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향자료

[스크랩] 함양 군자사/이덕무

배꼽마당 2012. 12. 4. 21:40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죽당섭필 하(寒竹堂涉筆下)
 
*군자사(君子寺)

계묘년(정조 7, 1783)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天嶺 경남 함양(咸陽)의 옛이름)의 남쪽 50여 리에 지리산(智異山)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아래 큰 시냇가에

이 절이 있다. 진(陳) 나라 대건(大建 선제(宣帝)의 연호) 10년(578) 무술,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이 즉위하기 전에

왕위를 피해 이곳에 있을 때 여기에서 태자를 낳았고 환도(還都)하여서는 이곳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군자사라 한 것이다. 그후로 거듭 난리를 만나 흥폐(興廢)를 거듭하다가 고려(高麗) 경원(慶元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4년(1198) 무오에 불일국사(佛日國師)가 이 산 위에 있는 무주암(無住庵)에 와 머물면서 내관(內觀)에 정진(精進)하였다.


얼마 후 그가 승평선사(昇平禪社)로 돌아갈 때 이 산 아래를 지나다가 이 절터를 보고 절을 지으려다가 유감스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사법(嗣法) 제자인 진각국사(眞覺國師)에게 명하기를 '나의 뜻을 잘 이어받아 그곳에

가서 절을 지으라.' 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그 영수(領袖)로 하여금 먼저 불당을 새로 짓고 점차로 승사(僧舍)를 완성하게 한 다음 대중에게 고하

기를 '절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내가 감히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하고 그의 문제(門弟)인 신담(信談)을 시켜 이

곳을 주관하게 하고 금대암(金臺庵)에 물러가 있다가 다시 단속사(斷俗寺)로 옮겨갔다.


그후 세상이 많이 바뀌면서 이 절은 또다시 흥폐를 거듭하다가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4년(충숙왕 4, 1317)

정사에 혜통화상(慧通和尙)이 이 절에 와서 절을 크게 수리하고 증축하였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도이(島夷 일본을 말한다)의 침략을 거치면서 이 절 또한 불에 타서 파괴

되었다. 홍무(洪武) 37년 갑신에 천태(天台)의 영수(領袖) 행호 대선사(行呼大禪師)가 새로 크게 확장하므로 옛 규모

보다 더 커져서 상실(像室)과 경대(經臺) 등 모두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19년(숙종 6, 1680) 경신에 청신사(淸信士) 순일 운석(淳一韻釋)이 옛 누(樓)를

고쳐 새롭게 하고 신관도인(信寬道人)이 기와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단청은 올리지 못했다가 갑자년(1684)

봄에 통정(通政) 태감법사(太鑑法師)가 유악(幼堊)을 칠하였다.


강희(康熙) 23년(1684)에 방호(方壺)의 필추(苾芻 비구(比丘)를 말한다) 형곡 복환(荊谷復還)이 쓰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원문에 '自爾厥●' 라고 한 것의 '●' 자는 '后' 자인 듯한데 이 글에 '●'로 썼으니 생각건대, '后'자가 비록 '後'자와

통용되기는 하나 아마도 후왕(后王)의 후(后)자를 혐의쩍게 생각하여 고의로 '口'를 빼고 '●'로 쓴 것인가 보다.

이 절은 현재 퇴폐(頹廢)하여 단지 비구승(比丘僧) 10여 명이 있을 뿐이다.


[주D-001]내관(內觀) : 불교 용어. 바깥 경계를 떠나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기를 관찰하는 공부를 말한다.
[주D-002]홍무(洪武) 37년 갑신 : 홍무는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로서 31년으로 끝나고 37년은 없다. 갑신년은

태조 사후 6년째가 되는 명 성조(明成祖) 영락(永樂) 2년(1404)에 해당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자료에서]

출처 : 지리산 산길따라
글쓴이 : 두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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