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이야기

용유담의 가을

배꼽마당 2014. 10. 19. 20:13

 

 

 

용유담
                                                           김용규

전설이 숨을 쉰다 청자빛이 꿈틀댄다
태초의 그리움마저 혼을 담아 용솟음치고
심장이 터질듯함에 산빛 물빛 휘감아돈다

인고의 세월 견디고 부활의 강 다스려 안고
기나긴 인내의 혼 그 정성이 갸륵하구나
에덴의 빗장을 열고 정을 다듬는 어여쁨이여

무당 굿소리에 설움 묻고 한을 묻고
하늘을 다스리고자 번뇌를 다스리고자
산천에 기도한 정성 사무치도록 아롱져 익어라

 

 

 

 

 

 

 

 

 

 

 

 

 

 

 

 

 

 

 

 

 

 

 

 

 

 

 

 

 

 

 

 

 

 

 

 

 

 

 

 

 

 

 

 

 

 

 

 

 

 

 

 

 

용유담 지나가면

강희근(시인, 전 경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용유담 지나가면
용 한 마리 꼬리 치며 하늘 오르는
것 볼 수 있을까

꼬리 치는 바람에 튀겨지는 물방울
비로 떨어지는
떨어지며 우뢰날 찍어내리는 것 볼 수 있을까

비늘이 햇날로 소용돌이 치고 난 뒤
도사 한 분 막대기 들고
백장발 억새 위에 얹히어 산능선으로 오는 것
볼 수 있을까

산능선 다하는 바위 짬 서서
막대기 물 찍어 후욱 내흩이면
도사여 그 물이 점 점
오십리 밖 소나기로 내리는 것 볼 수 있을까

오, 용유담 지나가면
흉년도 가난도 한 생애 업보도 비추어
탕감의 은전
설화 같이 내리는 것 볼 수 있을까

참말로 용 한 마리 꼬리 치며 하늘 오르는
것 볼 수 있을까




용유담

山草/곽태성


황금빛 용비늘
푸른 물결에 씻어
아홉 마리 용
전설의 나들이
그 얼마나 장엄했으랴

알수 없는 깊이에
바람마져 떨며 스쳐가고
꼬랑지 세워 승천할제
하늘 문이 열리고
천둥 번개 울었더라

아!내고향 전설이
용트림 하나니
하늘아래 첫 동네
등구마천 하늘에
태고의 용 울음이 솟구치구나

거센 물살이
바위를 깍아
억겁의 세월이
둥글게 터 잡고
소용돌이 물속에 노니는 다슬기떼
용비늘 타고 잿빛 하늘로 가잔다.



용유담

뇌계 유호인

산과 계곡이 이 같이도 좋아서
천천한 걸음으로 나 다시 찾아왔네

은은하게 피어난 꽃 아름다운 빛
망망한 하늘에는 새 그림자 돌아오네

높은 벼랑은 영지 못에 떨어지고
맑은 낮 바람 소리 높이 우누나

놀란 용들아, 낮잠에서 깨어라
그대 불러 한 바탕 웃어 보리라
.


뇌계 유호인선생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뇌계(溪).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봉상시부봉사(奉常寺副奉事)가 되었다. 147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1480년 거창현감이 되었다. 이어 공조좌랑·검토관을 거쳐, 1487년 노사신(盧思愼)
등이 찬진한 〈동국여지승람〉 50권을 다시 정리해 53권으로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뒤 홍문관교리로 있다가 1488년 의성현령으로
 나갔으나, 백성의 괴로움은 돌보지 않고 시만 읊는다 하여 파면되었다.1490년
〈유호인시고 兪好仁詩藁〉를 편찬했다.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1개월도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시·문장·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3절(三節)로 불렸다. 특히 성종의 총애가 지극했는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관직(外官職)을 청하여 나가게 되자 성종이 직접
 시조를 읊어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저서로
〈임계유고〉가 있다. 장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용유담 시문(佔畢齋集卷之七)


