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버린 伽倻 역사, ‘傳 구형왕릉’을 찾아서
-사적 214호.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1. 전설의 왕릉, 구형왕릉
지리산 천왕봉 북동쪽, 지리산 동부 산자락을 멋지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로
王의 山, 王山이다. 지리산 주능선도 아닌, 지능선의 고도 923m 봉우리가 이 웅장한 산줄기의
어떠한 봉우리도 갖지 못한 ‘임금’을 이름으로 삼고(主峯 천왕봉은 예외로 하겠다), 봉(峰)도
아닌 산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이 산자락에 왕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 곳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겠다. ‘傳 구형왕릉’이라는 이름이 붙
여진 피라미드형의 특이한 모습으로 된 이 돌무덤의 주인은 가락국(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제
10대 仇衡王(讓王)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유사를 비롯한 역사서의 관련 내용을 종합해서 살
펴보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구형왕은 가락국의 제 10대 왕으로 서기 532년, 신라의 법흥왕에게 부인과 아들 셋을 데리고
가서 나라를 넘겨주었으며, 그래서 양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강대국 신라가 끊임없이 침공을
하던 중, 법흥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했으나 적병의 수가 너무
많아 싸울 수가 없어 양왕은 군사와 백성의 희생을 막고자 싸움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주었는데, ‘사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기지 못할 전쟁에서는 백성의 생명을 보존
하는 것이 국왕의 도리’라 생각하고, ‘가야의 백성을 노예로 삼지 않고, 양민으로서 신라백성
으로 받아주기로 하는 합의’를 한 후였다고 한다. 그는 나라가 병합된 후, 方丈山(방장산.
지리산의 다른 이름) 동쪽 기슭의 수정궁에 기거하다 붕어하였다.」
수정궁에 머물렀는데, 수정궁이 있던 곳이 바로 왕산 자락이며 나라를 넘겨준 뒤 5년 뒤 사망
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수정궁은 수정사, 왕산사 등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1928년 덕양전이
이름으로 불러졌으며, 지금은 구형왕과 왕비(계화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傳구형왕릉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석릉으로 추정되며, 7개의 단을 이루고
있으며 총 높이가 7.15m에 이르는데, 제 4단 째, 동쪽을 향한 면에(前面) 감실을 모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형왕릉은 조선 정조 22년 산청군 좌수
에서 1km 남짓 떨어진 절에 들러 잠시 쉬고 있다가, 시렁에 얹혀있는 궤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승려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승려는 ‘예부터 누구든지 이 궤에 손을 대기만 하면
큰 화를 입는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므로 그대로 모시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민 좌수는
더욱 호기심이 들어 스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궤를 열어보니, 기우제를 지낸 큰 석묘가 바로 구
형왕의 능이라는 기록과 영정, 갑옷, 칼 등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소문은 양왕의 후손인 김
해 김씨 문중에 알려지고, 이 때부터 김씨 문중에서 이를 수호하고 있다고 동국여지승람, 대동
지지, 한국지명총람 등 문헌들이 기록하고 있다. 또 조선 정조 때 문신
에 이르기를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의 침략을 받아 백성이 상할까 두려워하여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니, 법흥왕은 구형왕을 금관주도독으로 임명하고 김해지역을 식읍으로 주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이곳의 방장산 동쪽 기슭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곳에 장사 지냈는데 돌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중후기에 ‘갑자기 왕의 무덤이 나타났다’라고
할 정도로 왕산사와 구형왕릉과 관련된 이야기는 동국여지승람과 산청(산음)현 읍지에도 갑작
스런 기록으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역사는 1000여 년 이상 비어있는 기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그렇게 전해진다(傳)’. 이렇게 해서 구형왕릉은 아직까지 ‘傳 구형왕릉’이 공식 이름으로 사용
되며, 역사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우리 고대사의 제 4제국
가야, 그 역사의 미스터리 정점에 구형왕릉이 있는 듯 하지만 현재로서는 왕릉을 둘러싼 역사는
미로 속에 갇혀있을 뿐, 알 길이 없는 것이다.
2. 구형왕릉, 왕릉인가 탑인가.
현재 구형왕릉에 대하여는 ‘왕릉인가, 탑인가?’하는 문제로 학자들 간에 몇몇 의견들이 도출되어
있는데 이를 대략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무덤이 돌로써 쌓아 올린 피라미드 형태는 남부지역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양식이라는
것이 첫째 의문이다. 오히려 부산외국어대학교의
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해지는 대로 무덤이라고 한다면 그 형태가 북방 고구려
의 적석총과 많이 닮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설령 가야를 창건한 세력이 북방 기마민족이라고 가
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형태의 무덤이 가야 멸망기에 유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가지게 되는 의문은 구형왕릉 인근의 함양군 휴천면과 마천면 여러 지역의 지형이름과
가야왕의 항전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그 이름들은 다름아닌 ‘국골(가야국의 골
짜기), 두지터(식량을 저장해두던 곳간), 왕등재(왕이 오른 고개), 빈대궐터(왕이 기거하던 곳),
추성산성(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토성),’ 등인데, 개략적인 내용으로는
가야국의 왕이 산성을 축조하고 식량창고를 조성하며 항전을 하다가 전쟁 중에 사망했다는 전설
이 그것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 ‘양왕의 나라 양도설’과는 다른 내용의 전승을 받아들인다면 왕릉
으로 단정 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위의 이야기 중, 삼국유사의 내용과 1000여 년이 지난 후대의 기록이 서로 잘
맞추어진 ‘구형왕의 나라 양도설’이 사실상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편이나, 석연치 않은 곳이
있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더군다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공에 따른 전기 금관가야의
궤멸적 타격, 그리고 가야 유민의 발생,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 등이 이루어졌을
5,6세기의 이곳은 유사 이래 최대 격동의 시간을 맞이하였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후기 금관가야
나 대가야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전해지는 바가 없어 여전히 어둠 속의 역사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3. 역사로 걸어나올 구형왕릉을 기다리며
백성들에 대한 군주의 깊은 사랑은 ‘양왕’이라는 치욕스런 이름으로 남았지만, 승자의 역사를 이
어받은 옛사람은 그의 후손
있다. 하지만 역사란 냉엄한 것, 패자의 역사, 사라져버린 가야의 역사는 여전히 오리무중을 헤매
고 있을 뿐이다. 2007년 4월 실시된 왕산사 발굴 결과, 왕산사의 初創과 주된 활동이 15~18세기로
추정됨에 따라, 왕산사와 구형왕릉과의 시대적 연관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돌무덤은 여전
히 ‘傳乘의 역사적 사실 확인’을 기다리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승의 역사적 사실 조작’이
아니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이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傳’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구형왕릉
은 오히려 태연한 듯하다. 이 돌무덤은 과연 언제쯤 역사 앞으로 걸어 나올까?
전 구형왕릉을 내려오면 도로 가에 덕양전이 있다. 위의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김해 김씨 문중
의 자세는 확고하다. 이곳에서는 양왕과 왕비 계화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고, 봄(음3.16), 가을
(음9.16)에 제향을 올린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이 사액되자(조
선 고종 1878), 왕산 산자락, 구형왕릉의 위에 있던 수정궁을 덕양전이라 고쳐 부르고, 192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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