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향자료

화산12곡: 한남진

배꼽마당 2016. 9. 29. 09:48
 

                       [화산12곡] - 제6곡 : 오서 / 제7곡 : 한남진
 글쓴이 : 엉겅퀴
조회 : 335  


글의 순서

 

 

 

   

 

 

1. 비극의 주인공

2. 제6곡 : 오서(鰲嶼)/새우섬

  ⑴ 오서(鰲嶼)의 유래

  ⑵ 詩로 보는 섬의 풍경

  ⑶ 새우섬은 섬이었을까?

  ⑷ 한오대(漢鰲臺)

3. 제7곡 : 한남진(漢南津)

  ⑴ 詩로 보는 한남마을

  ⑵ 한남군 일화

  ⑶ 한남군의 죄

4. 후일담

  ⑴ 신원(伸寃)

  ⑵ 신위 배향

  ⑶ 한남군 묘

  ⑷ 단계동천(丹溪洞天)

5. 마무리

 

1. 비극의 주인공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비극」을 거칠게나마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에 빠진 주인공은 거대하고 불가사의한 운명에도 굴하지 않고 싸우다 마침내 파멸에 이른다. 관객은 연민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그리하여 그는 《시학(詩學)》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 다음의 4가지를 들었다.

 

  1. 주인공은 행복에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한다.

  2. 주인공은 완전무결한 인격자여서는 안된다. 완전한 인격체는 비극의 씨앗을 잉태할 수 없으며, 연민과 두려움의 감정을 자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3. 주인공의 몰락은 부덕과 천박한 욕망 때문이어서는 안된다. 차원 높은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숙명적으로 지니고 있는 비극적 성격 결함과 판단의 오류에 의해 몰락이 이루어져야 한다.

  4. 주인공의 신분은 고귀한 가문의 일원이어야 한다.

  (*1과 4는 고귀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다 불행으로 떨어져야 더 극적인 효과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1429년(세종 11년) 세종과 후궁 혜빈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어(), 세종의 18왕자 중 12번째였으며, 서자로는 4번째였다. 1440년 예빈녹사 권격의 딸과 혼인하였고, 1442년 한남군(漢南君)으로 봉해졌다. 1441년 세자빈이 단종을 낳은 후 죽자 혜빈 양씨가 유모로서 단종을 길렀으니, 서자였지만 그의 위상은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찬탈과 함께 그의 봄날은 끝이 난다. 1455년 6월 금성대군‧혜빈양씨 등과 반란을 모의하였다는 죄목으로 귀양길에 오른 것이다. 세조의 등극과 한남군 등의 유배는 같은 날 이루어졌으니 1455년 윤6월 11일이었다.

이때 따로 유배를 간 친모와 동생 영풍군 전(瑔)은 평소 세조에게 밉보였든지 사사(賜死)되었고(각각 1455년과 1456년), 본인 또한 금산에서 아산과 양지(용인)를 거쳐 1456년 사육신 사건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더 험한 곳으로 안치하라는 명에 의해 그해 6월 함양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457년 금성대군이 유배지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계획한 단종복위 거사가 실패하자 금성대군은 물론 결국 영월에 귀양가 있던 단종까지 죽임을 당하면서, 나머지도 다 죽여야 한다는 신료들의 빗발치는 상소로 그는 저승의 문턱을 경험한다. 그러나 당시 죽음은 면하였지만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얼마 후 낯설고 물 설은 첩첩산중에서 피를 토하는 두견새 울음소리만 듣다 1459년 5월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이 거대한 비극의 주인공은 물론 단종임금이다. 빛나는 조연은 사육신과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이며, 한남군은 조연의 조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비극적 요소를 두루 갖췄다. 왕자 신분에서의 급격한 추락, 친인들과의 헤어짐과 친인들의 죽음, 육지 속 섬으로의 유배, 가산의 몰수, 생명의 위협, 병고(病苦), 요절, 잊혀짐 등….

그것은 본인의 의지나 덕망과는 전혀 관계없는 거대한 운명의 휘둘림에 의한 것이었고, 그의 잘못이라면 형이 아닌 조카를 지지한 판단의 오류를 범한 것 뿐이다. 게다가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어갔다는 사실조차 잊혀졌으니, 이 모든 것이 후인들의 탄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이제 그의 흔적을 한번 더듬어 보자.

