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구사 사적기
강희康熙(청나라 제 4대 황제, 1654~1722) 기원 55년(서기 1716년) 병신년 칠월 그믐
월화月華 탄천坦天이 서술
지리산에 들어와 몸이 깃들 곳을 눈으로 상량하던 중, 오도치悟道峙에 올라 남짝을 바라보니 산 한자락이
남쪽으로 뻗어 엎드린 자세가 마치 신령한 거북이가 부도를 등에 지고 하늘로 오르며아래 세상에 내려가기를
재촉하는 것 같은지라 백랍같이 빼어난 계곡을 상역학相歷學(=풍수지리의 하나로 추정)으로 저울질하니
산이 네 열로 감추어 있은 즉, 악새(=신령스러운 새의 이름)가 높이 솟아 나아가고 구름과 물이
차례로 여러 둘레인 즉 올챙이가 허리를 숨기는 바위로다. 푸른 납자가 거할 곳으로 황건(?)의 굴을 만들기 위해
이 땅을 얻었도다.
이때가 당唐나라 고종 영휘 7년 병진년(서기 656년)이요, 신라 태종대왕 즉위 2년째이더라.
다음 해 정사년에 한 고개 넘어 또 절을 크게 세우니 선승들이 모여 와 향을 사르고 부처님을 우러러 예배드리었다. 나라 안의 병식(?) 사람인 평수가 안국이라는 편액을 달고 학물을 훌륭하고 크게 하기에 이르렀도다.
여러 해 동안 산문 밖에 나가지 않고 부지런히 수행하며 스스로 공부에 힘쓰던 어느 날,
같이 거하는 선승들이 은밀히 불도를 말하고 있는 자체에 홀연히 무상하던 꽃이 밤에 상서로운 광채로 삼도를 찬란하게 비춤이 계속되고, 다음 말 신령스런 구슬이 절의 북쪽 산기슭의 나무에 우뚝하게 달리었도다. 신라 자장(=선덕여왕 때, 황룡사를 중건한 자장대사)이 당나라 별원향(?)에서 돌아와
등구 안국 두 절과 더불어 태화 월정 모든 가람에 같은 때 시작(?)하였도다.
고려 도선(=도선대사, 고려의 태조 왕건이 태어날 집터를 잡아 주었다는 풍수지리학의 대가인)이 당나라 일행에게서 물러나 돌아와 등구 안국 두 절에 와서 우리나라 산수도 삼천 팔백 선맥과 비보할 위치라 크게 감탄하였다.
중국에서 바다 건너 동쪽으로 점차 옮기고 다시 남쪽으로 옮겨온 자가 말하길 "등구 안국 두 절을 더불어 서쪽으로 앉히고 서로 떨어지게 했으니 그 낌새를 알지 못하겠다." 하더라.
만 리 먼 곳에서 바라보니 부처님의 염화미소를 누가 알리요. 미미한 맑은 바람이 끊이지 않고 불어오는 곳이 이 산(지리산) 이 절(등구사)이로다. 정히 아름다운 구름이 서쪽 하늘에서 불법을 때 맞춰 비오듯 동쪽 땅 두 절(등구, 안국)로 끌어오도다.
대개 흥하고 경사스러운 것은 하늘이 스스로 기울게 하고 떨어짐에 이르게 하니 신라 말 고려 초 등구사가 홀연히 촛불이 떨어져 타버렸으니 모든 인연이 기구함 이라. 안국사는 비록 왜구나 오랑캐의 빈번한 침략에도 완벽한 자리를 얻어 도둑의 어려움이 미치지 않게 멀리 있었으나 강희 康熙(청나라의 4대 황제) 사십칠년(서기 1708년) 무자년 가을 구월 초하루 밤, 하늘의 재앙으로 타 버렸으니 그 넓고 찬란한 모습이 붉은 재로 변하였도다. 오호라 슬프다. 많은 이들이 어느 곳에 깃들어 살면서 수행할 것인가.
