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향자료

제8곡, 독립정(獨立亭)은 어디인가?(함양 휴천면 엄천강 주변)

배꼽마당 2017. 2. 6. 14:37

1. 제8곡, 독립정(獨立亭)은 어디인가?


(경남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 앞 사랑소 풍경)


 

엄천강물은 굽이굽이 쉼 없이 흐르건만 나의 화산12곡 탐사는 한동안 흐름을 멈추었다. 공자도 시냇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는 것은 이와 같구나. 주야로 그치지 않는구나.(逝者如斯夫 不舍晝夜)” 어정어정 하다 보니 또 한 해를 넘겼다.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밀쳐놓다 보니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독립정의 위치를 확정짓지 못하다 보니 문제를 풀어나갈 수가 없었다. 과거의 웬만한 루·정·대(樓 亭 臺)의 흔적은 거의 기록에 남긴 천령지(天嶺誌)나 舊함양군지에도 독립정은 등장하지 않았다. 동네 노인분들의 기억에도 독립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작년초 화산12곡을 전체적으로 처음 소개할 때, 독립정의 위치는 대략 운서보(湺) 위 어디쯤일 것이라 했지만 어느 지점을 꼭 집어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 나머지 11곡은 지형지물이나 기록, 주민들의 증언 등으로 어쨌거나 위치를 비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정은 별로 진전이 없었다. 그렇다고 8곡은 놔둔 채 9곡으로 건너뛸 수도 없었다. 

 

그러다 《한국지명총람(1964-1986)》 함양편에서 '외정자나무터'를 발견하였다.

  「외정자나무터 : 봇골 옆에 있는 터. 봇골 : 원기동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보가 있음.」

무릎을 쳤다. '외정자'를 한자로 옮기면 '독립정(獨立亭)'이 아닌가? 아울러 봇골[湺]을 찾으면 되었다. 다시 한남마을로 달려갔다. 노인들은 정자나무터는 대부분 기억하였다. 드디어 정자나무 옆에 정자도 있었다고 증언해 주는 분도 만났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짐작한 곳이었다.

새우섬을 돌아내린 물은 한남마을을 지나 거의 90°도 방향으로 꺾인다. 독립정은 이 곡각지점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위로는 새우섬과 섬을 에돌아 내리는 물, 아래로는 운서보 어귀까지 곧게 뻗은 엄천, 맞은편으로는 강 건너 들판과 구불거리며 물가로 내려오는 산줄기까지 한눈에 아우를 수 있는 곳이다. 맞은편에서 보면 암대(巖臺)가 받치고 있으니 정자터로는 더욱 적합한 곳이다.

정자는 눈맛이 좋은 곳에 세운다는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지날 때마다 정자가 있었다면 이곳이었을 거라는 심증은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의 물증도 확보한 셈이다. 더 이상의 위치 추적은 가능성도 의미도 없을 것 같아 나는 독립정터는 이곳이라 결론 짓는다. 도로가 나기 전에는 오솔길이었는데 봇골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고 거기를 건너다닐 땐 좀 무서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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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 봇골 옆에는 화남대(華南臺)가 있다. 화남은 화산(법화산) 남쪽을 뜻한다. 모실(지곡)에 있었던 화남초등학교도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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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산님과 사진촬영을 가기로 했으나 백산님의 카메라가 다시 고장나는 바람에 같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진이 허접하더라도 이해하시라.

 

2. 독립정의 풍경

 

① 강용하의 獨立亭

 

  湖上獨立亭(호상독립정) 호수 위의 독립정

  嘉名誰所始(가명수소시) 아름다운 그 이름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나?

  明則有禮樂(명즉유예악) 밝은 시절에 예악을 베풀던 곳이

  幽則有神鬼(유즉유신귀) 어두운 시절엔 귀신들의 차지가 되었구나.

  求馬先買骨(구마선매골) 천리마를 구하려면 먼저 말뼈를 사야 하고

  獲禽恥遇詭(획금치우궤) 짐승을 잡을 때도 속임수는 부끄러운 법.

  千載從容子(천재종용자) 천년 동안 변함없이 흐르던 그 곳에

  空有舊橋圮(공유구교비) 무너진 옛 다리만 부질없이 남아 있네.

 

독립정, 홀로 서 있는 누정. 시인이 새삼스레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나?” 했으니 거기에는 단순히 문자 이상의 뜻이 있을 거라고 본다. 내 생각엔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표표호여유세독립 우화이등선(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훨훨 날아 속세를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쳐 신선이 되어 오르는 것 같다)”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냥 혼자 서 있다고 독립정이 아니라, ‘홀로’라는 말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 담겨 있고, 당당하고 거칠 것 없이 서서 속세를 벗어나 신선세계로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여 곧 훨훨 날아오를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는 뜻으로 읽어야 詩의 첫연(首聯 *1,2구)은 물론 독립정이라 이름 지은 연유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에 등장하는 고사는 2가지이다.