 

2. 제6곡 : 오서(鰲嶼) / 새우섬

 

⑴ 오서(鰲嶼)의 유래

 

물길 따라 섬의 모양이 새우등처럼 굽었다고 새우섬[鰕島/하도]이라 했을 터인데, 문제는 한자로 표시한 오서(鰲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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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우섬(사진 : 백산님/이하 동일)

 

첫째, 오서는 신선이 사는 곳의 별칭이다. 발해 동쪽에 떠다니는 다섯 개의 섬을 자라로 하여금 떠받치게 하였다는 중국 신화에서 유래한 것으로[열자(列子)], 바다 가운데 여섯 마리 거북이 떠받들고 있다는 삼신산 신화와 비슷한 류(類)이다. 따라서 오서는 삼신산 속에서도 신선이 살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래 詩 ②의 “삼신산은 바다 밖에 잠겨 있고/여기 섬이 있어 숨어 살만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선이 사는 곳이란 뜻에 방점을 찍은 것 같다.

 

둘째, 글자 그대로 섬의 모양이 자라[鰲/오]처럼 생겨서 오서라 했을 가능성이다. 하봉·새봉을 거친 지리산 줄기가 상내봉 3거리에서 갈라져 황새날등 상대날등 군계능선 등 자라의 등처럼 구불거리며 물가로 내려와 새우섬으로 모여든다. 새우섬은 자라의 머리부분에 해당된다.

거북이와 어떻게 다르냐고요? 거북이는 머리가 타원형이고 자라는 세모인데 몸체에 비하여 아주 작다. 거북은 물에서도 살고 뭍에서도 살지만 자라는 물에서만 살므로 풍수에서 자라 형국은 물가에서만 발견된다. 풍수에서 거북머리는 작은 동산이 있어야 하고, 자라머리는 그냥 납작하다.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을 배향한 현풍의 도동서원도 다람재 넘어가며 바라보면 영락없는 자라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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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우섬 인근 지도(sky-view)         ▽ 현풍 도동서원 항공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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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바닷가에서는 밀물 썰물에 따라 일부가 드러났다 가라앉았다 하는, 섬이라 하기엔 뭣한 바위를 '여'라 부른다. 검은여 흰여 큰여 작은여 쌍여 각시여 숨은여… 등. 그 여를 한자로 표기할 때 礖(여)라 하였고, 또 嶼(서)라 하기도 하였다.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편찬한 조선최고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에는 嶼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海中山, 바다 속의 산이라고. 섬이다. 또 풀이하기를 山有石在水中, 돌산이 수중에 있다고 하였으니, 바다에서는 ‘여’를, 산에서는 바위가 물에 둘러싸인 곳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래서 혹시 장마철에 잠기곤 하는 새우섬에 嶼를 붙인 것은 아닐까? 별로 가능성이 없는 얘기긴 하지만….

 

⑵ 詩로 보는 섬의 풍경

 

지리산이 걸어 내려와 엄천강에 발을 담글 때, 양화대 쪽의 바위벼랑을 치며 흐르던 물은 산부리를 감아 돌면서 퇴적물을 쌓기도 하고 쓸어가기도 하면서 산모롱이에 처마를 달아내듯 덧대어진 부분이 아마 새우섬일 것이다. 일없이 조용한 봄날엔 물위에 하얀 꽃잎이 흩날리기도 하고, 푸른 가을날엔 저기 저 물에 단풍잎을 실어 나르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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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강용하의 오서(鰲嶼)

 

  三神海外沒 (삼신해외몰) 삼신산은 바다 밖에 잠겨 있고

  有嶼可藏屋 (유서가장옥) 여기 섬 하나 있어 숨어 살 만한데

  年來頗窘甚 (년래파군심) 갈수록 자못 궁색함이 심해져

  詩成未卜築 (시성미복축) 시는 이루어도 집은 짓지 못했네.

  種蔗秋味熟 (종자추미숙) 사탕수수를 심어 가을에는 익은 것을 맛보았고

  種栗團如玉 (종율단여옥) 밤을 심었더니 둥글기가 옥 같다.

  山空月明多 (산공월명다) 빈산에 달은 매우 밝고

  活畵共君讀 (활화공군독) 그림 같은 풍경 속에 그대와 함께 독서하고파.

 

② 정환주의 오서(鰲嶼)

 

  東折復北流 (동절부북류) 물은 동으로 껶였다가 다시 북으로 흐르는데

  可結林間屋 (가결임간옥) 숲속에는 모옥을 엮을 만하고

  囂然樂畎畝 (효연낙견묘) 한가히 농사를 즐길 만하여

  有誰起版築 (유수기판축) 누군가 땅을 다져 쌓아놓았네.

