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
선비가 나서 박[匏]이나 외[爪]처럼 한 지방에 매어 있는 것은 운명이다.
이미 천하를 두루 구경하여 장래의 가질 것을 저축하지 못할진대, 제 나라의 산천쯤은 마땅히 두루 탐방(探訪)해야 할 것이나,
오직 사람의 일이란 어김이 많아서 노상 뜻을 두고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은 된다.
나는 처음에 진주(晉州)의 학관(學官)이 되기를 원했던 것은 그 뜻인즉 편양(便養)을 하기 위해서였으니,
구루(句漏)의 원이 된 갈치천(葛稚川)의 마음은 또 단사(丹砂)에 있지 않을 수 없다.
두류산(頭流山)은 진주의 경내에 있다.
진주에 도착하여서는 날로 양극(兩屐)을 준비하였으니, 두류산의 연하와 원학(猿鶴)은 모두 나의 단사(丹砂)인 때문이다.
두 해 동안 고비(皐比)에 앉았으나 한갓 배만 불린다는 기롱을 받을 뿐이므로,
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물러가서 자유롭게 노니는 몸이 되었지만 족적(足跡)이 일찍이 한 번도 두류산에 이르지 못했으니
어찌 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랴.
그러나 두류산만은 감히 가슴속에 잊은 적이 없었다.
매양 조태허(曹太虛) 선생과 더불어 한번 함께 구경하기로 약속했으나 태허는 벼슬살이에 얽매이고 나는 내왕이 막혔다.
몇 날이 안 가서 태허는 내간상(內艱喪)을 만나 천령(天嶺)으로 떠났다.
천령에 사는 진사(進士) 정백욱(鄭伯勗 여창(汝昌))은 나의 신교(神交)였는데,
금년 봄에 도주(道州)에서 녹명(鹿鳴)주D-001을 노래하게 되어 마침내 문전을 지나면서 두류산을 구경할 것을 약속했다.
얼마 안 되어 김상국(金相國) 은경(殷卿)이 영남(嶺南)을 안찰하러 나와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만날 것을 기약했으나 나가지 못하고
4월 11일 기해에 그 행차를 탐문하여 천령에 가서 뵙게 되었다.
그래서 천령 사람에게 물으니, 백욱이 서울에서 이조부(二鳥賦)주D-002를 짓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 지 벌써 5일이 되었다고 하므로, 드디어 서로 만나보고 숙원이 어긋나지 않음을 기뻐했다.
김상국이 장차 나를 만집하며 자기를 따라 가자고 하므로,
나는 산행의 약속이 있다고 사양하니 상국은 간청하다 못해 노자를 꾸려 주면서,
“공무에 바쁘고 체력조차 약해서 따라가 구경을 못한다.” 하며, 못내 섭섭히 여겼고,
새로 도임한 천령 군수 이잠(李箴) 선생은 바로 내가 성균관(成均館)에서 경서를 문의하던 분이라, 나에게 후한 노자를 주었다.
천령 사람 임정숙(林貞淑)이 또한 따라 가겠다고 하여 세 사람의 행장을 마련하였다.
14일 임인에 드디어 천령 남문으로부터 출발하여 서쪽으로 20리가량을 가서 한 시냇물을 건너 한 주막집에 당도하니 땅 이름은 제한(蹄閑)이다.
제한으로부터 서쪽으로 행하여 뫼뿌리와 언덕에 오르내려 10리쯤 가니 양쪽 산이 대치해 있고,
한 줄기 샘이 가운데서 쏟아져 점점 아름다운 지경으로 들어갔다.
두어 마장을 가서 한 재마루에 오르니 종자(從者)의 말이,
“마땅히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한다.” 하므로 나는 절해야 할 이유를 물은즉 대답이,
“천왕(天王)이라.” 하는데, 천왕이 무슨 물건인지 살피지 아니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지나쳐 갔다.
이날에 비가 물 쏟듯이 내리고, 안개가 산에 가득하여 종자들이 모두 우장 삿갓을 차렸는데,
진흙이 미끄럽고 길이 소삽하여 서로 짝을 잃고 뒤에 처졌다.
신마(信馬)로 등귀사(登龜寺)에 당도하니 산의 형상이 소복하여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 있다하여 이름이 된 것이다.