옛날 어떤 임금이 千金으로 천리마를 구하려 했지만 구하지 못하자, 신하가 나서서 죽은 천리마를 오백금으로 사왔다. 임금이 크게 노하자 신하가 말하였다. “죽은 말도 오백금이나 주고 사는데 하물며 산 말이야 어떻겠습니까? 천하가 반드시 임금께서 말을 살 줄 안다고 여기고 곧 좋은 말이 모여들 것입니다.” 과연 그러하였다. 인재등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비유한 말이다.(출전 《전국책(戰國策)》)

또 하나는, 사냥을 할 때도 포획하는 짐승 수만 늘리려 하지 말고 정당한 룰에 따라 잡으라는 말. (출전 《맹자》)

시인의 말인즉슨, 천년동안 변치 않던 정당한 도의는 이제 무너진 다리처럼 폐허만 남았다는 얘기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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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정환주의 獨立亭

 

  亭亭獨立亭(정정독립정) 우뚝 서 있는 독립정

  問津從此始(문진종차시) 나루를 묻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네.

  沮溺雖曰賢(저익수왈현) 장저와 걸익을 비록 현인이라 했지만

  陰符肯云鬼(음부긍운귀) 음부경에선 귀곡자도 그렇다 하였네.

  文獻洞是徵(문헌동시징) 이는 문헌동으로 증명이 되니

  慕華臺非詭(모화대비궤) 모화대도 빈말이 아니네.

  滄海虛無人(창해허무인) 창해는 비어 사람이 없으니

  誰從耍步圮(수종사보비) 누구와 같이 즐거이 무너진 곳을 거닐어 볼거나?

 

정정(亭亭)하다는 말은 “노인네가 정정하다”고 할 때의 그 정정이다. 허리가 구부정하지 않고 꼿꼿하다, 또는 건물이나 산이 우뚝하다는 말이다.

나루를 묻는다[問津]는 말은 논어의,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밭을 갈고 있었는데, 공자가 지나가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터를 묻게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후세에는, 단순히 길을 묻는다는 의미에서, 나아갈 길, 학문의 道, 세상을 구제할 방도 등을 묻는다는 말로 확장되어 사용되었다. 또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의거하여 이상향‧무릉도원 가는 길을 묻는다는 ‘도원문진(桃源問津)’의 의미도 있다.

논어에서도 현자피세(賢者辟(避)世)라 하여 현명한 사람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숨는다 했으니, 장저와 걸익은 은둔한 현자였을 거라는 얘기가 옛날부터 있어왔다.

《음부경(陰符經)》은 도가에서 천기를 감추어 둔 신서(神書)로 치며, 자부선인이 황제 헌원에게 전하였고, 강태공과 귀곡자 및 제갈량을 거쳐 맥이 이어졌다는 말도 있다. 귀곡자는 전국시대의 은자로 종횡가인 소진과 장의가 귀곡자로부터 배웠다는 얘기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전한다.

 

강용하는 문헌동 주변의 경치 좋은 곳에 대(臺)를 쌓고 거닐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영언대·와룡대·모화대 3곳이었다. 영언대는 제3곡 병담에서, 와룡대는 제5곡 와룡대에서 보았고, 모화대는 문하마을 서쪽 경로당 뒤에 있다. 모화대(慕華臺)는 말 그대로 중화(中華)의 문물과 제도, 성인의 도의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그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함에 융성했던 중화의 문화가 더욱 생각난다 하였다. <모화대 : 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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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고 우뚝한 독립정을 보니 가까이에 내가 찾는 이상향이 있을 것 같아 물어본다. 거기엔 어진 사람들이 숨어 살겠지. 옛날 김일손‧정여창 두 선생이 ‘살 만한 동네’라고 칭한 문헌동이 그런 곳이 아닐까. 게다가 모화대가 있어 아름다운 풍속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이 넓은 세상에는 뜻이 맞는 사람이 없으니, 무너진 다리를 세우듯 땅에 떨어진 도의를 누구와 더불어 붙들어 세울까? 바로 그대(강용하)가 아니겠는가?

나는 정환주의 시를 이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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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정터에서 바라본 상류(한남마을)       ▽  독립정터 조금 윗쪽에서 바라본 독립정터와 운서보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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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9곡, 사량포

 

① 강용하의 師良浦

 

  師良門弟賢(사량문제현) 스승은 어질었고 제자들은 현명했던

  世遠我心傷(원세아심상) 그런 세상이 멀어져 나는 마음 상하네.

  嗟嗟懷襄界(차차회양계) 아, 홍수에 뒤덮여 있는 세상

  孰能障瀾狂(숙능장란광) 누가 저 미친 물결을 막을 수 있을까?

  沙暖鷺熟夢(사난로숙몽) 모래가 따뜻하여 백로는 깊은 꿈에 빠졌고

  山明木生光(산명본생광) 산색은 밝고 나무는 빛나네.

