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 선생의 유 두류록 번역본을 읽어 보면 지리산 등정을 하면서 김종직 선생과 동행을 했던 사람은
*유극기
함양 병곡 사람으로 극기는 자이며 이름은 호인(兪好仁)이고 당대의 뛰어난 시인이었다.
*임정숙
정숙은 자이며 이름은 임대동(林大仝)이다. 현 휴천면 목현 사람으로 이후 김일손의 지리산 기행에도 동행을 했다.
*한백원
백원은 자이고 이름은 韓仁孝이다.
*조태허
태허는 그의 자이며 이름은 조위 曺偉이다.함양군수를 지내고 성균관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승려 해공
마천면 덕전리에 있었던 덕봉사의 승려로 추정됨.
*법종
지장사 근처에 있었던 묘정암 승려로 추정됨,
*아전 옥곤과 용상, 그리고 노비들 몇 명. (자료: 가객님의 신유두류록)
이 됩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인물중 유극기(유호인)에 대해서 유두류록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참고가 될까 싶어서 글을 올려 봅니다.
조선시대 제 9대 성종임금이 직접 지은 시조 한편이 해동가요에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을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시렴 보듸 갈다 아니가든 못할소냐
무단(無端)히 네 슬터냐 남의 말을 드럿는냐
그려도 하 아달고야 가는 뜻을 닐러라
(있으려무나, 부디(꼭) 가겠느냐? 아니 가지는 못하겠느냐?
공연히 (내가) 싫어졌느냐? 남의 권하는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오히려) 너무 애타는구나. 가는 뜻이나 분명히 말해 보려무나.)
이 시조는 조선 성종 때 유호인(兪好仁)이라는 신하가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사임하고 내려가게 되자, 임금(성종)이 여러 번 만류하다가 할 수 없이 친히 주연을 베풀어 술을 권하면서 읊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성종이 신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왕과 신하의 따뜻한 신뢰감이 담겨 있는 인간 관계를 보는 것 같은 정겨움이 담겨 있는 작품이지요.
조선 초기의 문장가이며 정치가인 선생은 수동면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함양읍 상림 위에서 살았고 호는 뇌계, 자는 극기이며 유음 의 아들로 본관은 기계입니다.
선생은 학문에 능통하여 부모에게는 지극한 효도를 다했고 위로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여 충효의 표본으로 삼는 인물이며 위대한 학문의 힘으로 조선조의 손꼽히는 문장가중의 한사람입니다.
17세에 생원. 진사시험에 모두 합격하는 수재였으며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겸한 학문을 연마하여 문과에 급제하였고 홍문관 교리로서 호당에서 독서를 하며 학문을 익혔습니다.
어버이 봉양을 위해 주로 외직을 택했으며 집안이 청빈하여 죽었을때에는 집안에 가진것이 없어 왕이 하사하신 예물로 장례식을 치렀고 후임군수 어득강이 유고를 출간 해주고 묘비를 세웠습니다.
충효청검(忠孝淸儉)하고 시문이 고고하며 필력이 있어 당대의 3절이라 했기에 후세사람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고 있으며 숙종15년(1689)에 남계서원에 배향되기도 했습니다.
유호인 선생과 성종임금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는데
(자료 : 함양군 홈페이지 ) 함양군 홈페이지의 글을 그대로 복사해서 올려 봅니다.
함양읍 상림을 지나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함양읍과 병곡면의 경계지점에 조그마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도덕바위라 한다. 이 바위는 뇌계 유호인 선생이 즐겨 다니던 낚시터로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선생이 아직 벼슬길에 나서기 전의 일이다. 어느 늦은 봄날 긴긴 해가 저물어 갈 때에 강물에 드리우고 있던 낚싯대가 별안간 꺽일 듯이 힘차게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가까스로 낚시를 들어 올려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두자가 넘는 큰 잉어가 낚시에 걸려 퍼득이고 있었다.
석양을 받아 번쩍거리는 기막힌 큰 잉어를 본 선생은 너무나 기뻤다.
“이렇게 좋은 생선을 내 어찌 감히 사사로이 먹을 수 있으랴, 상감께 진상을 해야겠다.” 하고 언덕에서 띠풀을 뽑아 조그마한 망태기를 만들어 고기를 넣어 짊어지고 서울로 향했다.
그로부터 시일이 얼마나 지났는지 여러날이 흘러간 어느날 노량진 나루터에 저녁 연기가 엉길 무렵이었다. 어떤 주점에 띠 삼태기를 걸머진 채 하룻밤을 자고 가기를 청하는 허술한 시골 나그네가 하나 나타났다.
유호인선생이 도덕바위에서 잉어를 낚은 그 날로부터 보름 동안을 걸어서 한양으로 온 것이다.
상감을 뵈옵고 잉어를 드리는 것이 유일한 목적일 뿐 그 사이 보름동안 망태기 속에 들어있는 잉어가 살았는지 썩었는지 생각조차 해 볼 겨를이 없었다.
저녁을 먹은 후 백운산 기슭 후미진 산촌에서 성장한 백면 선생의 눈에 비치는 서울의 풍경은 황홀하고 신기할 뿐 무엇으로 형용할 수 없는 감회가 있을 뿐이다.
대추나무 문턱이라는 남대문을 들어서서 한참 동안 인파에 쌓여 정신없이 구경을 하였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경 소리가 나자 부랴부랴 주막 집을 찾아 헤매었으나 어디가 어딘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추울 때는 아니나 어느 구석에서 하룻밤 더 새울 것이 문제여서 마땅한 장소를 찾아 황망히 쏘다니고 있을 때 였다.