김종직

용유담의 위는 여러 산봉우리의 중턱인데 / 龍遊潭上亂峯腰
높이 솟은 팔천봉에 잔로가 멀리 보이누나 / 八蒨穿雲棧路遙
빗속에 바위 위에 앉아 점심을 먹고 나서 / 雨裏巖頭澆飯罷
세 사람이 길이 읊으니 산꼭대기 메아리치네 / 三人長嘯響山椒

용유담 가에는 돌들이 오랫동안 닳아서 / 龍遊潭畔石磨礱
작은 것은 술동이 같고 큰 것은 구덩이 같네 / 小若窪樽大埳空
조화옹이야 이를 용이하게 만들어 냈으리 / 造化兒能容易辦
푸른 절벽에 머리 돌려 자연의 이치 상상하노라 / 蒼崖回首想鴻濛

용유담 밑에는 우레 소리 사라졌으니 / 龍遊潭底泯雷音
응당 지난해 오늘의 마음을 알리로다 / 也識前年此日心
가뭄 풀고 마른 것 소생시켜 다시 응험 있으니 / 沃暵蘇枯還有應
굳이 혹약으로 장마비 만들 것 없겠구려 / 不須或躍便爲霖

용유담 아래는 물이 기름같이 맑아서 / 龍遊潭下水如油
하늘 그림자 맑고 나무 그림자는 빽빽한데 / 天影澄澄樹影稠
사람의 한 치 마음의 참모습과 똑같아 / 方寸人心眞箇樣
거센 물결 지나자마자 안온한 흐름이로다 / 纔離激盪卽安流

 

 

 

*500년전 함양군수였던 김종직 선생이 용유담에서

기우제를 지낼 당시의 기록문임

 

점필재집 시집 제7권

 

칠월 이십 팔일에 용유담에서 비를 빌다

 

 

○ 그 첫번째[其一]


양쪽 절벽이 급한 여울 동여매어 / 兩崖束崩湍
십 리 밖까지 우레 소리 들리네 / 十里聞雷吼
돌 모양은 스스로 천태만상이요 / 石狀自千萬
그 위에는 굴혈들이 많이 있으니 / 其上多嵌竇
아마 여기에 신룡이 사는가 하여 / 疑是神龍居
몸 굽히고 두 번 머리 조아리노라 / ??再稽首

 

○ 그 두 번째[其二]

 

푸르고 푸른 저 천왕봉에 / 蒼蒼天王峯

구름 안개가 수증기처럼 일어나더니 / 雲霧若??
삽시에 쓸어 낸 듯 활짝 걷히어 / 須臾劃開豁
초목이 선명해서 셀 수도 있겠네 / 草木粲可數
나는 산 구경 하러 온 게 아닌데 / 我行非爲山
어이해 구름 일고 비오지 않는고 / 膚寸胡不湊


 

○ 그 세 번째[其三]


거주민들이 스스로 단결하여 / 居民自團結
시냇가에 띳집을 지어 사는구려 / 茅屋臨溪水
청학동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 舊聞靑鶴洞
이 마을이 바로 그 곳인가 싶구나 / 玆村無乃是
몹시도 부끄러워라 부로의 말이 / 深?父老言
지금 조세 독촉하는 아전이 있다 하네 / 今有催租吏


 

○ 그 네 번째[其四]


원숭이 부르짖고 새도 지저귀어라 / 猿呼鳥復?
사방 산천이 어느덧 저물었는데 / 四山忽已暮
돌아든 물가에서 향초를 캐니 / 回汀?杜若
잎마다 서늘한 이슬이 젖어있네 / 葉葉沾凉露
이내 부들 자리로 가서 자노니 / 聊就蒲薦眠
가을 소리가 높은 나무에서 나누나 / 秋聲在高樹

 

○ 그 다섯 번째[其五]

 

고미로 지은 도시락밥을 먹고 나서 / 行廚飯菰米
밤에는 바위 밑 의지하여 자는데 / 夜依巖下宿
머리 쳐드니 은하수만 바라보일 뿐 / 擡頭望雲漢
뭇 돼지 목욕하는 건