옛 축대가 동떨어지게 높고, 축대 틈에 깊숙한 구멍이 있어 시냇물이 북으로부터 내려와 그 속으로 쏟는데 소리가 골골한다.
그리고 그 위에 동찰(東刹) ㆍ 서찰(西刹)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모두 동찰에 들고 종자를 골라서 돌려보냈다.
비가 밤을 새고 아침까지도 그치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절에 머물러 각기 낮잠을 자고 있는데,
중이 갑자기 말하기를, “비가 개어 두류산이 보인다.” 하기로 우리 세 사람은 몰래 일어나 잠든 눈을 부비고 보니
새파란 세 봉이 점잖게 창문에 당하여 흰 구름이 비끼고 푸른 머리구비가 비칠 따름이다.
이윽고 또 비가 내리므로 나는 농담조로 말하기를,
“조물주도 역시 관심을 두는 모양인가. 산악의 형상을 숨기는 것을 시새워하는 바가 있는 듯하다.” 하니
백욱은 말하기를, “산신령이 오래도록 시객(詩客)을 가둬놓을 작정인지 뉘 알겠는가.” 하였다.
이날 밤에 다시 개어 하얀 달이 빛을 발하니 창안(蒼顔 산을 말한 것)이 전부 드러나서 뭍 골짜기에는 선인(仙人) ㆍ 우객(羽客)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백욱은 말하기를, “사람 마음이나 밤기운이 이 지경에 이르면 도시 찌꺼기라곤 없기 마련이라.” 하였다.
나의 조그마한 몸이 자못 피리를 고를 줄 알기로 그를 시켜 불게 하니 또한 족히 공산의 소리를 전할 만하여
세 사람은 서로 대하고 밤이 으슥해서야 바야흐로 잠자리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백욱과 더불어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등구암을 떠나 1마장쯤 내려가니 볼만한 폭포가 있다.
십 리쯤 가서 한 외로운 마을이 보이고, 그 마을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험한 고개를 넘어 산 중허리를 타고 바른편으로 굴러서 북으로 향하니 바위 밑에 샘이 있기에 두 손을 모아 물을 떠서 마시고,
따라서 세수도 하고 나와 한걸음으로 금대암(金臺庵)에 당도하니 중 한 사람이 나와 물을 긷는다.
나는 백욱과 더불어 무심코 뜰 앞에 들어서니 몇 그루 모란꽃이 피었다.
그러나 하마 반쯤 시들었는데, 꽃빛은 심히 붉다.
그리고 백결(百結)의 납의(衲衣)를 입은 중 20여명이 바야흐로 가사(袈裟)를 메고 경을 외우며 주선하는 것이 매우 빠르므로 내가 물으니 정진도량(精進道場)이라고 한다.
백욱이 듣고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하여 섞임이 없고, 전진이 있고 후회는 없으니,
밤낮으로 쉬지 않고 나아가서 부처의 공덕을 짓자는 것이다.” 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일이 있으면, 그 무리 중의 민첩한 자가 기다란 목판으로 쳐서 깨우쳐 조을지 못하게 한다.
나는 말하기를, “중노릇하기도 역시 고되겠다. 학자의 성인을 바라보는 공부도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성취가 없겠는가.” 하였다.
암자 내에 육환(六環)의 석장(錫杖)이 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날이 정오가 되자 옛길을 경유하여 돌아와 석간수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창일하여 호수와 같으므로
멀리서 상무주(上無住) 군자사(君子寺)를 가리키며 가보고 싶었으나 걸어갈 수가 없었다.
산길을 내려오는데 심히 경사져서 발을 땅에 붙일 수가 없기로 지팡이를 앞에 세우고 미끌려서 내려가니 안마(鞍馬)가 이미 산 아래서 기다리고 있다.
타고 가는 사람과 걷는 사람이 겨우 한걸음 사이쯤 떨어졌는데,
내가 탄 말은 유독 다리 하나를 절어서 방아를 찌는 것 같으므로 백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는 나귀의 풍경이란 시인은 면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였다.