“밤이 깊었는데 웬 사람이 이렇게 헤매고 있소?”
하고 침착한 어조로 묻는이가 있었다. 선생이 놀라 쳐다보니 남달리 키가 크고 품격이 높아보이는 중년 선비가 옆에서 굽어보고 있지 않는가,
“예, 나는 경상도 함양지방에 사는 유호인이라는 사람으로 주막집을 잃고 찾는 중이오. 댁은 뉘시오?”
“나는 서울 북촌에 사는 이교리라는 사람이오,”
“서울 사람이 밤늦게 어찌 쏘다니시오.”
“나는 사람을 만나러 나왔다가 늦었소,”
이렇게 인사를 시작한 후 함양에서 잉어를 가지고 서울까지 온 경과에서 오늘 밤 서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그 이교리라는 사람이 바로 잉어를 드리려고 천신만고 천리길을 찾아온 상감인 성종대왕이었음을 유호인이 알 리가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이교리는 자신의 괴로움을 잊고 임금을 사랑하는 선생의 지극한 충성을 몇 번이나 감탄하면서 짐짓 시치미를 떼고 말하였다.
“그 주인집의 주소 성명을 모르고 오늘밤에 찾아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소, 내 집은 누추하나 그다지 협소하지 않으니 같이 가서 하룻밤을 쉬는 게 어떠 하오?”하고 묻자 선생은
“그도 무방하지만 초면에 미안하구려.”하면서 따라 나섰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교리 집이라는 대궐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어둠속에서 어마어마한 궁궐의 구조를 보고 놀랐다.
“아니, 노형! 노형의 집이 너무 으리으리 하구려!”
“뭐, 서울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이만한 집은 다 갖고 있소,”
서울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을 뿐 이 집이 창덕궁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밤 늦도록 나인을 물리친 왕의 침전에는 방의 환경이 너무 으리으리하여 질겁하도록 놀랐다. 이교리가 권하는 술잔을 받아 든 유선생은 갑자기 불쾌한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여보, 이교리, 노형이 상감마마 덕택으로 벼슬깨나 한다고 왜 이렇게 사치스런 생활을 한단 말이오? 이렇다고야 어찌 임금이 편하실 것이며, 백성이 잘 살 수 있겠소? 노형같은 미관말직의 생활이 이러하니 대신들은 말할 것도 없겠소, 위로 왕을 기만하고 아래로 백성을 착취하니 참으로 한심하구료,”
이렇게 꾸짖고는 옥잔을 내동댕이치며 유호인 선생은 자리를 차고 일어서려고 하였다.
왕은 등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자극을 느끼면서 곧장 사과를 하고 만류하여 술을 권하였다.
선생은 거나하게 취했다.
“여보게 이교리 우리 나이가 비슷하니 친구로 사귀는게 어떨가?”
왕은 어이가 없었다. 유사이래 왕에게 벗을 청하는 사람은 없었다. 왕은 혼자 쓴 웃음을 웃으면서도 왕가의 법도를 잠깐이나마 벗어나 모든 굴레를 벗고 싶었다. 적나라한 인간 그대로의 시골 유생과 천진난만하고 솔직한 마음으로 대하고 싶었다.
“거 좋은 말일세, 그래야 정이 통하거든... 자네는 유생이라 하지만 실상 양반을 따지면 나만 못하단 말이야,”
“전주 이씨야 뭐 대단한가,”
“그건 그렇고 자네 서울 온 김에 뭐 벼슬 하나 해보지 안겠나? 자네 같은 사람은 나라와 백성에게 도움이 많을 것 같아, 뜻만 있으면 이번에 한 번 힘써보지.”
“아니 진사하기도 몇 십년이 걸리는데 벼슬이 그리 쉬운 줄 아나? 나는 말썽 많은 벼슬보다 고향에 가서 글이나 읽고 고기나 낚는 것이 마음 편할 것같네,”
이럭저럭 왕과 선생은 숱한 대화도 끝나고 같이 잠이 들었다. 곤하게 실컷 자고 날이 밝아 선생이 잠을 깨보니 교리는 보이지 않고 낯선 여인이 공손한 태도로
“마마께옵서는 다른 손님 뵈러 잠깐 나가셨는데 곧 돌아오실 것이오니 그대로 기다려 주시옵소서,”하고 나갔다.
밝은 날 보는 주위의 분위기는 아무래도 이상하였다. 이상한 옷차림에 특수한 말씨를 쓰는 여인들이 오고가고... 선생은 창 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감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문무백관들이 조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젯밤의 일은 꿈같은 일이다. 큰 죄를 지은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조회를 마치고 돌아오신 상감께 머리를 조아리며 백배 사죄하였다.
덕성 높은 성종대왕은 선생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금과 옥이 보배가 아니라 어진 신하가 보배야.”
하고 은근히 말을 보냈으나 선생은 너무나 황송하였다.
“해와 달이 밝은 것이 아니라, 상감마마께서 밝사옵니다.”
하고 봉답하였다.
왕과 선생은 군신의 의를 초월하여 붕우의 정의를 변치 않은 채 지냈었다. 그 뒤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대왕께서 친히 선생의 손을 잡고 술을 권하면서
“있으렴 부디 같이,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네 싫더냐.
누구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애닯구나 가는 뜻을 일러라.”
하는 노래를 불러 석별의 정을 토로하면서 못내 섭섭해 하신 것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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