험한 바위에 기대어 둥지를 만들어 흩어져 있던 이 때에 탄기坦機, 자상慈祥, 초익楚益, 초학楚學 등이 널리 여러 대중을 모아 권면하여 말하기를 "생각건대 끝까지 수행에 바쁜 대중을 만나 뿔뿔이 흩어진 것을 더듬어 복구하지 않음이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하는 참담함을 전하여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두 절의 스님들께 바라건대 모름지기 좋은 마음을 취하여 한 줌의 흙으로 산을 이룸이 해가 지기 전에 행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절이 있을 산등성을 오르내리며 일함이 염려되나 이에 등구사 옛 터에 완연하게 있는 것을 수습하여 저 산등성의 평평한 땅에 취함이 어떠한가" 하니
대중 모두가 이를 허락하고 즉일로 여러 곳에서 모여 소매를 걷고 여러 단을 이룸을 시작하여 일이 기축년(서기 1709년 - 즉, 만 3년간의 공사)이 되어 끝을 보았다. 다음해 경인년 장석을 모두 거두고 걸음을 옮기지 않은 채 석가의 제자들이 모인 연회를 마치고 나아가니 참으로 위대한 절이로다.
행호대사께서 창건하시고 경사스러움이 치하 받을 자 탄기坦機, 자상慈祥, 초익楚益, 초학楚學 등이 이어 절을 흥하게 하니 비방하는 자 역시 가희 두려워하는 도다. 무릎을 구부리고 구부려 흥하게 함을 영원히 단단하게 한 즉, 하늘이 땅과 더불어 나란히 섰도다.
건좌손향乾坐巽向(북서쪽을 등에 지고 남동쪽을 바라 봄)으로 절을 옮겨 뫼 뿌리에 떼 지어 모이게 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두 계곡 옷깃의 합침이 장안의 문전에 비추었도다. 접해있는 마을 앞을 바람 귀가 처진 물이 다스리니 사시사철 복을 구하고 축원하는 이가 끊이지 않도다. 일곱가지 보배를 버려 세움을 삼가 하지 않으니 물과 달의 도리로다.
마당을 구며 공화지불空花之佛(공중의 부처님. 실체가 없는 것을 관념 위에 묘사한 것으로 보임)을 섬기고 굽은 길을 눈에 익숙하게 도우니 향을 피워 번뇌와 업장을 소멸하는 도다. 화려한 법고는 우레와 같은 소리로 울리고 보개에 부는 바람은 여름이 아니며 구름의 그림자는 꽃에게 이르렀도다. 밝은 옥의 섬돌에 그 뜻이 새겨져 있고 난간이 삼킨 보배는 흰 눈을 담은 소나무를 따라 붉음이 푸름응 잉태하고 달빛 비치는 산골짜기 나루터로 오르는 도다. 구름이 오고 감이 천태만상이로다. 웃음을 담고 좋은 말을 실어 손님을 맞이하기 끝이 없으니 살아있는 그림의 쓰임새가 드러나도다. 이는 오도자吳道子(당나라 현종 때의 유명한 화가)의 수단이라 하더라도 베끼지 못할 터이다.(등구사 사적기의 일부분)
불탑으로서는 아주 보기 드문 지리산 오지의 신라시대 불탑이다. 등구사는 서기 656년에 세워졌다고 등구사 사적기에서는 기록해 놓았으며 이 탑은 9세기의 탑으로
보고 있다. 몇년전 중앙박물관 장충식님의 조사 연구에 의하면 이 탑은 신라시대의 탑이며 그 정교함이
매우 우수하다 했는데 오랫동안 세인들의 관심 밖에서 방치된 상태로 도굴이 되었으며 윗 부분이 상당히
훼손 된 상태이다.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리산은 신라의 변방이었으며
지리산 고 지대에 정교한 탑이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기념비적이며 현존하는 함양군의 문화재 탑 중
유일한 신라시대의 작품이다. 하루빨리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원형 형태로의 복원 및 법적인
보호 필요성이 절실한 실정이다.
등구사 탑의 복원도(중앙박물관 장충식님의 등구사 조사 보고서 중에서)
신라말과 1708년 두번이나 불에 탄 등구사는 후에 중건하였는데 가파른 지세와 위에서 흘러 내리는 물의 배수를
위한 배수 시설로 추측이 되는 굴 입구, 김일손 선새으이 속두류록에선 이곳에서 물이 콸콸 솓아 나왔다고 기록하였다.
