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2000년 6월 15일 발행된 휴천면지에서 발췌한 지리산 엄천골 사람들이 몽땅 살아남은 기적같은 이야기이며, 현재의 엄천골이 있기까지 위기의 순간들을 모면하게 한 이면에 숨은 공로자 분들이 아주 많으며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옮겨 적으며, 지리산 엄천골의 현존의 역사이기도 하며 영원히 기억해야 할 최근의 역사여서 이곳을 글을 올려본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이지만 이 글을 통해서 전쟁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내용이며, 지리산 산골에서의 숨어 있던 내용을 새삼스럽게 세상에 들춰내어 본다.
1951년 2월 7일 지리산 지구 공비토벌을 시작한 육군 제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9연대를 명령하여 중국의 백승희 장군이 항일전에서 이용한 손자병법인 견벽청야법을 모방하여 게릴라 지구의 모든 산림을 비롯하여 산간마을을 모조리 불살라 없애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적의 보급로와 숙식을 차단함으로써 빨치산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적을 일사천리로 한눈에 소탕 할 수 있는 견벽청야 작전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엄천지구 오지 마을인 3개리(송전, 문정, 운서) 주민 200여 가구 600여명이 소개 명령을 받고 소, 돼지, 개, 염소 등을 몰고 살림도 버린 채 일가친척이나 친지 그리고 인접 마을과 도시 등으로 남부여대하여 떠났다. 재산을 빼앗기고 생명마저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그 후 11사단 9연대는 공비토벌을 위한 목적으로 엄천지구 3개리 마을을 닥치는 대로 불살랐다. 그러자 주민들이 미처 소개하지 못한 모든 가재들이 불타 버렸다.
1951년 지리산 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있어서 사람의 생명이 파리목숨만독 못하게 죽어갔다. 밤이면 빨갱이들의 밥을 해줘야 했고 낮이면 군경들의 밥도 해야 했다. 그리고 밥을 놓고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졌으나 밥을 해 줘도 죽고 안해줘도 죽고 그야말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인간의 생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그들은 낫놓고 ㄱ 자도 모르는 순박하고 불쌍한 양민들인데도 불구하고 군경들이 이들을 공비와 빨갱이로 몰아쳐 마음대로 살생을 자행했다. 또한 공비들은 보투라 하여 양민들의 가축과 의류, 식량은 물론 심지어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 된장 무 마늘까지 약탈하여 갔으니 이래 저래 당하는 것은 양민이었다.
1951년 지리산 지구 공비토벌에 있어서 뱀사골과 백무동에서 많은 희생자를 낸 육군 제11사단 9연대 제1대대는 함양, 제2대대는 하동, 제3대대는 산청과 거창을 관활하고 제1대대는 원터와 문정에 주둔하게 되었고 9연대 본부는 목현리 박복원씨 댁 사랑채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싸움에서 동료인 전우를 잃고 눈이 뒤집혀 엄천 면민들이 모두 공비들과 내통하여 빨갱이로 오인할 정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 예로 육군 제11사단 9연대장은 함양읍 수리조합에다 휴천면 정종옥 지서장, 최시문 지부장, 박복원과 유림면 지서장 송효상, 산청군 금서면 화계 주재소장 박동춘, 거창 신원면 지서장 박경위 등 여러 사람을 상대로 작전상 필요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놓고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현재 육군 제8사단과 우리 11사단이 합동으로 지리산 지구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고 잇습니다. 11사단 9연대장인 저는 지리산 뱀사골과 박무동 등지에서 공비들과 싸우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많은 부하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엄천에 와 보니 휴천면과 유림면 그리고 산청군 금서면 거창 신원면 등 4개 면민들은 대부분이 공비들을 재워주고 먹여주고 식량과 부식들을 제공하고 있으니 모두 빨갱이와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군작전상 용납할 수 없는 상황으로서 11사단장 최덕신 장군의 작전명령 제1호에 따라 각 ㅁ녀별로 통비분자들의 명단을 제출받아 집단적으로 처형을 가할까 합니다.
