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향자료

함양 군지에 기록된 이숙번 사근역 시

배꼽마당 2014. 7. 31. 20:55

                   함양 군지에 기록된 이숙번 사근역 시



   함양에는 여러 곳의 사적지가 있다. 첫째는 제계서재의 유허지인데 이색이 유림면 국계에 제계서재를 지어 우거 했는데 이색의

사후 제계서재가 퇴락해서 성종때 사숙재 강희맹이 중수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 유허지에 「제계서재 이목은 소축

강사숙재 중수지 을묘사월(蹄溪書齋李牧隱所築姜私淑齋重修址乙卯四月)」이라 돌에 새겨져 있고 글자가 풍화되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을묘년 사월이면 연산군 원년이기 때문에 강희맹의 사후 10여년 후에 강희맹의 후손이나 혹은 마을사람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돌에 새겨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목은은 함양에 연고가 있었는데 큰동서 민근(閔瑾)이 함양에서 살았다. 고려 말 왜놈들이 침입하여

 노략질 해갔다는 소식을 듣고 동서에게 써보낸 시가 목은 집에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함양의 작은 고을은 깊은 산 속에 있어/ 바다는 멀고 낭떠러지도 만 길이나 되는데/ 도적은 천둥 같아 귀를 가리기 어려웠고/ 몸은

활 맞은 새 같아 아직도 마음 놀라라/ 골짜기 안에 인적 없음은 문득 알겠거니와/ 세밑에 비바람 맞음은 어찌 견딘단 말인가/ 다행히

둘째 아들이 영친연을 올렸으리니/ 기쁨의 눈물이 옷깃 적셨음을 멀리 알겠네/

  咸陽小縣亂山深/ 海遠縣崖更萬尋/ 寇似疾雷難掩耳/ 身如傷鳥尙驚心/

  谷中頓覺無煙火/ 歲抄那堪窘雨陰/ 幸有二郞能採舞/ 遙知喜淚已霑襟/

 

  또 다른 이야기는 이숙번의 유배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숙번은 조선초기 이방원을 왕좌에 앉히기 위해 2차례의 왕자난을 일으킨

태종의 공신으로 함양의 지계동(까막섬)으로 유배를 왔다는 설인데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역시 사근역이라는 시가 함양군지에

전해져 오고 있다. 함양과 전연 연고가 없는 안성이씨인 그가 까막섬(烏島)에서 3km 정도 떨어진 사근역에 대해 시를 썼으니 이

또한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객발이 서릿빛 더했구나/ 가는 세월 조금도 지체 없네/ 윤음은 금궐에서 내렸고/ 고우들 우정에서 전송하네/ 집을 둘러 있는

계산 아름답고/ 구름이 흩어지니 송백 푸르구나/ 임금의 은혜 갚기 어려워라/ 어찌 반드시 천정에만 이르리오

  客髮添霜雪/ 流年不少停/ 綸音降金闕/ 故友餞郵亭

  繞屋溪山勝/ 拂雲松栢靑/ 君恩難可報/ 何必到天庭

  다음은 논개묘에 관한 설이다.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이 고장뿐만 아니라 전북 장수(논개의 출생지)에서까지도 논개의

시신이 함양에 묻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원본자료 : http://cafe.daum.net/choobopk/8HKt/13?q=%C1%A6%B0%E8%BC%AD%C0%E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