촉동 주민들에 의하면 이런 배수 시설 문이 두곳 더 있었다고 증언하였으나 병자년 수해때 떠 내려려 갔다고 했다.
등구사 절터의 높다란 담장
배수 시설로 보이는 굴, 500년전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에서 이곳에서 물이 흘러 나왔다고 기록한 것으로 봐서
1700년대에 등구사를 중건하기 이전에도 이런 배수 시설이 있었다고 여겨지며 애초부터 이런 배수시설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등구사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배수시설로 여겨지는 윗부분, 길고 넓은 돌판으로 덮개를 하였으며 위와 아래가 아주 견고하다.
경사진 부분에는 넙적한 돌판으로 계단처럼 해 놓았다.
굴 속에서 많은 기와 조각이 보인다. 이것은 두 차례나불탄 등구사를 복원하면서 이 곳도 정비하였을 테고
깨진 기와조각들이 함께 이곳에 묻힌 것으로 파악된다
배수 시설로 보이는 땅 속 굴과는 다른 곳에 땅 위에 만들어진 배수 시설, 산 골짜기의 위쪽에서 흘러 내리는 물의
배수를 위해 고민을 한 흔적이 뚜렷하다. 현재의 등구사 건물들도 위쪽에서 흘러 내리는 물(태풍이나 집중 호우때)
의 관개를 위해 사찰의 상단부에 넓고 정교한 관개시설을 하는 게 시급하다.
현 등구사의 작은 연못
현 등구사
등구사에서 보면 지리산 천왕봉및 중봉 하봉과 주능선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의 흔적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옛 등구사 터
현 등구사
등구사 터의 거대한 소나무
등구사 절터에서 발견되어지는 여러 기와 파편들
등구사에서 위쪽으로 계속 펼쳐지는 잣나무 숲, 높이 약 50m 정도 되는 쭉쭉 곧게 자란 잣나무들이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숲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삼봉산 등산로였다. 실로 장관이었다.
등구사 윗쪽에서 발견되어지는 인위적인 흔적의 돌멩이들
등구사 윗쪽에서 발견되어지는 인위적인 흔적의 돌멩이들
등구사 윗쪽에서 발견되어지는 인위적인 흔적의 돌멩이들
등구사 윗쪽에서 발견되어지는 인위적인 흔적의 돌멩이들
등구사 윗쪽에서 발견되어지는 인위적인 흔적의 돌멩이들
등구사 윗쪽에서 발견되어지는 인위적인 흔적의 돌멩이들
등구사 윗쪽에서 발견되어지는 인위적인 흔적의 돌멩이들
등구사 윗쪽에서 발견되어지는 인위적인 흔적의 돌멩이들
등구사에서 지리산쪽을 보면 지리산 주 능선이 가장 넓게 펼쳐진다. 지리산을 조망하기 가정장좋은 곳이다.
사진에서 처럼 지리산 주 능선 가운데 어여쁜 꽃술이 있어서 활짝 핀 연꽃처럼 보여진다. 무궁화라고 봐도 좋고,
사람마다 다른 꽃이 연상되겠지만 하여튼 기묘한 분위기의 모습이다.
등구사터에서 발견된 파편들
등구사터에서 발견된 파편들
등구사터에서 발견된 파편들
등구사터에서 발견된 파편들
등구사터에서 발견된 파편들
지리산이 만들어낸 완전하게 활짝 핀 꽃 송이이다. 지리산 꽃송이!
오도재 조망공원 바로 뒷쪽으로 불성바위를 찾기 위해 올랐다. 등구사 주지스님과 촉동마을의 김광태 어르신
불성바위, 옛날에 오도재에서 등구사로 오갔던 길목이며 이곳은 구형왕과 관련이 있으며 밤에 불을 켜 놓아
밤중에 멀리갔다 오는 사람을 맞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고 위에는 그런 흔적들이 있다.
불성바위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는 김광태 어르신
불성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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