못 보겠네 / 不見群?浴
부끄럽다 농사 걱정하는 정성 없기에 / 愧無憫農誠
신룡이 응당 눈을 감아버렸겠지 / 神龍應瞑目


 

[주D-001]뭇 돼지 목욕하는 건 :

비가 올 징조를 뜻함. 돼지는 본디 비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날이 오래도록 비가 오려면 돼지들이 나가서 물을 건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용 유 담(龍 遊 潭)

所 在 地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함양의 지리산 북쪽 명승지로서 엄천강(嚴川江)의 상류에 있다. 용유담을 깃점으로
 해서 상류를 임천이라 한다.강 동편에는 최근에 새로 가설해 놓은 용유교가 우람하게 있으며,
하늘이 만든 방과 같은 수많은 바위와 괴석은 기이하고 반석은 요철 모양으로 절묘하여
 장관이다.용유담에는 나귀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돌이 있고, 마적(馬蹟) 도사와 아홉 마리
용에 얽힌 전설이 있다. 도로변에는 구룡정이 있는데 아홉 마리의 용을 기리기 위하여
구룡정을 세웠다. 바위에 용유담, 용담입문(龍潭入門) 용담형승(龍潭形勝)등의 각자가 있다.
용유담의 조금 아래 지방 도로에서 강 건너편에는 김종직, 남명 조식 선생에 관한 각자가 새겨져
있어서 남명 조식 선생도 용유담을 다녀간 흔적이라 할 수도 있다. 1489년 김일손의
<속두류록>, 1586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1643년 박장원의
 <지리산기>,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 1790년 이동항의 <방장유록>에서
 용유담의 기기묘묘함과 아름다운
 절경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를 해 두고 있다.




용유담에서 가까운 휴천면송전리 송대마을, 송대마을은 지리산 바로 아래의 마을이기에
1962년까지 빨치산들의 출몰이 잦았고 3km 상단부의 선녀굴에서 마지막 빨치산
3인방 이은조, 정순덕, 이홍이 중 이은조가 사살당했고 정순덕, 이홍이는 다음해
산청에서 경찰에 의해 이홍이 사살, 정순덕은 대퇴부
총상을 입고 생포하게 된다)


*https://blog.daum.net/yk8968/142?category=2254168 (지리산 선녀굴과 마지막빨치산 정순덕)

의 이야기 참조




*세진대는 용유담 관련 마적도사 장기판과 관련이 있는 곳이며
용유담 바로 인근에 존재한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기록된 용유담

*김일손(1464 ~ 1498)의 두류기행록(1489년 4월 14일 ~ 4월 28일)



시내를 따라 북쪽 기슭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용유담(龍遊潭)에 이르니,
못의 남북이 유심(幽深)하고 기절하여 진속(塵俗)이 천리나 가로막힌 것 같다.
정숙(貞叔)은 먼저 못가 반석 위에 와서 식사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으므로, 점심을
먹고 드디어 출발하였다. 때마침 비가 개어 물이 양편 기슭에 넘실거리니

 못의 기묘한형상은 얻어 불 수 없었다. 정숙이 말하기를, “이곳은 점필공(佔畢公)이
군수로 계실 적에 비를 빌고 재숙(齋宿)하던 곳이라.” 한다.
못가의 돌이 새로 갈아놓은 밭골과 같이 완연히 뻗어간 흔적이 있고, 또
돌이 항아리도 같고, 가마솥도 같은 것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백성들은 이것을 쉽게 사용하는 기명(器皿)이라고만 하며 자못 산골물의 물살이 급해서
 물과 돌이 굴러가면서 서로 부딪기를 오래하여 이 모양을 이룬 줄을 알지 못하니,
세민(細民)이 사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허황한 말만 좋아하는 것이 너무도 심하다.