시내를 따라 북쪽 기슭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용유담(龍遊潭)에 이르니,
못의 남북이 유심(幽深)하고 기절하여 진속(塵俗)이 천리나 가로막힌 것 같다.
정숙(貞叔)은 먼저 못가 반석 위에 와서 식사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으므로, 점심을 먹고 드디어 출발하였다.
때마침 비가 개어 물이 양편 기슭에 넘실거리니 못의 기묘한 형상은 얻어 불 수 없었다.
정숙이 말하기를, “이곳은 점필공(佔畢公)이 군수로 계실 적에 비를 빌고 재숙(齋宿)하던 곳이라.” 한다.
못가의 돌이 새로 갈아놓은 밭골과 같이 완연히 뻗어간 흔적이 있고, 또 돌이 항아리도 같고, 가마솥도 같은 것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백성들은 이것을 쉽게 사용하는 기명(器皿)이라고만 하며 자못 산골물의 물살이 급해서 물과 돌이 굴러가면서 서로 부딪기를 오래하여 이 모양을 이룬 줄을 알지 못하니,
세민(細民)이 사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허황한 말만 좋아하는 것이 너무도 심하다.
못을 경유하여 동으로 나가니, 길이 몹시 험악하여 아래로 천척(千尺)의 절벽에 다달아 몸이 으슥하며 떨어질 것 같으므로,
인마(人馬)가 숨을 죽이고, 거의 30리를 지나와서 기슭을 앞에 두고 두류산 동록(東麓)을 바라보니
창등(蒼藤) 고목 사이에 선열(先涅) ㆍ 고열(古涅) 등의 절이 있는데, 그밖에도 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약수(弱水) 하나가 가로막아서 아무리 한걸음을 뛰어서 오르고자 해도 될 수 없었다.
길이 차츰 나직해지자 산도 차츰 평탄하고 물도 차츰 편안히 흐르며, 산이 북쪽에서 우뚝 솟아 세 봉이 피었는데,
그 아래 수십 호의 민가가 있어 마을 이름은 탄촌(炭村)인데, 앞으로 큰 내를 임해 있다.
백욱은, “여기가 살만한 곳이다.” 하므로, “나는 문필봉(文筆峯)이 앞에 있어 더욱 좋다.” 하였다.
앞으로 5 ㆍ 6리를 가니 대숲 속에 옛 절이 있는데, 이름은 암천사(巖川寺)이며 토지가 평평하고 광활하여 집짓고 살만하며
절을 경유하여 동으로 1마장을 가니 천 길의 적벽(赤壁)이 있는데, 사람들이 비스듬한 길을 벽 사이로 파 놓고 다닌다.
여기서 1마장쯤 가서 한 작은 고개를 넘어 북으로 가면 정숙의 전장 아래로 나오게 된다.
정숙이 자꾸만 가자고 청하는데 해가 이미 저물었고, 또 비가 더 오면 물이 더욱 창일할까 염려하여
사양해 말하기를, “왕자유(王子猶)가 대안도(戴安道) 집의 문앞까지 가서도 만나보지 않고 돌아섰는데,
하물며 지금 정숙과 더불어 여러 날을 함께 노닐고 있으니, 다시금 집에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 하였다.
정숙은 “발병이 나서 끝까지 모시고 다닐 수 없다.” 하므로 작별을 나누었다.
저물녘에 사근역(沙斤驛)에 당도하니 양쪽 다리가 몹시 아려서 다시 한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었다.
이튿날에 천령에서 수행을 온 사람과 말을 다 돌려보냈다.
1마장쯤 가니 대천(大川)을 아울러 이남은 모두 엄천(嚴川)의 하류요, 서쪽으로 바라보니 푸른 산이 감싸여 쫑긋쫑긋한데,
모두 두류산의 곁 봉우리가 정오에 산음현(山陰縣)을 당도하여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써 붙인 정기(亭記)를 일람하고
북으로 맑은 강물을 내려다보니, 유유히 흘러가는 감회가 있어 잠깐 비스듬히 누웠다 깼다.
아, 어진 마을을 선택해서 사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요, 궂은 나무를 피해 깃드는 것은 밝은 행동이다.
고을 이름은 산음현이요, 정자 이름은 환아정이니, 이는 회계(會稽)의 산수를 사모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들이 어찌하여 여기서 길이 동진(東晉)의 풍류(風流)를 계승할 수 있게 되랴.
