되었다.
1690년(숙종16) 봄에 동의를 얻어 죽계당(竹溪堂) 승현(僧絢) 대사가 지휘하여 중건하였다. 옛 주초를 근거로 18동 100칸의 건물을 지었다.
1692년 왕명이 내려 4결(結)이 면세전으로 되었다.
승민(勝敏)이 사적을 지어달라고 청하여 1693년(숙종19)에 무가암(無可菴)의 탄부(坦夫)가 사적기를 지었다.
1709년(숙종35)에 시와 서문을 지었다.
조선후기에 폐사가 되었는데 그 시기와 연유를 알 수가 없다.
신라 시대에 하동, 구례, 함양 등지에 김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나무를 심어 전래되는 것을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함양군수(1471-1476)로 부임한 뒤 새로 차밭(茶園)을 조성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기념하는 사적비가 마을 앞에 서 있다.
********** 용 유 담(龍 遊 潭)
種 類 : 名 勝 地
時 代 : 現 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沿 革
함양의 지리산 북쪽 명승지로서 엄천강(嚴川江)의 상류에 있다.
강 동편에는 구름다리가 있다. 하늘이 만든 방과 같은 수많은 바위와 괴석은 기이하고 반석은 요철 모양으로 절묘하여 장관이다.
용유담에는 나귀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돌이 있고, 마적(馬蹟) 도사와 아홉 마리 용에 얽힌 전설이 있다.
도로변에는 구룡정이 있는데 아홉 마리의 용을 기리기 위하여 구룡정을 세웠다.
바위에 용유담, 용담입문(龍潭入門) 용담형승(龍潭形勝)등의 각자가 있다.
1489년 김일손의 <속두류록>, 1586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1643년 박장원의 <지리산기>,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 1790년 이동항의 <방장유록>에서 용유담의 기기묘묘함과 아름다운 절경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를 해 두고 있다.
용유담 건너편 아래쪽의 바위에
文獻公 一두 鄭先生 ( 문헌공 일두 정선생 (정여창 1450~1504) )
文愍公 濯纓 金先生 (문민공 탁영 김선생 (김일손. 1464~1498) )
文貞公 南冥 曺先生 ( 문정공 남명 조선생 (조 식 . 1501~1572) )
寒 사 姜先生 ( 한 사 강 선생 (강대수. 1591~1658) )란 각자가 있어 용유담을 다녀 간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
********** 함양 독바위
□ 種 類 : 名 勝 地
□ 時 代 : 朝鮮時代
□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
□ 沿 革
지리산 해발 1200M 지대에 위치한 함양독바위는 지리산에서 진주독바위와 쌍벽을 이루는 명승지(名勝地)이며 1472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쓴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의하면 그가 이곳을 거쳐가면서 함양독바위를
독녀암 (獨女菴)이라 표현하였으며 함양독바위의 아래에는 노장 마을 터와 엄천사의 부속암자로 추정되는 지장사(地藏寺) 터가 현재에도 남아 있으며, 독바위 주변에는 유두류록에 언급된 환희대(歡喜臺)라는 망바위와 함께 선열암(先涅菴), 신열암(新涅菴), 고열암(古涅菴), 의론대(議論臺)등의 암자터가 남아 있다.
또 함양독바위의 아래 송대 마을 방향으로 마지막 빨치산의 은둔지로 유명한 선녀굴이 함께 있으며 금낭굴, 유슬이 굴, 박쥐굴, 상대굴등도 산재해 있다.
**********부처바위
□ 種 類 : 名 勝 地
□ 時 代 : 朝鮮時代
□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대
□ 沿 革
함양군 휴천면 문정의 견불 마을 유래와 직결되어지는 부처 바위는 휴천면 송전리 송대 마을 뒷산의 지리산 중턱에 위치한 부처의 모습을 한 부처 바위가 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지리산 유람록인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이곳을 언급하기를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라고 표현을 할 정도로 예부터 관심의 대상이기도 한데,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에서 가장 잘 보이며, 이곳을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라는 이름에서 지금은 상내봉, 부처바위라고 불려지고 있다.