  夜深人不知 (야심인부지) 사람들은 몰라도 밤이 깊어

  明月照如玉 (명월여조옥) 밝은 달은 옥처럼 빛나고

  骨霜山流句 (골상산유구) 잎 지고 서리 내린 산을 물은 구부러져 흐르니

  誕妄不可讀 (탄망불가독) 허탄하여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네.

 

물은 섬을 에돌아 흐르고 서리맞은 단풍잎 사이로 가을달은 밝게 빛날 때, 그림 같은 풍경 속에 한 사람은 같이 책을 읽고 싶다 하였고 한 사람은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냥 벗과 함께 술잔이나 나누면 되지요.

첫번째 詩의 마지막 구절 활화活畵는 살아있는 그림이란 뜻이다. 연암 박지원이 보았다면 한 마디 했을 것이다. 선생의 《열하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오니까. 「누군가 “강산이 그림 같다.”고 하자 연암이 말하였다. “그대는 강산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구려. 강산이 그림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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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 새우섬은 섬이었을까?

 

새우섬은 과거에는 섬이었다는데 정말일까? 1936년 대홍수 때 떠내려갔다거나 토사가 쌓여 섬의 모습을 잃었다는 얘기가 전하지만, 그전부터 즉 1918년 조선총독부 지도에도 이미 섬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지도에 표시된 기호 ⊥⊥⊥⊥가 제방을 나타낸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도에 표기하기엔 미미하지만 물길(또는 흔적)이 있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꼭대님의 도움을 받아 확인한 당시의 지도 부호에는, -----는 소로길이고 여기에 ㅣㅣㅣ가 겹쳐진 ⊥⊥⊥⊥(붉게 칠한 부분)은 築堆部(축퇴부)라 하여 제방‧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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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년, 조선총독부 발행 지도

 

동네노인들의 얘기로는 새우섬은 섬이었으며 제법 봉긋한 동산처럼 소나무도 우거졌고 건너다니는 노듸(*징검다리)도 있었다고 한다.[*동네노인들의 기억은 조금씩 달라서…] 홍수 탓도 있지만 홍수 대책으로 군에서 하천을 넓히고 제방을 쌓으면서 나온 토사를 새우섬에 쌓아 평평하게 고르면서 섬이 붙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위 詩 ①~②에서 묘사한 바를 보면 이름만 섬이었지 실제로는 섬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숲이 있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지을 만하고, 사탕수수와 밤나무를 심었다 했으니 단순한 모래톱은 아니었을 테고, 더욱이 푸석한 퇴적토도 아니었을 것이다. 물길이 갈라놓은 아주 작은 섬이라 하기엔 뭣하다.

 

섬이 아니라도 섬처럼 고립되어 있어 섬이라 부른 경우는 많다. 경북 영주의 ‘무섬’, 전북 진안의 竹島, 진양호의 녹두섬 등이 그렇다. 또 청령포나 회룡포도 육지 속의 섬이라 부른다. 특히 육지와 붙어 있는 강가의 삼각주를 섬이라 부르는 경우는 전국적으로 많다. 혹시 새우섬도 비슷한 경우는 아닐까?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으니, 새우섬도 어쩌면 세월 따라 섬이 되었다가 육지가 되었다가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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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계방향으로 무섬(영주) 죽도(진안) 청령포(영월) 회룡포(예천)

 

새우섬과 한남마을 양쪽 다 한남군의 유배지로 전해진다. 어느 쪽일까? 과거 고립무원의 새우섬은 중죄인의 유배지로 적합했겠지만 장마철엔 죄인은 물론 지키는 사람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새우섬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얼마 후 마을로 옮겼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맞아 떨어진다. 단종이 영월의 첫 유배지 청령포에서 2달 남짓 보내다가 장마로 인하여 읍내의 관풍헌으로 옮겼듯이.

 

⑷ 한오대(漢鰲臺)

 

조선말 한오대에서 인근의 젊은 유생들이 계를 맺었는데, 다음은 계원들의 부탁으로 강용하가 써준 서문이다. 조선말의 향촌 지식층이 한남군을 어떻게 평가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명문이다.

 

漢鰲臺契案序(한오대계안서) 한오대 계모임 문서에 쓴 서문

 

종수‧정희‧윤서君과 나의 아들 계형이 동지들을 이끌고 한남의 오서(鰲嶼)가에서 계를 맺었다. 여러해 뒤 하루는 계권(*계의 문건)을 가지고 와 나에게 한 마디 말을 청하였다. 나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고, 마음속으로 좋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곳은 단종 때 육종영 중의 한 분인 한남군 정도공 이선생의 귀양지이기 때문이다.