산음현을 경유하여 남으로 단성(丹城)에 당도하니 지나는 곳마다 계산(溪山)이 청수하고 명려(明麗)하여 모두 두류산의 옛 줄거리이다.
신안역(新安驛) 십 리 지점에서 배로 나루를 건너 걸어서 단성에 당도하여 사관을 정하고
나는 단구성(丹丘城)주D-003이라 부르며 선경으로 여겼다.
단성 원 최경보(崔慶甫)가 노자를 후히 보내왔다.
화단(花壇) 위에 오죽(烏竹) 백여 개가 있으므로, 지팡이 감이 될 만한 것으로 골라 두 개를 베어 백욱과 나누어 가졌다.
단성으로부터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험준한 고을 지나니, 널찍한 벌이 나오고 맑은 물줄기가 그 벌의 서쪽으로 쏟아진다.
비탈을 타고 북으로 3 ㆍ 4마장을 가니 한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 입구에 작은 바위가 있는데,
암면(巖面)에 “광제암문(廣濟巖門)”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획(字劃)이 추경하고 고고(高古)하여 세상에서 최고운(崔孤雲)의 수적이라 전한다.
5리쯤 가니 대울타리 안에 새로 덮은 집들이 있고, 뽕나무는 우거졌는데, 밥 짓는 연기가 이는 것이 보인다.
시내 하나를 건너 한 마장쯤 나가니 감나무가 겹으로 둘러 있고, 온 산의 나무는 모두 밤나무뿐이요,
장경(藏經)의 판각(板閣)이 높다랗게 담장 안에 있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쯤 돌아가면 수림(樹林) 속에 절이 있는데, 편액(扁額)에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 씌였고,
비(碑)가 문전에 섰는데, 바로 고려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의 소작인 대감사(大鑑師)의 명으로 완안(完顔 금국(金國)) ㆍ 대정(大定) 연간에 세운 것이다.
문에 들어서니 옛 불전(佛殿)이 있는데 구조가 심히 완박하고, 벽에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斷俗)이라 이름을 짓고,
제 임금의 상(像)을 그린 판기(板記)가 남아 있다.” 한다.
내가 낮게 여겨 살펴보지 않고 행랑을 따라 걸어서 장옥(長屋) 아래로 행하여 50보를 나가니 누(樓)가 있는데,
제작이 매우 오래되어 대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으나 오히려 올라 구경할 만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 이른다.
강 문경공(姜文景公)의 조부 통정공(通亭公)이 젊어서 여기에와 글을 읽으면서 손수 매화나무 하나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름이 된 것이라, 그 자손이 대대로 봉식(封植)한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 시내 하나를 건너니 묵은 덤불 속에 비가 있는데,
바로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憲貞)의 소작인, 중 신행(神行)의 명으로 당(唐) 나라 원화(元和) 8년에 세운 것이다.
돌의 질이 추악하고, 그 높이도 대감사(大鑑師)에 비해 두어 자나 부족하며, 문자도 읽을 수가 없다.
북쪽 담장 안에 정사(精舍)가 있으니 주지승의 침실이다. 많은 산다수(山茶樹)가 정사를 둘러 있다.
정사의 동편에 허술한 집이 있는데, 세상에서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한다.
당의 아래 새로 집 한 채를 지었는데, 극히 높아서 그 밑에다 오장기(五丈旗)를 세울 수 있다.
사승(寺僧)이 이것으로써 편안히 천불(千佛)의 상을 직성(織成)하려는 것이다.
사옥(寺屋)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것이 수백 칸이요, 동쪽 행랑에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그 오백 구의 석불 하나하나가 각각 그 형상이 달라서 기이한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주지가 거처하는 침실로 돌아와 전의 고사(故事)를 뒤져보니,
세 폭을 연결한 백저지(白楮紙)가 있는데, 정하게 다듬어져 지금의 자문지(諮文紙)와 같다.
그 한 폭에는 국왕(國王) 왕해(王楷)란 서명(署名)이 있으니 곧 인종(仁宗)의 휘(諱)요, 또 한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다.