  何日良師遇(하일양사우) 어느날 좋은 스승을 만나

  庶幾吾道張(서기오도장) 나의 道를 신장시킬 수 있었으면….

 

지금도 사랑소(사량포) 옆에는 손바닥 만한 모래밭이 남아 있다. 백로가 깊은 잠에 빠진 모래밭은 이 모래밭에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강지주(跡隱 姜趾周 1856-1909)는 동강대(桐江臺) 詩에서(*제10곡 칠리탄 참조)십리 모래밭에는 한가한 갈매기(閒鷗沙十里 한구사십리)”라 하였다. ‘십리’는 과장이 섞인 말이지만 당시 칠리탄 강변은 모래밭이었단 얘기다. 지금도 물가로 내려가 보면 고수부지와 갈대밭, 돌들이 밀려와 촘촘이 박힌 냇가의 바닥은 전부 모래이다. 아마 시인은 이 넓은 모래밭을 지칭하면서 물이 깊은 사랑소가 먹이가 풍부하여 백로가 자주 날아와 쉰다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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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정환주의 師良浦

 

  師良復師良(사량부사량) 스승은 어질고 또 어질어야 하느니

  我思正自傷(아사정자상) 생각하니 (나는 그렇지 못해) 진정 마음 상하네.

  山水兼仁知(산수겸인지) 산과 물은 인자(仁者)와 지자(知者)를 아우르고

  工夫異聖狂(공부이성광) 공부는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을 가른다오.

  信如山岳重(신여산악중) 믿음은 산악처럼 무거워야 하고

  明如日星光(명여일성광) 밝음은 해와 별처럼 빛나야 하는데

  寄語龜南子(기여구남자) 그대 구남자에게 말하노니

  此事孰主張(차사숙주장) 이 일을 주관할 이 누구인가?

 

구남자는 강용하를 말한다. 그는 연화동에 구남정사(龜南精舍)를 짓고 독서하였다. 풍수상 동네 뒷산이 거북이 형상이라고 龜南이라 했다 한다. 이런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그대 구남자가 좀 해달라는 뜻으로 읽으면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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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량인가, 사랑인가?

 

사량포는 지금의 사랑소(쏘)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이때 소는 소(沼)가 아니라 여울과 대조되는 우리 고유어 ‘소(쏘)’임은 이미 3,4곡(수잠탄, 병담)에서 언급한 바 있다.

삼포 구포 마포 개포 미포 남포 영산포 삼천포 백운포 등 우리나라에 浦가 붙은 지명은 수천 개나 된다. 대체로 바다든 강이든 시내든 배를 댈 수 있는 포구를 일컫는다. 그러나 사량포는 포구는 아니지만 모래사장도 있고 물 깊고 경치 좋은 곳이니, 옛날 여기서 뱃놀이할 때 잠깐 나룻배를 댔는지도 모를 일이다.

뒤로는 차도가 나고 앞에는 토사물이 강에 밀려와 쌓여 옛날 화산12곡을 읊을 당시의 풍경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벼랑과 절벽가의 나무 그림자가 깊은 소에 어리고, 맑은 물가에는 제법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모래밭에서 졸고 있던 백로가 깨어나 고기잡이 조각배를 따라 오르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쬐끔 가까워지려나?

한국지명총람에 사량진 사량도 사량동 사량골 사량리 등 사량이 들러간 지명은 의외로 많다. 한자로 옮긴 것을 보면 士良 思良 四梁 蛇梁 등 제각각이다.

또 사랑산 사랑봉 사랑고개 사랑바위 사랑촌 사랑말 사랑동 사랑소 등 사랑이란 지명도 무수하다. 士郞 舍廊 寺廊 沙浪 등 한자 표기도 지맘대로다.

지명의 어원은 아마 사량이든 사랑이든 우리말 사랑에서 유래한 것 같은데 조금 추적해 보다가 내 능력 밖이라 그만두었다. 워낙 제각각이라 패턴을 찾을 수 없었다. 한자 표기도 덩달아 춤을 추고, 현재 표기한 한자 이름을 가지고 거꾸로 유래를 추적하여 끼워맞추는 식이다 보니 설득력이 별로 없다.

사랑하는 연인이 빠져죽었다는 전설이라도 있어 ‘사랑소’가 되었는가 싶어 수소문해 봤지만 모르겠단다. 나는, 모래 沙(사) 물결 浪(랑), ‘모래밭에 물결이 이는’ 沙浪도 좋은데, 강용하는 師良(스승은 어질고)을 선택하였다. 아마도 샌님 같은 유학자의 면모가 발휘된 것 같다. 설마 당시 촌사람들이 師良浦라 불렀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언어는 권력’이라고 하는가 보다. 그러나 지금은 사량포는 그 어디에도 없고 사랑소만 남았으니 권력 또한 무상한 것이다. <끝>


 


자료 : http://jiri99.com/bbs/board.php?bo_table=jiri11&wr_id=102679  (지리산 아흔아홉골 홈, 글쓴이 엉겅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