삼가 살펴보니 선생은 단종에겐 숙부이고 세조에겐 동생으로, 당시 양위하는 일이 매우 가까운 친족 사이에서 나왔으니 이쪽으로 가면 흉화가 이를 것이고 저쪽으로 가면 부귀가 따를 것인즉 사생존망간에 머리카락 한 올도 들어갈 틈이 없는 난처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딴마음이 없음을 마음속으로 맹세하고 큰 절개를 지켰으니 비록 아홉 번을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평소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하는 분별이 본래부터 마음속에 정해져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은나라에는 어진 이가 셋(미자·기자·비간, 모두 은왕실의 종친) 있었다.”하였고, 주자가 해석하기를, “3인의 행동은 지극한 정성과 슬피 여기는 뜻에서 같이 나왔다. 그러므로 사랑의 도리를 거스르지 않고 그 덕을 온전히 행할 수 있었다.”하였다. 만약 후세에 주자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해도 어찌 선생의 지극정성과 애통함을 인정하지 않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다만 이곳은 땅이 외지고 먼 곳이라 선생의 풍모는 세월이 오랠수록 사라져 백성들은 거의 칭송할 바를 얻지 못하고 식자들은 깊이 근심하고 길이 탄식하면서도 구제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오늘날 이 장소에서 윤서와 그 동지들이 계를 만든 일은 왕희지를 비롯한 晉나라 사람들의 난정(蘭亭)에서의 모임과 같고, 그 뜻은 선현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이다. 모임 시기는 晉나라에서는 삼짇날로 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옛날에 구애받지 않고 단오날로 정했는데 마침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인근의 유생들을 불러모아 고서를 강론하고 새로 지은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고 또 약간의 술을 준비하여 명승지를 구경한다. 강론하고 시를 읊는 일이 모두 선생의 충의에 관한 것인지라, 지난날 선생의 아름다운 행실로 인해 지금부터 길을 가다 이땅을 지나는 자는 선생이 의로움을 취한 곳임을 능히 알 것이고, 감동받아 떨치고 일어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윤서의 공이 어찌 적다 하리오? 대체로 계를 맺는 풍습이 당세보다 더한 적이 없지만 오로지 이 계만 마음에 좋다고 여기는 것은 선현의 의로움을 존모하는 뜻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계모임에 관한 일을 서술하고 선현의 충의를 상세히 언급하여 이 계의 취지를 밝힘으로써 세상의 가르침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국역 엉겅퀴/이상‧이하 동일)

 

〔宗秀正熙允瑞甫與兒子桂馨倡率同志修契於漢南鰲嶼之岸爲有年一日携契卷來請余置一言余固已聞而心韙之素矣蓋此地卽端廟朝六宗英之一漢南君貞悼公李先生賦鵩之地也謹按先生於端廟爲叔而世廟爲弟當時禪代之事出於至親難處之地與此則凶禍立至與彼則富貴自如死生存亡閒不容髮而先生矢心靡他辦此大節雖九死而靡悔若非平日熊魚取舍之辨素定于中烏能有此孔子曰殷有三仁焉朱子釋之曰三人之行同出於至誠惻怚之意故勿咈乎愛之理而有以全其德若使後世朱子復起則豈不許先生以至誠惻怛乎於乎盛哉但此地地僻天荒先生之風愈久愈泯殆乎民無得以稱焉有識者深憂永嘆而莫之能捄也今允瑞與同志修契于此其事則晉人蘭亭之會也其義則尊慕先賢之志也會期則晉以上巳而此以端陽不泥於古而適乎今也是日也招致傍近諸生講論古書歌詠新詩以永風流而又辦若干壺觴以濟勝焉其講論而歌詠之者盡是先生忠義則從今以往行路之過此地者能知先生取義之處而興起者有之矣到此而允瑞之功豈淺鮮也哉蓋契之尙莫勝於今世而獨於此心韙之者以其取於尊慕先賢之義也故今敍契事而詳言先生忠義以明此契之有補於世敎焉

 

위 서문에 의하면 한오대는 한남의 한漢과 오서의 오鰲를 따서 이름지은 것으로 보인다. 한오대 바위에는 漢鰲臺 및 李漢南君杖屨所(이한남군장구소) 각자와 계원 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과거에는 강가에 있었다던 한오대 바위가 시내 안으로 위치하게 된 것은 하천을 넓히면서 옹벽이 뒤로 후퇴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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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오대와 한남마을        ▽ 한오대 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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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설에는 한오정(漢鰲亭)이 있었다 하는데 아마 한오대가 와전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누대를 쌓는 것과 정자를 세우는 것은 다르므로, 臺가 있다고 반드시 亭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큰 장마에 정자가 떠내려갔다는 얘기는 와룡대처럼 臺 위에 인공적으로 쌓았던 축대가 쓸려갔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또 새우섬이든 한오대 부근이든 정자를 세웠다면 위 강용하의 글에 어떤 식으로든 언급이 되었을 테고, 과거에 존재한 적이 있던 루‧정‧대(樓‧亭‧臺)는 샅샅이 실려 있는 舊함양군지에도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역시 한오정은 없다. 그래서 한오정의 존재는 현재로선 의심스럽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3. 제7곡 : 한남진(漢南津)