이는 정조(正朝)에 대감사에게 보낸 문안장(問安狀)이다.
또 한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써있는데, 한 군데 황통대덕(皇統大德)이라 하였다.
대덕은 몽고(蒙古) 성종(成宗)의 연호인데, 그 시대를 상고하면 맞지 않으니 알 수 없고, 황통(皇統)은 금국(金國) 태종(太宗)의 연호다.
인종 ㆍ 의종 부자가 이미 오랑캐의 정삭을 썼고 또 선불(禪佛)에게 정성을 바친 것이 이와 같은데,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에게 곤욕을 당했고, 의종은 거제(巨濟)의 액을 면하지 못했으니,
부처에게 아부한다 해도 사람의 국가에 유익됨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또 좀 먹다 남은 푸른 김에 쓴 글씨가 있는데, 글 자체가 왕우군(王右軍)과 유사하여 형세가 날아가는 기러기와 같다.
도저히 날개에 붙을 수가 없으니 기묘하기도 하다.
또 노란 비단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가 았는데,
그 자획(字畫)은 푸른 비단에 쓴 글씨만 못하고 모두 단간(斷簡)이어서 그 글도 역시 알 수가 없다.
또 육부(六部)가 합서(合書) 한 통이 있어 지금의 고신(告身)과 같은데, 역시 그 절반이 없어졌다.
그러나 또한 옛것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보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이다.
백욱이 발이 부르터서 산에 오르기를 꺼리므로 드디어 하루를 묵는데,
중 해상인(該上人)이란 자가 있어 이야기를 할 만하였다.
저물녘에 진주 목사(晉州牧使) 경공태소(慶公太素)가 광대 두 사람을 보내어 각기 자기의 기술로써 산행(山行)을 즐겁게 하고,
또 공생(貢生) 김중돈(金仲敦)을 보내어 필연(筆硯)을 받들게 하였다.
이튿날 여명(黎明)에 가랑비가 살살 내리어 사립(簑笠)을 갖추고 출발하는데,
광대는 피리 젓대를 불며 앞장 서고 중 해상인은 길잡이가 되었다.
동구를 벗어나 돌아보니 물을 안아주고, 산은 감싸주고, 집은 깊숙하고, 지세는 막히어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다.
애석하게도 중들의 장소가 되고, 고사(高士)에게 주어지지 아니하였다.
서쪽으로 십 리를 가서 한 큰 내를 건너는데,
바로 살천(薩川)의 하류가 살천을 경유하여 남으로 가다가 비스듬히 돌아 서쪽으로 약 20리를 가는데,
모두 두류산의 나머지 줄거리이다. 들은 넓고 산은 나직하며 맑은 내와 하얀 돌이 모두 심신을 즐겁게 한다.
구부려져 동쪽으로 향하여 계곡 사이로 향하니 물은 맑고 돌은 날카로우며 또 구부러져 북으로 향하여 시내 하나를 아홉 번이나 건넜다.
또 동으로 구부러져서 한 판교(板橋)를 건너니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서 아무리 쳐다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길은 점점 높아간다.
6 ㆍ 7리를 가니 압각수(鴨脚樹) 두 그루가 마주 섰는데, 크기는 백 아람이나 되고, 높이는 하늘에 닿을 듯하다.
문을 들어서니 옛 갈석(碣石)이 있는데 그 액(額)에, “오대산 수륙정사 기(五臺山水陸精社記)”라 써 있기에 그것을 읽어보니 자못 좋은 글임을 알겠다.
읽어보니 바로 고려 권 학사(權學士) 적(適)이 조송(趙宋) 소흥(紹興) 연간에 지은 것이다.
절에 누관(樓觀)이 있어 매우 장엄하고 간가(間架)도 퍽이나 많고 번당(幡幢)도 나열(羅列)해 있다.
고불(古佛)이 있는데, 중의 말이 고려 인종(仁宗)이 만들어 보낸 것이요, 인종이 가졌던 철여의(鐵如意)도 보관해 있다.” 한다.
해도 저물고 비도 부슬부슬하여 드디어 유숙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사승(寺僧)이 망혜(芒鞋)를 선물로 주었다.
동구를 나와 북으로 가니 바른편에는 산이 있고, 왼편에는 벌이 있어 농사를 지어 먹고 살만하다.
