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개척한 [지리산 동북부 칠암자 코스]
고향의 역사와 잊혀진 흔적들을 http://jiri99.com/ 탐구 산행팀이 연구하고 새롭게 발굴하여 정리를 한 것인데 그동안 이곳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탐구를 한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지리 99 탐구산행팀(대표 류정자)의 노고를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할것이라 생각이 되어집니다. 함양군에서 이 코스를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코스이기에 이미 안내판을 만들어 곳곳에 세워 두었으며 그 이면에는 숨은 공로자(지리99 탐구산행팀)분들이 계셨다는 것을 꼭 알고 있어야 할것이 사료됩니다. 그분들께서 고향의 잊혀진 역사를 새로 정리를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장사터 (지장사의 역사 및 자세한 정보는 지리탐구방 “유두류록”편에 상세히 기술하였기에 생략합니다) 2. 제 2 암자 [금낭굴 암자 터] 지장사 본당 추정 지 바로 뒤 능선에 올라서야 다음 절터 “금낭굴 암자” 터로 갑니다. 길 초반에는 산죽이 약간 성가시지만 갈수록 길이 좋아지면서 헬기장 두 곳을 지나고, 지장사에서 약 250여m정도 왔을 때 표고 900이 되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산 사면을 돌아서 시선을 진행방향11시 방향에 (함양독바위 3시 방향) 고정시켜 살피면 큰 바위 군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곳이 “금낭굴”이며 대충 길을 치고 가시면 됩니다. 산길 들머리인 표고 900에서 금낭굴까지의 거리는 약 300여m입니다. 지나온 두 번째 헬기장에서부터는 상대날등 능선입니다. 금낭굴은 주능선인 상대날등에서는 물론 절터 사방 어디로든 뚜렷한 길이 없는 오래된 묵은 폐사지입니다. 출구도 없고 입구도 없는 한 마디로 암자로 가는 올바른 길이 없는 곳입니다. 위에 소개하는 길은 탐구팀이 몇 번 들락거리면서 억지로 내어놓은 길이기에 첨부하는 지도를 잘 숙지하셔야 합니다. 금낭이란 비단주머니를 뜻하는 말인데 어째서 이 바위틈새를 금낭굴이라 부르는지 지명의 어원은 불가하지만 이름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굴 천정에는 큰 바가지만한 말벌집이 비단주머니 대신 대롱대롱 달려있습니다. 이곳도 주변에 기와조각과 오지그릇 파편들이 주변에 흩어져있어 절터였음을 증명해 줍니다. 노장대골 최상부의 응달골에 위치한 암자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전해오는 문헌도 전무하고 정보도 얻을 수 없어 지역민들이 부르는 대로 그냥 “금낭굴 암자터”라고 부르는 수 밖에 없습니다. *금낭굴 절터 절터가 자리한 지대가 얼마나 깊숙한지 이 곳에서 정진에 매달린 구도자의 삶은 어떠했을까....... 지나가는 속인이 부질없는 생각을 다 해봅니다. 산 끝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산뿐이고, 바람도 소리 없이 지나갈듯하고 구르는 가랑잎도 묵언을 할 것 같습니다. 암자터에서 저만치 마주보이는 황새날등에서는 수행자의 수행을 지켜보는 듯 함양독바위가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금낭굴 암자 터를 보고서는 들어왔던 길 즉 상대날등으로 다시 가야 하는 길과 금낭굴의 바위틈새를 통과해서 상대날등 능선으로 바로 치고 오르는 길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후자의 길이 더 재미있습니다. 금낭굴 우측의 바위틈으로 빠져 나와서 까탈스러운 비탈을 쳐 오르면 굴 상부에 또 다른 바위들이 버티고 있으며 이 곳을 장군봉이라고 합니다. 장군봉의 위용은 함양독바위 쪽 즉 황새날등에서 봐야 실감이 됩니다만 직접 발을 딛고 보면 별로 장군같이 우람하지도 않습니다. 