 

⑴ 詩로 보는 한남마을

 

나는 처음에 화산12곡에서 한남진이라 하기에 진(津 *나루)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엄천강의 여러 나루 중 한남 나루의 풍치가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니고, 시의 내용도 나루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나루를 포함한 한남마을 전체를 말한 것인 성 싶다. 津은 웅진 섬진 신탄진 주문진 방어진 정동진처럼 물가에 있는 고을을 뜻하기도 한다. 뜻이 확장된 것이다. 한남마을로 해석할 때 문맥이 더 잘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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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우섬 부근에서 바라본 한남마을


① 정환주의 한남진(漢南津)

 

  千疊與孤舟 (천첩여고주) 천겹 산속의 외로운 배는

  山北又下遊 (산북우하유) 산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아래로 미끄러지네.

  兩賢當日語 (양현당일어) 두 선생(정여창·김일손)이 말하기를

  正合衡門幽 (정합형문유) 그윽하여 은자가 살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하였다오.

  繞園脩竹密 (요원수죽밀) 동산을 에워싼 긴 대숲 빽빽하고

  夾岸萬木稠 (협안만복조) 언덕 사이 온갖 나무 촘촘하네.

  王孫千載恨 (왕손천재한) 왕손의 오랜 한스러움

  無人賦綢繆 (무인부주무) 그 사연 엮어 글을 짓는 이 아무도 없구나.

 

② 강용하의 한남진(漢南津)

 

  王孫春草岸 (왕손춘초안) 왕손이 머물렀던 강언덕에 봄풀은 돋아나고

  空有鷓鴣遊 (공유자고유) 허공엔 자고새가 무리지어 날고 있을 뿐

  而無車馬喧 (이무거마훤) 거마(車馬)의 시끄러움 없으니

  人境自淸幽 (인경자청유) 사람 사는 세상임에도 맑고 그윽하네.

  月隱孤舟虛 (월은고주허) 달은 숨고 외로운 배는 비었는데

  風悲萬竹稠 (풍비만죽조) 빽빽한 대숲에 바람소리만 슬프구나.

  誰傳六宗英 (수전육종영) 누가 여섯 종친의 이름을

  竝垂於綢繆 (병수어주무) 간절히 엮어 후세에 길이 전할까?

 

③ 단성 선비 이교우(李敎宇 1881-1944)의 漢南有感(한남유감)/한남마을에서 느낀 바 있어

  漢南來到一回頭(한남내도일회두) 한남에 와서 돌아보니

  公子不來江自流(공자불래강자류) 왕자는 다시 오지 않고 강물만 절로 흐르네.

  冤恨如今何處在(원한여금하처재) 그 원통함과 한스러움은 지금 어디 있는가?

  鵑花霜葉百春秋(견화상엽백춘추) 두견화와 서리 맞은 단풍잎만 수백년 동안 여전하구나.

 

보다시피 한남마을을 읊은 시에는 한남군의 사연이 꼭 등장한다. 게다가 한 마을이 수백년간 그의 명칭으로 불리우고 있으니 억울했던 그도 이제 별 여한은 없으리라.

한시의 전통에 따르면 景(경치 풍경 경관 경물 등, 크게는 자연)과 情(감정 감성 느낌 뜻 마음 등, 크게는 사람)이 만나 시가 이루어진다 하였다. 옛사람들은 이때 景이 먼저냐, 情이 먼저냐 따지기를 좋아하였는데, 굳이 따질 필요가 있을까? 보라, 위 시에서 풍경은 마음에 투영된 풍경이며, 감정은 풍경에 촉발된 감정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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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한남군 일화

 

한남군으로 인하여 동네이름까지 한남이 되었으니 사람들은 뭐든지 한남군과 연관짓기를 좋아한다. 예를 들면 나박정 숲도 한남군이 조성했다는 식이다. 그런데 한남군은 대역죄인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형에 처해졌으며,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위리안치형이란 가시울타리를 둘러친 내문과 외문이 있고 식량은 열흘에 한번씩 제공하며 우물도 담 안에 파서 자급하게 하고 외인과 통하지 못하게 했는데 나박정 숲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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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박정(䟩泊亭) : 䟩는 잘 쓰지 않는 글자인데 머뭇거릴 ‘나’(또는 각)字로, “머뭇거리다[䟩] 자고간다[泊]” 정도로 보면 되겠다.

