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이야기

[스크랩] 엄천강을 따라 역사의 흔적 찾기

배꼽마당 2012. 11. 4. 11:27

엄천강을 따라 도보나 차량 여행을 한다면 묻혀진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코스가 된다. 엄천강의 대략적인 코스 정리를 한다면

1. 구형왕릉 - 산청군 금서면 화계의 왕산자락에 있는 구형왕릉과 덕양전 답사를 맨 처음으로 하고 화계로 나와서 유림면 화촌에서 좌회전을 하고서 조금만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마천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면 유림면 서주리가 나온다.

2.이 서주리를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친다.
역사의 흔적이나 유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서주리에는 아픈 역사의 흔적이 마을 한 모퉁이에 남아 있다. 1951년 음력 정월 초 무렵에 인근 마을에서 끌려온 마을 주만들이 집단 학살을 당한 곳이다. 인근 마을의 산청군 금서면 사람들과 함양군 손곡리 사람들을 한데 모아 놓고 통비 분자라는 이름으로 아군에게 학살을 당한 그 지역이다.

이 부대가 나중에 거창 신원 마을로 진주를 하여 근 800여명의 주민들을 역시 집단 학살을 하였던 바로 그 부대이기도 하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져 버린 우리네 뼈 아픈 역사속의 흔적들이며 전쟁이 가져다 주는 또 하나의 비극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쟁은 논리적이지 못하며 살고 죽는 문제에만 골몰하기 쉽상이고 그러다 보니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6.25때 사실 엄천골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 인민군들과 국군들을 모두 협조를 했다. 지리산 아래 마을이었기 때문에 6.25때 근 2만여명이나 되는 빨치산의 본거지가 지리산 이었으며 5개 시군을 아우르고 있는 지리산 전역이 빨치산의 무대였고 이를 소탕하기 위한 피아간의 공방전이 연일 계속 되었고 그 틈바구니 속에서 빨치산이 들어와서 식량이나 노역을 강제로 부담시키면 묵묵히 따라 주어야만 했던게 당시의 상황이었으며 주민들 사이에서도 저쪽편, 이쪽편으로 갈라져 서로 적이 되어야 했던게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생되어진게 양민 학살 사건이 발생하게 된 동기였다고 추측되어진다.

서주 마을에서 지방도로를 따라 유림면 모실 마을로 접어들면 옛 화남초등학교가 나오고 그곳 교문에서 차를 세워두고 옛날 비포장 도로를 따라 엄천강 쪽으로 200m정도 걸어가면 함허정이 나온다. 깍아 지른듯한 벼랑의 중간에 우뚝 서 있는 함허정은 2006년도에 함양군에서 문화재 보수의 일환으로 중건되어진 함허정 정각이 있다.

3. 이 함허정은 300여년 전 최한후가 세운 것으로 벌써 세번째 중건을 거듭한 것이다. 발 아래 엄천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 자혜 마을이 눈 앞에 빤히 나타나면서 함허정 정각 아래엔 시퍼런 엄천강물이 무서운 자세를 하고 버티고 있다.

몇년 전 태풍때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는 수난을 겪은 다음 산청군에서 마을 전체를 집단 이주 시키는 작업으로 인해 옛 자혜 마을의 상단부에 반듯한 새집을 지어 놓고 있는 곳이 산청군 금서면 자혜 마을이며 그 자혜 마을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옛날에는 함허정 바로 아래엔 함양군 유림면 모실 마을과 산청군 금서면 자혜 마을간의 교통로 역할을 했던 나룻배가 있었다. 강을 건너야만 했던 사람들은 자혜 마을 사람들과 점촌, 방곡, 가현, 오봉, 동강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화계 장에 가는 사f람들은 꼭 이 나룻배를 건너야만 했다.

함허정을 빠져 나와서 다시 강줄기를 따라 마천 방향으로 2km정도 가다 보면 길목에 나타나는 큰 기념비 하나가 도로가에 버티고 있다.

4. 바로 김종직 선생의 차밭비이다. 500년전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김종직 함양군수는 차 공출로 인한 민초들의 애로 사항을 들어 주기 위해 그곳에서 자생하는 차나무의 흔적은 좇아 대단위로 차밭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해 그곳에 차밭 기념비를 세워 두었다.

또 하나 바로 그 옆에는 김종직 선생의 유명한 지리산 기행문이 유두류록 안내문판이 하나 서 있다.

500년전 당시의 세세한 기록과 함께 옛지명으로 표현된 유두류록 기록을 최근에 산악인을 중심으로 완전히 파악되고 그 등정 경로까지 파악이 되어 세인들읙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두류록 코스 안내판인 셈이다. 김종직 선생은 유호인 선생과 함께 지리산 기행을 하기 위해 함양 관아를 출발하여 팥치재를 넘고 당두재를 넘어 남호리 절터 마을을 지나 엄천강을 건너 화암(휴천면 동강리 뒤 당산)에서 쉬고 구시락재를 거쳐 지리산 등정을 한것이다.