*양대박(1543 ~ 1592)의 두류산기행록은

1586년(선조19년) 9월 2일에서 9월 12일까지의 지리산 유람을 기록한 것이
청계집에 실려있다.느지막이 거문고 타고 노래하고 피리 부는 기생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한 노승이 길 안내를 자청하여 그와 함께 갔다. 마침내 문을 나서 시내를 따라 10여 리를 가니
 물은 더욱 맑고 바위는 더욱 길쭉길쭉하였다. 언덕엔 서리 맞은 나무가 서 있고, 길가엔 소나무
∙홰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나귀타고 길 가는 우리의 모습이 완연히 그림 속의 풍경
같았다.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니, 더딘 것도 그다지
 싫지 않았다. 용유담 가에 도착해 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곳은 가까이서 구경하기
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위대하고나,
조물주가 이 경관을 만들어냄이여. 비록 한창려(韓昌黎)나 이적선(李謫仙)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수수방관하며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우리들이 어쩌겠소. 차라리
시를 읊기보다는 우선여기서 술이나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껏 즐기다가 파하였다. 오춘간이 못내 재주를 발휘하고 싶어 시
한수를 지었다. 그중에서 “신령들의 천 년 묵은 자취, 푸른 벼랑에 남은 흔적 있네”라는
구절은 옛 사람들일지라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구니, 어찌 잘 형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박여량(1554 ~ 1611)의 두류산일록(1610년 9월 2일 ~ 9월 8일)

우리는 바위에 오르기도 하고, 냇물을 굽어보기도 하고, 서성이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앉아서 휘파람을 불기도하였다. 동쪽으로 보나 서쪽으로 보나 그 장엄한 경관이
빼어났고 수석도 기괴하였다. 내가 둘러앉아 신군이 가져온 술을 마시자고 하였다. 좌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용이 놀던 곳이라서
 이런 기이한 자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지가 개벽한 뒤에 물과 돌이 서로
부딪치고 깎여 돌출되거나 구멍이 뚫리거나 우뚝 솟거나 움푹 패여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대꾸하기를 “다만 세상에서 전하는 대로 보는 것이
 옳지, 굳이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용유담에서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 박여승과 그의 사위는
그 다리를 건너 가장 높은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아찔하였다. 또 따라가는 종들에게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나는 늘그막에 이르러 지세가 험한 곳에 이르면
천천히 지나도 두려운 마음이 항상 마음속에 가득하다. 그러나 박여승은 40세의
한창 때인지라 기운이 왕성하고 의지가 강해 나갈 줄만 알고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바위 위로 올라간 것이다.

* 유몽인(1559 ~ 1623)의 유두류산록(1611년 3월 29일 ~ 4월 8일)

용유담(龍游潭)에 이르렀다. 층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푸른 삼(杉) 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고, 칡넝쿨과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일(一)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곡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드는데, 세차게 쏟아져 흰 물결이 
튀어오른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가리키며용이 할퀸 곳이라 하고, 돌이 둥글게 패인 곳을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고,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한다.
 무지한 민간인이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로 절을 한다. 사인(士人)들도 “용이 이 바위가 아니면 변화를 부릴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나도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보았다.  이 어찌 항아(姮娥)나 거대한 신령이 도기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시험삼아 시로써 증험해보기로 하고, 절구 한 수를 서서 연못에 던져 희롱해보았다.
얼마 뒤 절벽의 굴 속에서 연기 같지만 연기가 아닌 이상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층층의 푸른 봉우리 사이로 우레 가은 소리와 번쩍번쩍 번갯불 같은 빛이 잠시 일어나더니
곧 그쳤다. 동행한 사람들이 옷깃을 거머쥐고 곧바로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 잠시 후 은실 같은 빗줄기가 떨어지더니, 새알만큼 큰 우박이
쏟아지고 일시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좌중의 젊은이들은
거의 숟가락을 떨어뜨릴 정도로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박장원(1612 ~ 1672)의 지리산기(1643년)

오후에 용유담에 도착하여 말 안장을 풀고 쉬었다. 용유담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고
그 위에는 모두 흰 돌이 깔려 있었다. 물에 잠긴 돌빛이 깊고 맑았다. 높고 낮은 돌 위에는
수백 명도 족히 앉을 수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돌위에 앉아 술 몇 잔을 주고받았다. 악사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는데, 그소리가 돌을 쪼개고 구름을 뚫어 마치 깊은 물 속의
용이 신음하는 소리와도 같았다.

