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탄정사 감회 서문

방장산 북쪽 수십리 남짓에 한 마을이 있으니 도탄(桃灘)이라 한다. 지난 갑인년(1554)간에 돌아가신 조부(*변사정)께서 한 두엇의 동지를 이끌고 계곡과 산으로 유람하는 길에 이곳을 지났는데, 그 골안이 탁 트여 넓고 泉石이 맑고 고운 것을 사랑하여 초연히 속세를 벗어나 이곳에서 느긋하게 지내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다음해 봄, 마침내 띠풀을 베어 몇 칸의 집을 짓고 그 이름을 도탄정사(桃灘精舍)라 하였다.

일대에는 긴 강이 비끼어 흐르고 천 그루의 복숭아나무 숲이 쭉 둘러서 있고 그 사이로 매화나무와 국화를 심어 한가하고도 그윽한 곳으로 만들었다. 왼쪽에는 그림을, 오른쪽에는 책을 두어 반려삼아 지내니 일상사가 아닌 것이 없었지만, 속된 사람은 물리쳐 이르지(至) 않고 어지러운 세상사는 드물게 들려 구름을 밭갈고 달을 낚으니 그 즐거움이 매우 화락하고 흐뭇하여 名利(*명예와 이익)의 영화로움과 수고로움을 잊고, 구름과 놀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보며 한가로이 지내기를 삼십 여년이었다. (*조부의 행적)

저 천 개의 바위는 빼어남을 다투고 가파른 절벽은 높고 험한데, 바위는 기이하나 괴상하지 않고 거침없이 구불구불 이어진 것을 보니 백장봉(百丈峯)이다. 뭇 봉우리 중첩하고 만 골짜기 다투어 흐르고, 가시나무‧녹나무‧소나무‧전나무가 해를 가리고 하늘과 나란히 선 곳은 반야봉이다. 기이한 봉우리들 둘러서서 사방에 병풍을 친 듯하고, 길은 위태롭고 좁은 골짜기 끝으로 뻗어 낭떠러지로 통하는 곳은 연선봉(蓮仙峯)이다. 삼악(三嶽)에서 특히 빼어나 창공을 받치는 기둥으로 운무가 그 꼭대기를 가두고 별들이 그 위에서 잠드는 곳은 천왕봉이다.

원숭이와 학의 울음소리 숲과 골짜기에 처량하고, 용이 울고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水石 사이에 은은하다. 소슬하여 돌아다니며 구경할 만한 절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 배회할 만한 이름난 곳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 수 없다.

황정(黃精)‧자지(紫芝)‧복령(茯苓) 등 장생불로의 선약이 이 땅에서 몇 종(種)이나 나는지 알 수 없고, 푸른 고갯마루와 붉은 단애에 도사와 승려가 제멋대로 오가며 모였다 흩어지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서 분주히 장생을 추구하는 무리들 또한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만약 날씨가 따스해지고 맑아지면 새들의 지저귐이 골짜기에 울리고, 나무는 산과 바위를 초록으로 물들이고, 꽃은 만 폭포(萬瀑) 사이에서 붉게 피어나리라.

그럴 때면 혹은 푸른 매를 팔뚝에 앉히고 누런 개를 끌고 종횡으로 쫓아다니며 사냥하는 자도 있고, 혹은 바위 앞에서 명아주 지팡이에 의지하여 석창포 사이를 소요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태양이 허공을 부채질하고 산기운이 찌는 듯할 때면 높은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맑은 샘에 몸을 씻어 스스로를 깨끗이 하고 낚싯대를 쥐고 갈매기 나는 물가에 서 있는 자는 엄자릉1)의 무리일 것이요, 따비와 호미를 메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자는 도연명2)의 무리일 것이다.

또 장맛비가 처음으로 그치고 혹서(酷暑)도 잠깐만에 사라지고 들판에 가을이 가득하면 벼도 이미 익고 온 강의 물고기도 때맞춰 살쪄 있으니 한가로운 시름과 흥취가 일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놓아버리기도 힘든다.

찬 기운이 계곡가 바위에 이르고 눈보라가 허공중에 흩날리면 千山에 날던 새들 다 끊어지고 온 숲의 옥 같은 약3)이 서로 비춰 별세계의 맑고 깨끗한 흥취가 이로써 갑절이나 늘어난다.