장군봉뒤의 상대날등에 올라서면 헬기장입니다.(고도 1020m) 여기서 상대날등의 능선상 시작점 까지는 약 300m 거리 입니다. 능선을 고집하고 진행을 하다 보면 우회를 해야 하는 바위지대도 두 곳 정도 있으며, 마지막 꼭지점을 오를 때는 산죽과 한바탕 싸워야 하고 경사도 조금 있습니다. 바위지대를 우측으로 돌아 오르면 상대날등의 초입 입니다. (고도 1190m) 여기서 우측서쪽 방향으로 100여m가면 통락문입니다. *{보너스 2 : 통락문} 통락문은 남쪽입구는 안락문 북쪽입구는 통락문으로 들머리 날머리 이름이 서로 다르게 새겨져 있습니다. 통락문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각자이고 안락문은 근래에 누군가가 각자를 새겨서 붉은색으로 덧칠을 해 놓은 게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한 시절 지리산을 물들였던 이념의 색깔론도 저 색인데 잘 쓴 달필에 붉은물은 왜 들였는지 ...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세상시름 다 잊고 안락의 경지로 들어가고 통하는 문이라고 했는데 깎아지른 면벽이 너무 살벌해서 형무소의 복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안락문 통락문을 지나서 모퉁이를 돌면 함양 독바위 입니다. *{보너스 3 : 함양독바위} 굳이 이 바위의 명칭에 함양이라는 지명을 부치는 이유는 동부능선의 독바위와의 구별을 위한 것입니다. 두 독바위가 이름은 같아도 어원은 다릅니다. 동부능선의 산청독바위는 독아지를 닮았다고 해서 항아리 옹(甕)자를 부쳐 옹암(甕巖)이라고 하여 독(甕) 바위가 되었고, 이 곳 함양독바위는 예전에 늙은 무녀가 혼자서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독녀암(獨女巖)이라 부른데서 독(獨)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함양군에서는 이 곳을 노장대라고 잘못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노장동에서 나고 자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장대는 노장동 마을의 옛 이름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일제강점초기에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정리할 때 행정표기상 노장대 마을이 노장동으로 바뀐 듯 합니다. 독바위는 그 예전부터 독바위라고 불렀다고 문헌에도 나와 있습니다. 함양독바위의 진가를 알려면 바위 꼭대기에 올라보아야 합니다. 높이가 7~80m나 되는 바위를 500년 전에 이곳을 찾았던 김종직선생은 바위틈에 있는 잣나무를 잡고 올랐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튼튼한 사다리가 놓여있어 아이들도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사다리가 설치된 독바위 사다리 설치는 당연히 함양군에서 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송대리 입구에 있는 대종교의 천진전에서 설치를 하고 관리를 한다고 하는데 확인은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우리 산꾼의 입장에서는 예전에 처럼 자일 한줄 정도만이면 좋겠습니다. 3. 제 3 암자 [신열암 터] 함양독바위에서 되돌아 나오자 마자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의 서쪽으로 나 있는 등로를 따라 2분정도 가서 등로 우측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 입니다. 암자 터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 텅 빈 이 폐허의 자리에서 그저 하룻밤 잠만 자도 도가 닦여질 것 같은 명당 터입니다. *신열암터 그래서 산꾼들의 비박 장소로 더 없이 좋은 곳입니다. 