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내용은 고령김씨 대종회 남재(南齋) 재호님께서 써 놓은 글을 복사해 가져왔습니다. 중요 포인터는 엄천강의 용유담 건너에 있는 각자의 사진 자료입니다.
용유담(龍遊潭) (김일손) 암각을 찾아서
탁영선생의 암각을 찾아 초행인 엄천(嚴川)을 찾았다.
함양군청이 있어 잠시 쉴 겸, 군청직원에게 용유담 가는 길을 물었다.
엄천 어귀의 김종직차밭 광고
사전에 엄천에 대해서도 인터넷 검색결과 ‘불교의 계율을 엄하게 계해한다’는 표현이 있었다.
엄천은 옛 선비들이 ‘은둔의 명소’라고 불렀는데 1400년 말부터 1700년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기행기록을 남겼는데
휴천과 마천의 경계지점인 용유담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감탄, 그리고 용유담을 읊은 많은 시가 남아 있단다.
용유담은 글자 그대로 용이 노니던 곳이니, 여행 목적이
첫째 탁영 선생의 지리산 기행의 그림자라도 상상으로 느끼자는 것이고
두 번째로 용유담에 있다는 김종직과 김일손, 그리고 조식의 암각을 찾아보고 싶어서 이다.
곳곳에 보이는 굿당 간판들이 속리산이나 설악산 같이 무속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많아 신비스러움을 느끼게 하며,
특히 지리산 기행을 한 점필재와 탁영, 그리고 일두 같은 많은 사람들이 가장 비참한 참사를 당하였음은 ‘은둔의 명소’라는 말이 예언이나 한듯한 인상을 느낀다.
곽준과 그의 아들 딸들이 죽은 곳도 함양이 아닌가
함양의 지리산은 훌륭한 많은 선조들의 비참한 마감으로 연결된 곳이라 슬픈 고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후세에 알려진 위대한 분들이니 고개 숙여 명복을 빌 따름이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혼자 살려고 도망간 김해부사 백사림과 윗 분들의 죽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며
촌음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값진 삶을 사는 것인지 후세에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엄천사가 있던 곳을 엄천골이라 하고 그 앞을 흐르는 강을 엄천이라 하여 지명을 딴 이름이 아닌 불교 용어라는 것이다.
해도 어느듯 산을 넘으려 하여 찾은 곳이 레프팅하는 제법 깨끗해 보이는 팬션이다.
한남마을에 있는 마을에 새우섬이라 고 있었는데 500여년전 세종대왕의 12번째 왕자가 귀양와서 섬에서 생을 마감한 곳이라는데 찾아 볼 수 없었다.
‘한남마을’이란 이름도 한남군(漢南君)이 귀양와서 죽은 곳이라 생겨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남마을에서 보름달같은 둥근달을 보면서 그래도 많은 선인들이 거쳐간 역사의 한자락에서 잔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많은 비를 뿌린 이후라서 인지 아니면 산골이라서 그런지 제법 시원하다.
여행전에 준비한 점필재 유두류록(1472년)과
탁영선생의 두류기행록(1489년 성종20 4월 14일~4월28일)의 내어 놓고 읽어 보았다.
1. 점필재 유두류록
함안읍-팔치재(함양읍 남산과 휴천면 목현사이 고개)-당두재(휴천면 대천리와 휴천면 남호리사이 고개)-휴천면 남호리 절터(엄천)-동강(화암)-구실악재-한쟁이골-감태박골-노장대(지장사)-환희대-선열암-신열암-독녀암(함양독바위)-고열암 1박후-청이당-영랑대-하봉-중봉-천왕봉 지리산으로 등정함.
2. 탁영선생 두류기행록
함양읍-제한역(팔령인근)-오도재-등구-금대암-용유담-문정-휴천면 남호리-절터-사근역(수동)-산청-단성-단속사-묵계-법계사-천왕봉 등정
탁영선생과 점필재선생의 코스는 역코스라고 한다.