산속의 경치는 무궁하고 보이지 않는 바 즐거움은 끝이 없으니, 이런 곳에서 육략(六略)4)을 다 기억하기란 어렵다.

아아, 내가 몸소 겪은 전란의 변고가 도탄에까지 미쳐 옛 전장(田庄)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게다가 小子(*글쓴이 본인)는 흉한 재앙을 거듭 당하고도 오히려 모진 목숨을 연명하였고, 시동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로 예사롭게 오갔으니, 지난 일을 생각하니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먼저 떨어진다.

하물며 비현(飛峴)을 넘고 화천(花川)을 지나 선인께서 노닐며 구경하던 여러 명승지를 멀리 바라보면 삼선대(三仙臺)‧이자기(二子磯)‧월락동(月落洞)‧용유담(龍遊潭)이 눈앞에 역력하니 서글픔이 어떠하겠는가!

용유담의 왼쪽에 높은 바위가 있는데 망악(望嶽)이라 한다. 옥계(玉溪) 노(盧)선생5)이 일찍이 이곳을 지나다가 천왕봉을 바라보았던 곳이며 그로 인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그 옆에는 금암(琴巖)이 있는데 그 무늬가 거문고 현(絃)과 같다고 하여 금암이며, 그 아래에 있는 구암(龜巖)은 거북이가 움추린 모양 같기 때문이니, 각기 그 형상에 따라 이름을 지어 붙인 것이다.

무성하고 빽빽하던 복숭아나무 숲은 그 전에 비하여 많이 성글어졌지만 느릅나무 수백 그루가 시냇가를 따라 가지를 흔들며 서 있고 봄이 되어 꽃이 무성하게 피어날 때면 놀러온 사람이 가리키며 탄식하고, 승려들이 쉬면서 감탄하며 구경하니 무릉도원이 있다면 여기가 아니겠는가?

지금 비로소 옛터를 새로 일구어 삽시간에 몇 개의 서까래를 엮어 띠집을 이루니 고요하고 깨끗하며 대사립문은 쓸쓸하다. 수 경(頃)6)의 자갈밭과 삼 묘(畝)의 쑥대밭은 밭두둑이 줄지 않고 평화롭게7) 남아 있다.

옛날의 순박한 풍속을 지금 小子가 용렬하여 先人께서 남긴 자취를 비록 이어받지는 못했지만, 장차 속된 일을 떨쳐버리고 이 사이에 몸을 깃들여 누워 지내고자 하는 뜻이 있다.

해가 뜨면 숲속의 비가 개이고 구름이 돌아가면 암혈이 어두워지니, 그로써 밝아지고 어두워지며 변화하는 모습을 알고, 인간세상의 風雨를 듣지 않고 새들과 짝하고 사슴과 벗하며 산에서 채취하고 물에서 낚시하며 천명을8) 즐기면서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이에 쓴다.

불초 손자 상익이 삼가 기록하다.

【註】

1) 자릉(子陵)은 후한(後漢)의 은사(隱士) 엄광(嚴光)의 字.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하였고, 그의 재주를 아까워한 황제가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살며 동강(桐江)의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하며 평생을 보냈다 한다.

2) 진(晉)나라 때의 은사(隱士)인 도연명(陶淵明 365-427). 도잠(陶潛). 팽택 현령(彭澤縣令)이 되었다가 군(郡)에서 독우(督郵, 지방 감찰관)가 나온다는 소식에 “내가 쌀 다섯 말 때문에 시골의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소냐.”하면서 석달 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며『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다 한다.

3) 원문은 경약(瓊藥)이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선약을 만드는 귀한 약재가 숲의 잎이 지고 난 뒤에 드러난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하였다.

4)《한서예문지》에서 세상의 모든 전적(典籍)을 6종류로 분류하여 六略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책이 필요없다는 뜻 정도….

5) 노진(盧禛 1518-1578) :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 함양에서 출생, 처가동네인 남원에 정착.

경상도관찰사‧대사헌‧도승지‧예조판서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뽑혔고, 효도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평소 김인후‧노수신‧기대승 등과 교유하였다. 문집으로《옥계집》이 있다.

6) 경(頃)‧묘(畝) :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토지면적 단위. 조선시대에는 전지(田地) 4방(方) 5척(尺)을 1보(步), 24보를 1분(分), 10분을 1묘(畝), 1백묘를 1경(頃)이라 하였다.