또 십 리를 가니 거주민이 나무를 휘여 농기구를 만드는 것으로 업을 삼고, 쇠를 달구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말하기를, “꽃이 피면 봄인 줄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인 줄을 안다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니,
따라온 중의 말이, “이러한 외진 땅에 살면 이정(里正 지금의 구장과 같은 것)의 박해가 없으니,
백성이 과중한 부역(賦役)에 고통을 받은 지가 오래였기 때문이다.” 한다.
5리를 나가서 묵계사(黙契寺)에 당도하니 이 절이 두류산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고 하는데,
친히 와 보니 자못 전에 듣던 말과는 차이가 있다.
다만 절집들이 밝고 아름다워 금으로 써 꾸민 것도 있고 청홍색 비단을 섞어서 부처의 가사도 만들었으며,
거주하는 중 20여 명은 입을 다물고 정진하기를 금대암(金臺菴) 중들처럼 ?? 따름이다.
잠깐 쉬었다가 말 대신 지팡이를 들고 고죽(苦竹)의 도숲을 헤쳐 나가는데, 희미하여 길을 잃고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당도하니
중은 3 ㆍ 4명밖에 없고, 절 앞에 밤나무는 모두 부근(斧斤)의 해를 입어 넘어져 있었다.
궁금하여 중더러, “어째서 이렇게 되었느냐.” 물으니 중의 말이,
“밭을 만들고자 하는 백성이 있어서 아무리 금해도 하는 수가 없다.” 하였다.
나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태산(泰山)장곡(長谷)에도 역시 농토를 개간하니 우리 국가에 백성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땅히 부유하면 가르쳐 나갈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잠깐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피리 젓대를 불어 답답증을 풀게 하니 떨어진 납의(衲衣)를 입은 중 한 사람이 뜰에서 춤을 추는데, 우쭐우쭐하는 그 기상이 가관이었다.
드디어 함께 앞 고개에 오르니, 나무가 길에 비끼어 있으므로 그 위에 앉아서 앞뒤로 큰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저물어가는 햇볕은 창창한데, 피리 소리가 젓대 소리에 어울려 유량하고 청아하여 산이 울리고, 골짜기가 응하니 정신이 상쾌함을 깨닫겠다.
흥이 다하여 이에 내려가 시냇가 반석에 앉아서 발을 씻었다.
이날도 오히려 음침하여 드디어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유숙하는데,
밤중에 꿈이 깨서 일어나니 별과 달은 맑고도 조촐하고 두견새가 어지러이 울어대는데 정신이 맑아 잠이 오지 아니한다.
나의 서형 김형종(金亨從)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명일에는 천왕봉을 올라 실컷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니 일찌감치 행장을 단속하자.” 하였다.
밝은 아침에 행전에 끈을 달아 다리를 단단히 싸매고 숲 속으로 향하는데,
길이 몹시 경삽할 뿐더러 말라 죽은 푸나무들이 쌓여 다리가 빠지고 그 아래는 모두 고죽(苦竹)이 있어 죽순이 땅을 뚫고 나오는데
마구 밟고 지나며, 큰 뱀이 길에 있고, 저절로 넘어진 나무가 서로 앞에 뒤섞였는데, 모두 경남(梗楠) 예장(豫章)의 재목이다.
혹은 몸을 구부리고 아래로 나가며 혹은 기어서 그 뒤를 향하기도 하며, 따라서 그 장석(匠石)을 만나지 못하여 동량(棟樑)으로 쓰이지 못하고,
공산에서 말라 죽은 것을 생각할 때 조물을 위하여 가석한 일이다.
그러나 역시 제 나이대로 다 마친 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건장한 걸음으로 먼저 가서 한 시냇가 돌에서 기다리는데,
백욱은 힘이 빠져서 허리에 줄 하나를 매고 중 한 사람으로 하여금 앞서서 당기며 가게 하였다.
나는 백욱을 영접하여 말하기를, “중이 어디서 죄인을 구속해 오는가.” 하니
백욱은 웃으며, “산신령이 포객(逋客)을 나포한 것에 불과하다.” 하였다.