*정시한(1625~1707)의 산중일기(1686년)

나귀에서 내려 좌려암과 삼성대를 보고 용유당에 이르니, 하얀 돌이 한 골짜기 수 백리
사이에 어지럽게 솟아 있었다. 물소리가 땅을 흔들어 우레 소리처럼 은은하게 들리고 냇물은
검푸른 빛으로 깊어서 모래톱이 없었다. 겁이 나서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좌우에 붉은 꽃이 가득
피어 있고 바위의 상하에는 신룡이 감고 뒹군 흔적이 있었다. 특이한 모습이었다.


*이동항(1736~1804)의 방장유록(1790년)

용유담에는 활 모양으로 큰 돌들이 계곡에 쌓여 있었다. 그 돌들은 지붕마루 같은 것,
평평한 자리 같은 것, 둥근 북 같은 것, 큰 항아리 같은 것, 큰 북 같은 것, 성난 호랑이
같은 것, 질주하는 용 같은 것, 서 있는 것, 엎드려 있는 것, 기대어 있는 것, 쭈그리고 있는
것들이 여기저기에 그득히 널려 있었다. 그밖에도 기이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 형상을 이루 다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계곡 가운데로는 큰 돌이
나 있는 홈통으로 물길이 나 있었는데,
 세찬 물줄기가 요란스럽게 소용돌이치고 요동치면서 흘러내려 드넓은
못을 만들고 있었다. 못은 수리에 곧게 걸쳐 있었고, 양쪽의 골짜기에는 묶어세운
 듯한 소나무 수만 그루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어둡고컴컴하였다. 용유담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정신과 기분이 싸늘해지는
 것이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못의 서쪽 비탈에는 옛날 사당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령스러운 용에게 기도하던 곳이었다. 나무를 엮어 만든 다리로 건너다녔는데,
 여울 바람이 불면 현기증이 나 물에 떨어져 죽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고 문헌에 등장하는 용유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임천(?川)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엄천(嚴川)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서계(西谿)

군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팔량현에서 나오는데, 제한역(蹄閑驛) 아래쪽 5리쯤에 이르러서는 두 산골
사이에 돌이 뻗쳐서 바닥이 되었으며, 갈아놓은 것처럼 미끄럽고, 물줄기가 나는 듯 흘러
물방울을 튕기며, 굽은 낭떠러지에 내리 쏟아서 댕글댕글하는 것이 패옥 소리 같다.



연려실기술(述) 별집 제16권

함양의 지리산 : 북쪽에 영원동(靈源洞)ㆍ군자사(君子寺)ㆍ유점촌(鍮店村)ㆍ
벽소운동(碧霄雲洞)ㆍ추성동(楸城洞)이 있는데 모두 경치 좋은 곳이다. 산골물이 합쳐서
임천(瀶川)이 되고, 흘러 내려가서 용유담(龍游潭)이 된다. 용유담의 양쪽에는 바윗돌이
 평평하게 깔리고 겹쳐 쌓였는데 다 갈아
놓은 것 같다. 가로 놓이기도 하고 옆으로 펴지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큰 장독을
닮았는데 그 깊이는 바닥이 없고, 어떤 것은 술단지 같기도 하여 천 가지 만 가지로
기기괴괴하다. 물 속에는 가사어(袈裟魚)라는 물고기가 있다. 물은 군(郡)의 남쪽 25리
지점에 이르러 엄천(嚴川)이 된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면 개천과 돌의 경치가 매우 기이하다.



 


용유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강을 따라 약 50m 정도 오르면 선인들의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나타난다.그 역사는 약 500년을 지켜온 것으로 남명 조식선생, 한사 강대수 선생, 점필재
김종직 선생, 탁영 김일손선생, 정여창선생등 우리네 역사속에
존재하는 대 유학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