7) 원문은 凞凞皞皞(희희호호)로 공자가 요순시대를 묘사한 말이다. 전통적인 해석은 ‘백성의 생활이 즐겁고 평화롭다’는 뜻이라 하였으나, 茶山은 ‘밝고 환하여 터럭 하나라도 숨길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글자의 원뜻으로 볼 때 다산의 해석이 훨씬 합리적이지만,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전통적인 해석에 따랐을 것이라 나도 그렇게 옮겼다.

8) 도연명,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마지막 구절 “애오라지 자연의 조화에 따라 죽음으로 돌아가리니,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 復奚疑(료승화이귀진 낙부천명 부해의)”

변사정(邊士貞 1529-1596) :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옥계(玉溪) 노진(盧禛 *주석 참조)과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을 사사(師事)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2,000여명의 의병을 모집,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사후 사헌부장령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운봉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글은 정유재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 전하는 그의 문집 『도탄집(桃灘集)』은 門徒와 知人들로부터 취합한 글들을 그의 증손자(邊瑜)가 1666년 편집한 것으로, 후손들의 추모글도 일부 포함되어 있으며, 이 글도 그중 하나이다. 또한 변사정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이 옛산행기방에 있다.

精舍感懷序

方丈山之北數十里許有一村名曰桃灘往在甲寅年間先王考携一二同志遊溪山路過此地愛其洞府寬敞泉石明麗超然有脫塵棲遲之計翌年春乃誅茅卜築構屋數間名之曰桃灘精舍一帶長江冩注其下千樹桃林環続其際蒔梅種菊以爲閑中之幽伴左圖右書無非日用之事蔡俗客不至塵事罕聽畊雲釣月其樂陶陶忘名利之榮勞見雲霞之舒卷優哉遊哉三十餘年矣觀夫千巖競秀峭壁嵯峨巖奇不恠盤礴逶迤者百丈峯也羣峀重疊萬壑爭流梗楠松檜蔽日參天者般若峯也奇巒羅立四圍作屛路轉而谿危峽圻而崖通者蓮仙峯也三嶽特秀撑柱蒼空雲霧鎖其顚星斗宿其上者天王峯也猿啼鶴唳之聲啾啾於林谷之中龍吟虎嘯之響隱隱於水石之間有簫寺可以遊觀者不知其幾所有名區可以盤桓者不知其幾處黃精紫芝若茯若苓長生却老之藥産於玆土者不知其幾種碧嶺丹崖仙翁釋子翶翔聚散絶世紛而追喬松者不知其幾輩若乃風日暄姸谷禽和鳴樹綠乎山巖之外花紅乎萬瀑之際或臂蒼牽黃縦橫逐獵者有之或岩菖扶藜逍遙前岩者有之當其炎精煽空嵐氣薰蒸升高邱而望遠濯淸泉而自潔把漁竿而立鷗波者子陵之儔耶荷耒鋤而歸田園者淵明之徒耶及夫霖雨初霽酷熱乍去蔽野之秋稻已熟滿江之紫鱗正肥則閑愁逸興浩然難放至於寒氣谿巖風雪迷空千山之飛鳥頓絶萬林之瓊藥相輝則別界淸趣此焉倍增矣山間之景像無窮隱流之所樂何限而難可殫記六略如斯嗚呼自經兵燹時移事變桃灘舊庄盡付灰燼加以小子荐遭凶禍尙延頑喘一僮一驢尋常朅來進念徃事感淚先零况踰飛峴過花川瞻望先人之遊翫諸勝處三仙臺二子磯月落洞龍遊潭歷歷在眼慘愴如何潭之左有高巖曰望嶽者玉溪盧先生嘗過于此望見天王峯而因爲之號焉其傍有琴巖取其紋如琴絃其下有龜巖以其狀如龜縮各以其狀命名者也桃林之茂密比前時甚踈而然楢數百株沿溪拂枝當春盛開則遊人指點而興嗟衲子休憩而嘆賞武陵仙源得非玆歟今始開拓遺墟暫結數椽茅茨靜灑竹扉蕭條數頃石田三畝蓬蒿凞凞皞皞不减疇昔之淳風今以小子之庸陋雖末得継襲遺踪然亦將有意於擺脫塵冗棲身此間臥者日出而林霖開雲歸而巖穴暝昏覺明晦之變化不聞人寰之風雨儷禽鳥而友麋鹿採於山而釣於水樂夫天命以送餘年者矣於是乎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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