엄천사 차밭비가 있는 휴천면 남호리 동호마을을 보통 사람들은 절터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어져 왔다. 여기에는 상당한 연유가 있다.
지리산 엄천사라는 거대한 사찰터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창건한 것이다. 당나라 건부(乾符) 10년(건부는 6년에 그치고 이때는 中和 3년임) 계묘(883,신라 헌강왕9) 봄에 헌강대왕이 화암사(華岩寺:화엄사)에 사신을 보내어 결언선사를 초빙하였다. 선사가 이르자 왕이 예로써 대우하고 분부하였다.

"궁궐에 선사를 초청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도로써 나라를 다스렸지요. 법흥왕의 도리사, 진흥왕의 황룡사, 무열왕의 감은사, 애장왕의 해인사, 경문왕의 숭복사는 다 선왕을 위해 지은 것입니다. 때때로 그 절에 불공을 드려 선왕의 명복을 빌고 국운의 연장을 기원했으니 이것은 대대로 계승하는 대업입니다.

내가 그 일을 잊지 못한다면 선왕을 저버리리는 것입니다. 선사를 번거롭게 이곳에 오게 한 것은 선사를 통해 그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듣건대 해동의 명산이 많지만 지리산이 가장 높고 깊다고 하니 선사가 그곳에 가서 터를 잡고 절을 지어 영원히 우리 선고왕(先考王)을 위해 명복을 비는 원찰로 만들어준다면 그 자비와 보시가 클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사가 명을 받들어 지리산에 와서 산을 따라 맥을 점치고 시내를 따라 거슬러올라가다 마침내 이 땅을 얻었다. 보고를 받은 왕은 백성을 동원하고 조세를 돌려 쓰게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같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절이 지어지자 왕은 엄천사라 하사하였다. 그뜻은 엄히 계율을 지켜 한량없는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낙성식의 법회를 열 때 왕도 친히 행차하여 선고왕을 위하여 불공을 드렸다. 드디어 결언대사를 보정사(輔政師)로 삼고 사라국사(娑羅國師)라고 칭하였고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고려 시대에 절이 퇴락했으나 보수하지 못하였다. 남송 건염(建炎) 2년 무신,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고승 성선(性宣) 대사가 강을 건너 서유(西遊)하다가 이 절에 유숙하고는 절의 퇴락상을 보고 발분하여 중수할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시주자를 구하여 중수하니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성선대사는 강법사(講法師)가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절은 다 불에 소실되었다. 강희(康熙) 25년 정묘 우리 임금님 즉위 14년(숙종13,1687)에 안양사(安養寺:지금의 문정리 법화사) 승려 인욱(印旭)과 혜문(惠文) 등이 안양사가 험고한 데 있어 왕래가 어렵다며 평탄한 엄천사 터로 절을 옮기자고 대중에게 동의를 얻고 군수와 관찰사에게 진정하여 승낙을 받아 수백 명의 승려들이 재물을 모으고 공역을 담당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 땅은 향교의 수세지(收稅地)로 편입되어 있어 절을 지을 수 없는 형편이라 세월이 천연되었다.

경오년(숙종16,1690) 봄에 동의를 얻어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 벽암 각성(碧巖 覺性:1575-1660)의 손자인 침허(枕虛)의 아들 죽계당(竹溪堂) 승현(僧絢) 대사가 지휘하여 중건하였다.

옛 주초를 인하여 18동(棟) 100간의 건물을 지었다. 임신년(1692) 봄에 왕명이 내려 4결(結)이 면세전으로 되었다.

엄천사는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 신라 시대에 하동, 구례, 함양 등지에 김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나무를 심어 전래되는 것을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함양군수(1471-1476)로 부임한 뒤 새로 차밭(茶園)을 조성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기념하는 사적비가 마을 앞에 서 있다.

5. 다시 남호리 절터 마을을 지나 차를 몰고 강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한남 마을이 나온다. 이 한남 마을 역시 마을의 이름 자체에서 역사의 흔적을 느낄수 있는 이름이다.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사육신뿐 아니라 많은 왕자들까지 수난을 당하게 되는데 세종의 12번째 왕자였던 한남군 역시 이에 연루되었고 단종이 죽자 완전히 정권을 잡은 세조는 한남군을 2차 귀양을 보냈는데 바로 그곳이 한남마을의 엄천강 바로 건너 새우섬이며 한남군의 이름을 따 사람들은 그곳을 한남마을이라 불리어졌고 함양군에서는 역사의 흔적이 있는 새우섬 개발에 착수를 하여 2008년도 완공을 목표로 현재 공사중에 있다.

6. 한남마을을 지나서 상류쪽으로 가다보면 문정마을이 나타난다. 문정 마을은 김일손의 속두류록에서 제법 상세히 언급이 되어지는데 당시에 김일손 선생은 문정을 탄촌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문정이라는 행정단위의 마을 이름외에 문정을 숯구지라고 했다.

이 문정마을엔 제법 역사의 흔적들이 있다.