 

또 마을 안에 한남군의 집터였다는 ‘가대지(家垈址(地))’가 있는데, 이곳에 집을 지으면 화를 입는다는 속설 때문에 지금껏 묵은 땅으로 남아 있다 한다. 꼭대님의 말처럼 아마 한남군의 유허지를 보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이다.

또 나박정 옆의 충혼비에는 한남군이 새우섬에 있으면서 병자와 생계를 위하여 이곳으로 오갔다고 썼는데 글쎄다. 그렇게 되면 家垈址가 아니라 垈地라 해야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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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대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을 벌이고 세상의 주인이 된 자의 너그러움인지, 세조는 형제애를 과시하며 죄인들의 처형을 거부하기도 하고 현지의 수령·방백들에게 잘 보살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변덕을 부려 담을 높이고 외인들과의 소통을 철저히 금지시키라는 등 닦달을 하기도 하였다.

지옥 같은 와중에서도 그를 기쁘게 할 만한 소식은 있었다. 아들을 얻은 것이다. 1456.11.17 실록에는 “함양에 안치한 이어(李), 임실에 안치한 이전(李瑔)이 금년에 아들을 낳았으니, 소재읍의 여종을 택하여 유모를 삼고 관가에서 의복과 음식을 주라.”하였다. 정확한 날은 모르지만 그해에 아들을 보았다는 얘기다. 한남군을 함양으로 옮기라는 날(1456.6.27) 세조는 처첩과 자녀들은 원하는 대로 모여 살게 하라는 명령을 같이 내린다.

그런데 성종대에 아들 이중생(李衆生)이 올린 상소문 2개가 실록에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자신이 무인년(1458)에 태어났다고 2차례나 언급하고 있으니 모를 일이다.

 

이번에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남군은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거사모의 실패의 결과로 1457년 또는 1459년 사사(賜死)되었다는 기록이 의외로 많았다. 아닐 것이다. 아무리 이긴 자의 기록이지만 실록에 죽은 날짜까지 조작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평소 몸에 병이 있었다는 동생(영풍군)의 언급도 남아 있고, 단종 사사 이후 세조는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다 제거했기 때문이다. 단종이 사라진 마당에 한남군은 세조의 경계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남군의 원통함과 충절을 강조하다 보니 얘기가 그렇게 윤색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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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남군 충혼비

 

⑶ 한남군의 죄

 

그는 반역죄인이었지만 왕자의 신분이라 국문(鞫問)은 받지 않았고, 그래서 공초(供草 *죄인의 신문(訊問)기록)가 남아 있지 않아 반란모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선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세조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고, 그것만으로 계유정란 세력에게 죄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기다렸다는 듯 세조의 등극과 한남군의 유배일이 같은 날이었다는 것이 그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처형하라는 신하들의 요구에 세조는 한남군은 죄가 없다고까지 하였으니 실제 그에게 무슨 죄가 있었겠나?

 

그러나 왕조시대에는 복비죄(腹誹罪)라는 게 있었다. 마음속으로 비난한 죄를 말한다. 마음속으로 비난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입을 삐죽인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입을 삐죽였는지의 여부는 권력자의 의중을 헤아린 사법권자가 판단한다.

역사적으로는 한나라 무제(BC 141~87) 때에 처음 등장하는데 물론 법전에 명시된 죄목은 아니지만, 동서고금의 수많은 사람들이 복비죄로 죽어갔다. 이처럼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령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마땅히 입술을 삐죽이거나 뱃속의 생각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할지어다.

어쩌면 복비죄가 두려워 당시 왕실의 맏어른인 양녕대군‧효령대군조차 세조를 지지하지 않던 세종의 후손들을 말살하는 데 그렇게 앞장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좋게 봐준다면 말이다.

 

성리학(性理學)의 명칭은 원래 성명의리학(命義學)이었다. 의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삼은 나라에서 왕위찬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조의 거사는 맹자가 말한 폭군을 쫓아내는 역성혁명(易姓革命)도 아니었다. 늘 그렇듯이 권력 앞에서는 학문도 도덕도 인륜도 천륜도 다 소용없는 법이다. 또 루비콘江을 건너면 멈출 수도 없고.