여러분들은 각 면에 있어서 치안유지를 책임진 지서장으로서 해당면에 분포된 빨갱이들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는 자기면에 거주하고 잇는 통비자의 명단을 바로 이 자리에서 보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 각 면에 할당된 명단은 휴천면 1000명, 유림면 300명, 금서면 500명, 신원면 800명 등이었다.(최시문의 증언)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이었다. 그러자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주재소장 박동춘은 "차라리 내가 죽었으며 죽었지, 어떻게 죄없는 주민들의 명단을 내손으로 써서 그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이오" 하면서 그자리에서 모자를 벗고 사의를 표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유림지서장 송효상은 열 다서명의 명단을 올렸고, 그들은 유림면 서주리 양민 학살 때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휴천지서장 최시문과 면장 정종옥과 지부장 박복원씨는 같이 밖으로 나와 육군 제11사단 9연대 본부가 휴천면 창고에 있었고 연대장은 박복원씨 행랑채에 있으니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하고 1000여명의 빨갱이 명단을 제출하면 면민을 대량학살하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방법을 강구하자고 휴천으로 돌아왔다.
1951년 2월 7일 오후 휴천(당시에 면사무소는 옛휴천초등학교 옆에 있었음)으로 돌아와 면직원과 이장과 목현 동민들을 동원하여 소와 돼지를 잡고 술을 마련하여 연대본부는 물론 엄천주둔 부대에까지 푸짐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박복원 지부장은 자기 행랑채에 있는 연대장을 찾아가서 회유하다가
"빨갱이라면 산에 있지 죽을라고 집에 숨어 있겠는가?"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단 한사람이라도 죄없는 주민들을 죽게 할 수는 없지."
라고 말하고
"백성들을 빨갱이로 만들 수 잇는 것도 군경들이요, 무죄한 주민들을 죽일 수 잇는 것도 군경들로서, 주민들을 무차별 죽일 수 없으니 죄없는 면민들을 대신하여 차라리 내가 죽겠다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죄가 있다면 이 사람에게 있으니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시오"
라고 말하고 웃옷을 벗어 던지고 앞가슴을 내밀었다. 그러자 9연대장 오익경 대령은 작전사령관 최덕신 준장에게 이사실을 무전으로 타전하여 보고하게 되었고 최사단장은 "본관은 9연대장 전고를 받고 많은 감명을 받았으며 , 지리산 지구 공비토벌 작전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애향애민의 숭고한 정신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며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민간인으로서 솔선수범하는 스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작전상 한사람이라도 무고한 면민이 희생되지 않도록 특별히 유의할 것" 하고 답변해 왔다.
이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 최사단장의 판단인가! 백천간두에 놓여있던 엄천면민들의 운명이 천우신조로써 살아난 것이다.
이 때 육군 9연대장은 박복원지부장에게 웃옷을 주워 주면서 "그대와 같이 면민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같은 국민으로서 어찌 단 한사람이라도 희생시킬 수 있겠소. 안심하고 나가시오." 하고 그의 팔목을 잡았다.
국민회휴천지부장으로 있던 박복원씨는 이 사건이외에도 수시로 함양읍내를 드나들면서 군수와 경찰서장과 교제를 하면서 억울하게 공산분자로 몰리게 되면 휴천면민들의 석방을 위해 경찰서장에게 간청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여 주민을 도와 주었다. 다른 지방에서는 보도연맹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휴천면은 보도연맹 가입자가 그와같이 희생되지 않은 것도 박복원 지부장의 노력이었다고 김복덕(당시 함양경찰서 형사)씨는 증언하고 있다.
다음날 만약을 대비하여 이장 대표 김길동은 지사장을 대동하고 1951년 2월 8일 9연대가 엄천을 지나는 동안 혹시나 피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새벽에 목현을 출발하여 아침 9시경에 문정에 도착하니 벌써 문하마을 동민 200여명에게 연설소리를 들으러 나오라는 명목으로 마을 옆 논바닥에 집합시켜 놓고 기관총을 장착하여 학살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다. 이 때 김길동씨는 웃옷을 벗어던지고 마을 책임자인 저를 죽여주시고 무고한 양민학살을 자제하여 달라며 호소하고 어제(2월 7일) 저녁 목현에서 있었던 사단장 최덕신 장군의 지시한 사실을 확인케 함으로써 주민을 해산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 날 2월 8일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는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 점촌에서 일을 저지르고 내려와서 모실, 손곡, 서주, 자혜, 주상에서 사람을 모아서 오후 6시에 서주에서 217명 양민학살을 하였다.
이날 휴천면에서도 같은 시간에 엄천골 주민들을 소집하여 문하와 동호 마을에서 600여명을 모아놓고 학살하기 위해 강변에 구덩이를 파도록 강요하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박지부장은 자신의 몸을 던져 피를 말리는 간언으로 면민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자료 : 휴천면지, 정성화, 2000.6.15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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