주춧돌과 기와조각들만 남은 신열암 터를 지키고 있는 선바위 틈의 맛 좋은 석간수는 돌샘도 법문인양 몸집 큰 사람은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어렵게 꼭꼭 숨어있습니다. 이 곳이 신열암 터 라고 이름 지어진 것은 김종직의 “유두류록” 기록을 근거로 한 탐구에 의해서 입니다. 4. 제 4 암자 [고열암 터] 이 곳은 김종직선생이 천왕봉 등정 길 첫날에 하룻밤을 묵은 절 입니다. 신열암터에서 독바위 반대방향으로 길을 잡아서 2분만 걸으면 선녀굴에서 올라오는 사거리길 입니다. 사거리에서 직진으로 들어서 모퉁이를 돌아 가면 바로 고열암 입니다. 커다란 선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에 어김없이 옹달샘이 있고 이 곳엔 근세에 누가 기도터로 사용을 했는지 기와조각들로 축대를 쌓고 구들장 흔적까지 있습니다. *고열암터의 샘 산 끝자락 저 아래는 엄천강이 활처럼 휘어져 흐르고 있고 용유담의 절경도 시야에 들어옵니다. 역으로 이 정경을 500년전 <김일손>은 용유담을 지나면서 고열암이 한조각 배처럼 산위에 걸쳐 있다고 했습니다. *{보너스 4 : 의론대} 고열암터의 서쪽 으로 뻗어있는 솔봉능선에 있는 전망대입니다. 고열암에서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나와서 진행방향 좌측 바위 앞으로 내려서서 3분정도 가면 널찍한 너럭바위지대로서 함양독바위를 안내하는 실사 안내판이 서 있는 곳입니다. 이 곳을 옛 선인들은 삼반석이라고도 했으며, 함양독바위와 상내봉 조망이 가장 좋은 곳입니다. 예전에 절벽아래 석굴이 있는데 그곳에 기거하는 노숙 우타가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이 삼반석에서 대승 소승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우쳤다고 해서 이 곳을 의론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5. [제 5 암자 [선녀굴암자 터] 함양독바위와 상내봉이 가장 잘 보이는 의론대에서 다리 쉼을 하고 백여m를 능선 따라 내려오면 표지목이 서 있는 사거리입니다. 표지목 사거리에서 진행방향 좌측의 내리막으로 2분정도만 내려가면 우측에 선녀굴이 있습니다. 큰 바위들을 등지고 석간수가 풍부한 이곳도 절터의 흔적으로 기와파편이 널려있습니다. 이 곳 역시 금낭굴 암자 터와 같이 무명암자이어서 그냥 선녀굴 암자 터라고 하기로 합니다. *선녀굴 암자터 의론대에서 인근 세 암자의 중들과 대승 소승을 논했다는 노숙 우타스님이 거처했던 곳이 이 곳 선녀굴이 아닌 가 추측을 해 봅니다. 이 암자 터는 해방직전 까지만 해도 작은 암자가 있어서 스님이 가끔씩 송대리에 내려와서 소금을 얻어가고 했다고도 합니다. 선녀굴은 예쁘고 고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처절한 한국전쟁의 비화를 안고 있는 곳입니다. 빨치산 정순덕이 지리산에서 최후의 3인부대로 떠돌던 중 3인중의 한 사람인 이북출신의 남파 공비인 이은조(45세)가 사살된 현장입니다. 1961년 12월 어느 날 선녀굴 앞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중 토벌대의 총격에 이은조가 사살이 되고 나머지 잔비 정순덕과 이홍희는 이은조의 시체를 선녀굴 석간수 바로 앞에 대강 매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년 후 1963년 11월 정순덕이 내원골에서 체포가 되어 산청경찰서에 수감 중 이은조의 주검을 확인하는 현장검증이 이루어지던 날 이었다고 합니다. 경찰들과 수사관들이 체포당시의 총상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한 정순덕을 한 촌부의 지게에 지고서 선녀굴로 향하는데 지나는 마을사람들로부터 돌멩이가 날아들었다는 얘기가 있기도 합니다. 