대개 백욱이 진작 이 산에 노닌 때문으로 농담으로 대답한 것이다.
여기 와서는 몹시 갈증이 심하여 종자(從者)들은 모두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쌀가루를 타서 마셨다.
다시 다른 길이 없고 다만 천 길의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모여 시내 하나를 이루어 산위에서 쏟아지는데,
마치 은하수가 거꾸로 쏟는 듯하며, 간수(澗水) 가운데 큰 돌이 첩첩이 포개져 다리가 되고,
이끼 흔적이 미끄럽고 윤택하여 밟으면 넘어지기 쉽다.
오고가는 초동(樵童)들이 작은 돌멩이를 그 위에 쌓아올려서 길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나무 그늘이 하늘을 가리어 햇볕이 들지 아니한다.
이와 같이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섯 걸음 만에 한 번 쉬기도 하고, 열 걸음 만에 한 번 쉬기도 하여, 있는 힘을 다 썼다.
시내가 그치자 점점 북으로 향해서 다시 대 숲 속을 헤쳐 가니 산이 모두 돌이다.
칡덩굴을 더위잡고 굴면서 올라가 숨가쁘게 십여 리를 걸어서 한 높은 고개를 오르니,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으므로, 그 별경계를 기뻐하여 꽃 하나를 꺾어서 머리에 꽂고 따라오는 일행에게도 말하여 모두 꽂고 가게 하였다.
한 봉우리를 만났는데, 이름은 세존암(世尊巖)이다.
바위가 극히 우람하나 사다리가 있어 오를 수 있기로 올라서 천왕봉을 바라보니 수십 리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기뻐서 일행에게 일러주고 힘을 써서 다시 한 걸음 더 나가자고 한다.
여기서 길이 점점 나직하여 5리쯤 가서 법계사(法界寺)에 당도하니 중 한 사람밖에 없고,
나무 잎이 널찍널찍하여 비로소 자라나고 산꽃은 곱게곱게 바야흐로 피어나니, 바로 저문 봄철이라,
잠깐 쉬고 곧 올라가서 돌이 있는데 배 같기도 하고 문짝도 같다.
그 돌을 경유하여 나가는데,
길이 돌고 구부러지고 오목하고 울툭불툭하며 석각(石角)을 붙들고 나무뿌리를 더위잡고
겨우 봉 꼭대기에 당도하자 곧 안개가 사방에 끼어 지척을 구별할 수 없었다.
향적승(香積僧 식사를 맡은 중)이 냄비를 가지고 와서 한군데 평평한 땅을 찾으니,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샘물을 이루었기로 감히 다시 올라가서 곧 쌀을 씻어 밥을 짓게 하였다.
온 산에 다시 다른 재목은 없고, 있는 나무는 삼회(杉檜)와 비슷한데,
중의 말이 비자목이라고 하며, 이 나무로 밥을 지으면 밥맛이 없어진다고 한다.
시험해 보니 과연 그렇다. 옛사람이 밥을 지어 먹을 나무에 애를 썼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두류산에는 감과 밤과 잣들이 많아서 가을바람이 불면 열매가 떨어져 계곡에 가득 찬다.
그래서 중들이 주어다 요기를 한다.” 하는데, 이는 허언이다.
다른 초목도 오히려 나서 크지 못하는데, 하물며 과일에 있어서이랴.
매년 관가에서 잣을 독촉하니 거주민이 노상 되려 다른 고을에서 나는 것을 사들여서 공세(貢稅)에 충당한다고 한다.
모든 일에 있어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과 같지 않은 점이 이런 유이다.
저물 적에 봉의 절정에 오르니, 정상에 진루가 있어 겨우 한 칸의 판옥(板屋)을 용납하고
판옥 안에는 여지의 석상(石像)이 있는데, 이른바 천왕(天王)이다.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들보 위에 걸리고,
또, “숭선(嵩善) 김종직(金宗直) ㆍ 계온(季溫) 고양(高陽) 유호인(兪好仁), 극기(克己) 하산(夏山) 조위(曹偉) 태허(太虛)가 성화(成化) 임진 중추일(中秋日)에 함께 오르다.”라는 몇 글자가 씌여 있다.