다이호우잉의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에 이런 말이 나오더라. “동물은 서로 잡아먹을 때 아무런 이유도 대지 않는다. 인간은 서로 잡아먹을 때 온갖 명분을 갖다 붙인다.”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신의 영광을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세상의 평화와 질서를 위하여 등….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욕망 이익 명성 권력욕 등 자신의 내부에 있을진대 그 명분은 항상 외부에서 끌어온다.

 

한순간 인간이기를 포기하였다 해도 마냥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세조는 정통성의 결여에 대한 콤플렉스와 찬탈 트라우마에 평생을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조 선비들도 조의제문(弔義祭文) 등에서 보듯이 원죄의식 비슷한 딜레마에 짓눌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상 피를 밟고 권좌에 올랐어도 의외로 쿨하게 과거를 리셋하고 미래에 집중한 군왕들도 많았다. 반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랐는데…” 하면서 정적(政敵)의 눈흘김 한 번도 잊지 않는 지도자를 가진 나라의 국민은 불행해진다. 그건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4. 후일담

 

⑴ 신원(伸冤 *원통함을 풂)

 

사후 그는 아들 이중생의 상소로 1485년(성종 16년) 고신(告身 임명장)과 가산을 돌려받았고, 또 1534년(중종 29년) 선원보(璿源譜 *왕실족보)에 다시 이름을 올렸으며, 명종대(1545-1567)에 관작을 회복하였고, 1742년(영조 18년) 정도공(貞悼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호(諡號)는 정해진 글자(194자에서 301자로 확대) 내에서 조합하여 짓는데, 문신은 文을 무신은 忠을 가장 선호했다 한다. 정도공의 정(貞)은 보통 ‘깨끗이 절개를 지키다(淸白守節)’는 뜻을 취하지만 아래 교지(敎旨)에서 보다시피 여기서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비굴함이 없다(不隱無屈)’는 뜻을 취하였고, 도(悼)는 ‘두려워 거처를 옮기다(恐懼徙處)’의 뜻을 취하였는데 보통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도(悼)처럼 ‘일찍 죽어 슬프다’는 뜻을 많이 취한다.

사진의 교지에는 날짜가 건륭14년(1749)으로 되어 있지만 실록에는 시호를 내린 것이 영조 18년(1742, 건륭 7) 12월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교지를 분실하여 이후에 재발급 받은 것으로 보인다. 후손들이 재발급을 요청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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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박정에 걸려 있는 한남군의 정도공 시호 추증 교지(사본)

 

⑵ 신위 배향(神位配享)

 

1791년(정조 15년) 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신하들을 장릉(莊陵 *단종릉)에 배향하였고[ 정단(正壇) 32인, 별단(別壇) 198인], 종실(宗室) 6인도 육종영(六宗英)이라 하여 정단에 모셨는데, 안평대군 용(瑢)‧금성대군 유(瑜)‧화의군 영(瓔)‧한남군 어()‧영풍군 전(瑔)‧판중추원사 이양(李穰)이 그들이었다.

장릉 외에도 그의 신위를 모신 곳은 충북 청원의 죽계서원(竹溪書院), 포천의 충목단(忠穆壇),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 함양의 송호서원(松湖書院) 등 모두 5곳이다(장릉 포함).

죽계서원은 1738년(영조 14년) 안평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고, 충목단은 1746년(영조 22년) 사육신 중 유응부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제단이며, 숙모전은 김시습이 동학사에서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낸 것이 시초이며 세조가 초혼각을 지어 당시 희생자들의 초혼제를 지내게 했다 하며 확장되어 1904년 숙모전으로 바뀌었다.

송호서원에 배향된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이지활(李智活 1434~?)은 이조판서 이비(李棐)의 아들인데,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바로 벼슬을 버리고 함양 백전으로 은거하였다가 다시 거창 박유산(朴儒山)으로 들어가 스스로 호를 고은(孤隱)이라 일컫고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산속에 망월정(望月亭)을 짓고 조석으로 북쪽을 우르러 절하였고, 단종이 죽자 세상에 뜻을 잃고 매일 술로써 날을 보내며 통곡하다 죽었다 한다.

1830년(순조 30년) 고을선비들이 함양 병곡에 송호서원을 세우고 이지활을 제향하였으며, 1832년 한남군과 이지활의 손자 이지번(李之蕃)을 함께 배향하였다.

 

한남군의 사당은 충주 용관동에 있으며 뒤에 후손들이 그리로 많이 이주하였다 한다.