함양지리에 어두운 나로서는 지명을 읽어봐도 생소하기만 하다.
보다 많은 경험을 하고 싶은 곳인데 너무나 생소한 곳이라 안내자도 없어 계획이 서지 않는다
모든 것을 접어두고 용유담의 암각 찾기에만 힘 쓰기로 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의 시한수
말방울 울리며 가는 마천(馬川)길
말방울 울리며 가는 마천길 들머리에
길손의 행렬이 길게 따르도다
그늘진 골짜기에 찬 바람
벼랑의 단풍은 햇빛에 선렬하다.
신모사당은 눈속에 파뭍혔고
우레소리는 용연에 깊이 움추렸네
용연은 용유담을 말한다.
새벽 일찍 일어나 혼자서 차를 몰았다. 한남마을을 지나 2~3k 지나니 용유교가 나왔다. 인근사람이 마을에 김재철이라는 어른이 잘 안다는 것이다.
부근의 재철씨 집을 찾아 암각의 위치를 묻자 손가락으로 가르쳐 주는데 혼자서는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 한 50대의 남자가 산책 나왔다는 데 “혹시 탁영선생의 암각자리를 아느냐” “잘 모른다”는 것이다.
사전 조사해온 자료로 설명하고, 방금 마을 사람이 아르켜 준 지점을 설명을 하자 함께 가 보자는 것이다.
멀리 서울서 암각바위를 찾아 왔으니 도우고 싶은 모양이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래도 나 보담 강의 지리를 아는 지 앞장선다.
100여m 바위 위를 걸어가니 바위에 낙서한 곳이 나왔다.
여러 글씨 중에 ‘탁영 김선생’ ‘남명선생’ 좀 떨어져서 ‘점필재’라는 글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의 풍파에 깍여 뚜렸하지는 않았다.
김종직 김일손의 암각이 있다는 기록을 갖고 왔는데 호(號)만 암각되어 있었다.
사진을 몇장 찍고 고마운 자청 안내자의 이름을 적었다.
옥세윤(玉世潤)
필체가 상당히 좋았다.
당뇨병이 있어 시골에 내려와 있다면서 3명의 친구가 어울러 땅 1000여평을 구입하여 조립식
깔끔한 집을 지어 맑은 엄천강 부근에 살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함안군 휴천면 송전리의 주소의 연락처를 받았다.
집에서 커피한잔 대접하겠다는 데도 기다릴 아내 때문에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구룡교
일두 정선생(一蠹 鄭先生) 탁영 김선생(濯纓 金先生) 남명 조선생(南冥 曺先生)
문충공 점필재 김선생(文忠公 佔畢齋 金先生)
고맙게 안내해 주신 옥세윤(玉世潤)님
암각을 강 건너에서도 멀리나마 사진을 또 찍었다.
도로변에 구룡정(九龍亭)이 있는 바로 건너편 바위에 세겨져 있다.
글자를 볼려면 다리 건너 가정집(개인 절)마당으로 들어가서 약 100m 정도는 걸어 들어가야 볼 수 있다.
구룡정 앞에서 찍은 암각
구룡정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용유담의 위는 여러 산봉우리의 중턱인데 / 龍遊潭上亂峯腰
높이 솟은 팔천봉에 잔로가 멀리 보이누나 / 八蒨穿雲棧路遙
빗속에 바위 위에 앉아 점심을 먹고 나서 / 雨裏巖頭澆飯罷
세 사람이 길이 읊으니 산꼭대기 메아리치네 / 三人長嘯響山椒
용유담 가에는 돌들이 오랫동안 닳아서 / 龍遊潭畔石磨礱
작은 것은 술동이 같고 큰 것은 구덩이 같네 / 小若窪樽大埳空
조화옹이야 이를 용이하게 만들어 냈으리 / 造化兒能容易辦
푸른 절벽에 머리 돌려 자연의 이치 상상하노라 / 蒼崖回首想鴻濛
출처 :고령김씨 대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 남재(南齋) 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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