********** 와룡대와 유적비(臥龍臺와 遺蹟碑)
種 類 : 名 勝 地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沿 革
지리산 북쪽 법화산(法華山) 남쪽에 큰 바위가 있어 모양이 용이 서린 것같고 바위틈에는 반송이 있으며, 바위 위는 평평하여 수백명이 앉을 수 있다.
고종 광무 10년(1906)에 무산(戊山) 강신영(姜愼永 1840∼?)이 와룡대라고 명명하고 친구 7인과 해마다 계모임을 가졌다. 원래 이 일대는 일두 정여창과 탁영 김일손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이곳을 지나며 살만한 곳(可居)이라고 하여 가거동(可居洞)으로 불리었다.
석대(石臺)위에는 1985년에 8인의 한 후손인 산청향교 전교 김희소(金熙韶)가 세운 팔공지와룡대수계장구유적비 (八公之臥龍臺修契杖龜遺蹟碑)가 서 있고, 그 아래 바위면에는 1906년 4월에 새긴 8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한 오 대(漢 熬 臺)
種 類 : 名 勝 地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沿 革
세종의 열두째 왕자로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근처 새우섬에 귀양와 살던 한남군(漢南君) 이어(李於, 1429∼1459)가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올라 소요하던 석대(石臺)이다.
한오대(漢鰲臺), 이한남군 장구소(李漢南君杖 所)란 각자가 있다.
강정희(姜正熙) 강계형(姜桂馨)등의 제명(題名)도 있다.
*********** 한남군 적거지 새우섬(漢南君 謫居地)
種 類 : 記 念 物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한남마을
沿 革
한남군 이어(李於, 1429∼1459)는 세종의 열두째 왕자로서 혜빈양씨의 장남이다.
수양대군과 맞서다가 1455년 단종의 왕위 양위시 母 혜빈양씨, 동생들과 함께 화를 입고 금산으로 유배된 이후 아산, 양지를 거쳐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사육신과 함께 처형될 형편이었으나 세조의 배려로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가산적몰, 감시 강화, 종친록 삭제, 태실훼철을 당하였으며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상왕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위리안치(상통금지,
음식10일 1회, 출입문봉쇄) 되었다가 1459년 순절하였다.
이 새우섬은 냇물이 두갈래로 흐르면서 작은 섬의 형태를 이루엇는데 그 모습이새우같이 생겼다하여 새우섬이라 하였다.
지방 유림들이 한남군의 사당1칸과 한오정(漢鰲亭)을 짓고 향사를 올리다가 3칸 으로 확장하였으나 1936년 병자년 수해로 유실되었다.
이곳의 마을 이름은 한남군을 기념하여 한남부락이라고 한다.
*********운암사지 석불(雲岩寺址 石佛)
種 類 :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 운암
沿 革
약 1,300년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관영다원 조성지(官營茶園 造成地)
種 類 : 記 念 物
時 代 : 朝鮮時代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동호
沿 革
1471년 함양군수 부임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차가 생산되지 않는 이 지역에서 나라에 차세(茶稅)를 바치기 위하여 전라도까지 가서 쌀 한말에 차 한홉을 교환하여 백성들이 과중한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삼국사기에 당나라에서 차나무를 가져와 지리산 언저리에 심게하였다는 구절을 읽고 부로들을 만날 때마다 탐문하여 엄천사 북쪽의 대나무 숲에서 몇그 루의 차나무를 발견하고 그 땅에 차나무를 심고 가꾸도록 하고 관청에서 그 땅을 사 들여 차밭을 조성하였다.
몇 년 후 나라에 바칠 정도의수확을 거두게 되었으며
1998년 함양군에서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마을 앞 도로변에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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