선녀굴의 선바위에는 그 때의 총탄흔적들이 남아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때는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작은 무명암자 터 이곳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는 피해갈 수 없었나 봅니다. 6. 제 6 암자 [유슬이굴암자 터] 이 곳도 무명암자입니다. 선녀굴에서 다시 솔봉능선 표지목 사거리로 되돌아 와서 진행방향 직진으로 들어섭니다. 이 길은 예전에 선녀동과 노장동 마을을 오가는 옛길로서 묵은 길이지만 아직도 희미하게 길 흔적은 남아있습니다. 정확하게 길의 분기점인 사거리표지목에서 환희대가 있는 문수사 능선까지 약 600여m 문수사 상부 골짝을 가로지르는 길입니다. 처음 약 100m 정도는 길이 있다가 다음부터는 너덜지대로 길 흔적 찾기가 어렵습니다. 고도변화 없이 앞쪽에 보이는 큰 바위(유슬이굴)를 향해 약 200m 더 직진을 합니다. 다래넝쿨과 잡목들이 광케이블처럼 엉클어진 덤불 속에 입구가 삼각형인 석굴이 숨은 듯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한때 유씨성을 가진 어느 사람의 기도 터 이어서 유슬이굴 이라고 했다는데 주변에 아주 오래된 기왓장들이 널려있음이 암자 터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유슬이굴 암자터 언제 적에 탄생하고 사라졌는지 절의 역사는 알길 없지만 덤불 속에는 암자와 석굴을 연결해주는 돌계단도 선명합니다. 절터의 고즈넉함과 마치 안방 같은 굴 내부의 넉넉함이 궁합을 이루어서 학승의 공부도량으로 딱 좋은 곳 입니다. 유슬이굴은 솔봉능선과 문수사능선의 정 중앙(고도 935m)에 위치한 셈입니다. 7. 제 7 암자 [선열암 터] 유슬이굴에서 고도변화 없이 북쪽으로 300m쯤 진행을 하면 문수사와 노장동에서 올라오는 능선에 닿습니다. (고도 920m) 능선에서는 우측의 독바위 가는 길과 좌측의 노장동 가는 길도 버리고 역시 고도변화 없이 직진하여 약 100여m 산 사면을 이어가다 작은 능선을 넘어서 구릉지대로 내려서면 선열암터 입니다. 문수사주능 길에서 정확히 160m입다. 성곽의 요새 같은 함양독바위가 버티고 있는 황새날등의 꼬리부분에 자리한 선열암터는 지리산에서 최고의 기도 터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곳으로 지형이 절묘하고 예사롭지 않습니다. *선열암터 주변에는 하루 한 끼니 분의 쌀이 나왔다는 식장산의 전설을 연상케 하는 바위굴도 있다고 도합니다. 쌀바위의 전설하나만 믿고 이 골짝에 들어왔던 비결장이들이 절터아래 노장동의 원주민이며 억지로 절터 벼랑 아래로 내려가 보면 기와조각과 청자, 백자 파편들이 얼추 한 트럭 분량은 흩어져 있습니다. 이곳 선열암에서 지리산 동북자락에 숨어있던 칠암자 순례는 막을 내립니다. 선열암에서 왔던 길을 다시 나가서 문수사 능선에서는 진행방향 우측으로 내려서면 10분거리에 큰 바위를 만납니다. 이 바위가 "유두류록" 탐구에서 환희대라고 추정하는 곳 망바위 입니다. 망바위 앞에서 우측으로 나 있는 내림 길을 따라 10분정도만 가면 노장동 마을터 입니다. *환희대 계속 길을 따르면 동부 칠암자 코스의 출발지였던 운암마을에 정확하게 원점회귀 하게 됩니다. 절터를 일곱 군데나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본 것도 없는 그야 말로 헛 절만 찾아다닌 칠암자 산행이었습니다. 눈으로 본 것은 전무해도 마음으로 느끼고 가슴에 담은 감동은 풍성할 것입니다. 진실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차원의 세계로 가는 길이 있다면 아마 이런 길일 것 같습니다. 사는 것이 버겁고 삶에 대한 회의가 오거든 집도절도 없는 칠암자를 한바퀴 둘러보세요. 절해고도와도 같은 산중에서 인고의 세월을 살다간 구도자들의 삶을 만나면서 재충전한 또 다른 당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출처 /http://jiri99.com/ 가객 등산지도/태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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