이곳에서 역사의 흔적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투금탄 전설의 주인공 이억년, 이조년선생의 일화는 현재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말하기 듣기 교과서 38쪽에 등장을 하고 있다. 바로 두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 중 형이었던 이억년 선생의 묘소가 옛 문정초등학교 바로 뒤, 산에 위치하며 2006년도엔 선생의 후손인 성주이씨 대종회에서 묘소 정화사업을 벌여 정비를 해 놓았으며 후손들뿐 아니라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선생의 인간 사랑의 정신을 기리고 있는 곳이다.

문정은 이억년 선생뿐 아니라 선생의 맏형이었던 이백년 선생도 개성에서 지리산까지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데 지금의 문정리 백연마을의 유래가 바로 이백년 선생과 연결되어지는 곳이다.

성주이씨 문중에서 유명한 선조로 여기고 있는 다섯형제(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중 첫째와 넷째가 문정 마을과 인연을 맺은 셈이며 지금까지도 이백년 선생의 이름과 연관된 백연 마을이 된것이다. 2007년도엔 함양군과 함양문화원에서 백연 마을에 백년정 정각하고 이화여 월백하고의 시로 유명한 이조년 선생의 시비, 역시 고려말때 유명한 선비였던 조승숙 선생의 시비와 함께 백연 마을의 유래에 관련되 기록물을 새긴 기념비가 물레방아와 함께 예쁘게 조성되어 지라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7. 문정 마을에서 조금 올라가면 지리산에서 유명한 명소로 여겨지는 천혜의 비경 용유담이 나타난다. 이 용유담에는 숱한 전설과 시인 묵객들의 흔적이 나타난다. 용유담 건너 쪽 바위에는 남명 조식, 김종직선생의 이름이 새겨진 암각이 보이며 물과 맞닿고 있는 바위 가까이 가서 보면 수만년동안 물에 닳은 기괴한 모양의 바위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며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다,

옛부터 많은 선인들이 그곳을 지나가면서 시와 글로써 언급을 해 놓았다.

이 용유담에서 용유교를 건너 지리산쪽으로 차량을 몰고 송대마을로 진입을 해 보면 지리산 최고의 신비한 자태가 나타난다.

8. 바로 부처 형상을 꼭 닮은 누워있는 부처 형상의 산봉우리가 보이는 곳이다. 지도상에서는 그곳을 상내봉이라 하며 송대마을에서 보면 영락없는 부처 향상으로 보이나 고정 마을위의 견불 마을에서 보면 송대마을 만큼 뚜렷하고 세세하지는못하다, 이 산봉우리의 형상을 다른 산 정상이나 다른곳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진다.

산꼭대기의 우람한 바위와 주변에서 자란 큰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어 송대마을에서 보면 누워있는 부처형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모습이 최근에 세인들에게 보여진 이유는 40년대를 거쳐 90년대를 지나는 동안 산림의 황폐화로 인한 나무들의 수난으로 인해 영험한 부처님의 모습은 보여지지 않았고 그냥 바위로만 형성된 단순한 산봉우리로 보였으나 나무들이 자라나면서 부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9. 이 송대마을의 상단부 임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승용차를 운전해서 내려 오다 보면 또 하나 신기한 지리산의 보물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용유담의 전설속에 등장하는 마적도사의 혼이 깃등 마적도사 바위이다. 우람한 바위위에 수령 약 500년쯤 되어 보이는 우람한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마적도사가 장기를 두었다는 세진대이다. 세동 마을과 송대 마을 사이에 있으며 예전엔 그 주변에 마적사란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이 함양군지에 나타난다.

10. 이 용유담을 지나치고 상류로 오르면 의탄 마을이 나타나고 예술적인 교량 하나가 나타나는데 이 다리를 건너 차량을 몰고 가면 바로 유명한 칠선계곡으로 오르는 셈이다. 길이 협소하여 두대의 차량이 쉽게 교행이 잘 되지 않는 길이다. 추성이라는 마을의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벽송사, 서암정사로 가는 길이다. 삼거리에서 직진을 하여 추성 마을 가운데를 지나 계속 가면 산골 아래 첫동네 두지터가 나타나고 우리나라 3대 계곡의 하나인 칠선계곡이 나타난다.


대략 짚어본 엄천강 주변의 묻혀져 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나열해 보았는데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많은 전설과 역사의 흔적들이 엄천골짜기에 산재해 있다. 최근에 세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리산 공개바위, 운서리 마을 앞의 괴이한 소나무, 한국의 마직막 호랑이 서식처였던 천상바위, 한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최고의 희생자이며 마지막 빨치산이었던 정순덕의 은거지였던 선녀굴등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왕산의 상사바위, 상사폭포, 이에관련된 전설, 방곡의 위령탑등등도 엄천강을 따라 존재하고 있는 역사의 흔적들이거나 신비의 대상물들이다. 사전에 조금 인지를 하고 주변을 탐색해 본다면 여행의 묘미를 더할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출처 : 화남초등학교 총동창회(경남 함양 유림)
글쓴이 : 김용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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