 

⑶ 한남군 묘(墓)

 

그의 묘는 함양읍 상림 뒤에 있다. 옛 묘비는 1557년(명종 12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때 한남마을 부근에서 묘를 이장했는지 아니면 원래 그 자리에 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되, 묘비는 그때 처음 세웠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명종 초에 한남군의 관작회복과 더불어 비로소 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1713년(숙종 39년) 왕자의 예우에 맞게 개장하였는데[禮葬] 숙종대에 이루어진 단종릉 및 사육신 등의 묘 개장(改葬)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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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남군 묘        ▽ 옛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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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용은 『천령악부(天嶺樂府)』(총50首 1905년作)에서 한남군 묘를 지나며 「王子怨(왕자의 원한)」이란 시를 지었다. 천령은 함양의 옛이름이고, 악부는 고대에는 노래가사였는데 그 기능은 점차 퇴색되고 민간의 인정‧역사‧풍속을 노래한 시를 말하며 시체(詩體)가 비교적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다.

 

  咸陽原上春草綠(함양원상춘초록) 함양의 무덤 위 봄풀 파릇파릇 돋아나고

  野老年年呑聲哭(야로년년탄성곡) 시골의 늙은이는 해마다 소리죽여 운다네.

  雨淋翁仲面(우림옹중면) 비에 젖은 석상의 얼굴도

  宛如墮淚雙(완여타루쌍) 흡사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듯.

  冤魂竟不死(원혼경불사) 원혼은 끝내 죽지 못하고

  夜夜隨月照漢江(야야수월조한강) 밤마다 달빛 따라 한강을 떠도네.

  一朝被嚴譴(일조피엄견) 하루아침에 엄한 견책을 받았으니

  臣罪誠不淺(신죄성불천) 신하된 자의 죄는 실로 가볍지 않고

  友道不可缺(우도불가결) 벗의 도리는 없어서는 안되지만

  兄罪不可顯(형죄불가현) 형의 죄는 드러낼 수 없으니

  一死復何言(일사부하언) 한번 죽었으니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千秋應有辨(천추응유판) 먼 훗날엔 응당 밝혀지리니.

 

⑷ 단계동천(丹溪洞天)

 

이 글을 마무리 짓기 전에 단계동천(丹溪洞天) 얘기를 해야겠다. 丹溪洞天 각자는 새우섬 맞은편 냇가의 조은대(釣隱臺) 각자 바위 옆면에 새겨져 있다. 투박한 글씨체에 년대도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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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계동천 및 조은대 각자 바위

 

丹溪 하면 떠오르는 것이 2가지 있다. 하나는 사육신 하위지(1387-1456)선생의 호이고, 둘은 과거 산청의 단성‧신등 일대를 단계라 하였으며 그 흔적은 지금도 신등면의 단계천과 단계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길에 있다. 그러나 둘 다 여기의 단계동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다른 문헌에서도 아직 단계동천에 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추정해보는 수밖에. 새우섬과 한남마을 사이에 위치하여 새우섬을 마주한 점을 주목해보자. 역시 한남군과 연관지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한남군의 丹心(일편단심‧충정)이 흐르는 시내”라는 뜻으로 후세에 누군가 이름 붙인 것은 아닐까? 洞天이야 경치 좋은 별천지라는 의미로 붙였을 테고.

동네주민들도 모른다 하고, 기록이 있다면 좋겠지만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정황상 단계동천은 그의 단심을 기리는 명칭으로 생각된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5. 마무리

 

세조와 한남군 새우섬을 엮다 보니 느닷없이 이 시가 생각났다. 17C 영국 시인 John Donne(1572-1631)의 詩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이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느니라.

- 기도문 중에서

For Whom the Bell Tolls

No man is an Iland, intire of it selfe; every man is a pe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rine; if a Clod be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e, as well as if a Promontorie were, as well as if a Mannor of the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세조는 조카와 형제를 죽이는 것은 자기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알았어도 멈추지는 않았겠지만. 그리고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 또한 비슷하겠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삼국지(삼국지연의)의 序詩를 변형하여 감회를 읊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굽이쳐 흐르는 저 엄천강

   지난날의 슬픔 안타까움 원통함을 다 씻어가 버려

   시비성패가 모두 물거품 같구나.

   그동안 석양빛은 몇 번이나 붉었던가?

   청산은 그대로이고

   그날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강물은 유유히 흐를 뿐

   옛일을 술잔 속에 붙여보네.

<끝>



자료 : http://jiri99.com/bbs/board.php?bo_table=jiri11&wr_id=101315(지리산 아흔아홉골)

            위 글은 엉겅퀴님의 허락을 득하고 옮겨 온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