그리고 예전에 구경 온 사람들의 성명을 내리 보니 당세의 호걸들이 많았다.
드디어 사우(祠宇)에서 자게 되어 두터운 솜옷을 입고 솜이불을 덮고 몸을 따뜻이 하는 한편 종자들은 사당 앞에서 불을 피우고 추위를 막았다.
한밤중에 천지가 청명하고 큰 들은 광막하고 흰 구름은 산골에서 자는데,
마치 한바다에서 밀물이 올라온 것 같고, 여러 군데 포구에서는 하얀 물결이 눈을 뿜으며,
노출된 산은 도서(島嶼)와 같이 점을 찍어놓은 듯하다.
진루에 기대어 내리보고 쳐다보니 심신이 으슥하며, 몸은 홍몽(鴻濛) 원시(元始)의 위에 있고,
가슴 속은 천지와 더불어 함께 유동하는 것 같았다.
신해(辛亥)일 여명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돋아나는 것을 보니, 청명한 공중이 마경(磨鏡)과 같다.
서성대며 사방을 바라보니, 만 리가 끝이 없고, 대지의 뭇 산은 모두 의봉(蟻封)과 구질(蚯垤) 같아서
묘사하기로 들면, 한퇴지(韓退之)의 남산시(南山詩)를 이해할 수 있고, 마음과 눈은 바로 공부자(孔夫子)의 동산(東山)에 오른 때와 부합된다 하겠다.
온갖 회포를 일으키고, 진세(塵世)를 내려다보니 무한한 감개가 뒤따른다.
이 산의 동 ㆍ 남쪽은 옛날 신라의 구역이요, 서 ㆍ 북쪽은 백제의 땅이라. 하루살이 모기떼가 소란을 피우며, 항아리 속에서 나고 사라지고 하는 격인데,
처음부터 헤아리면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여기에 뼈가 묻혔겠는가.
우리들이 오늘에 아무런 탈이 없어 여기 올라 구경하는 것은 역시 위에서 내려주신 은덕이 아니겠느냐.
망망하고 아득한 태평의 연화(煙火) 속에서도 또한 비환(悲歡)과 우락(憂樂)이 만 가지로 틀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드디어 백욱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해서 그대와 함께 악전(偓佺 고대의 신선)의 무리와 짝이 되어 나는데,
홍곡(鴻鵠)을 능가하며, 몸이 팔굉(八紘)의 밖에 노닐고, 눈으로 일원(一元)의 수를 궁리하여 기(氣)가 다하는 때를 볼 수 있겠는가.” 하니,
백욱은 웃으며, “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인하여 종들을 시켜 두 그릇에 제물을 갖추게 하여, 사당에 보고를 드리기로 하고 제문을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옛날 선왕(先王)이 상하의 구분을 제정하여 오악(五岳) ㆍ 사독(四瀆)에 있어서는 오직 천자(天子)만이 제사할 수 있고,
제후(諸侯)들은 다만 자기 봉지(封地) 안에 있는 산천만을 제사하며, 공경대부들은 각각 처지에 해당한 제사가 있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는 명산대천으로부터 사묘(祠廟)까지도 무릇 문인(文人) 행객(行客)으로 그 아래를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전제(奠祭)를 드리며 고유(告由)하는 일도 있다.
생각하건대 두류산은 멀리 해국(海國)에 있어 수백여 리를 뻗치어 호남 ㆍ 영남 두 경계의 진산(鎭山)이 되고,
그 아래 수십 고을을 옹위해 있으니, 반드시 크고 높은 신령이 있어 운우(雲雨)를 일으키고,
정기가 저축되어 영원토록 백성에게 복리를 끼쳐 주어 마지않을 것이다.
나는 진사(進士) 정여창(鄭汝昌)과 더불어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도(邪道)를 미워하여,
평생에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아니하고, 지나다가 음사(淫祀)를 발견하면 반드시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금년 여름에 마음먹고 산 구경을 나가서 이 산 기슭에 당도하자,
안개와 비가 아득히 내리므로 혹시 ?? 산의 특이한 경치를 두루 구경하지 못할까 걱정했었는데,
어제 비구름이 해소되고 해와 달이 광명하니, 마음을 깨끗이 하고 묵묵히 빌면
형산(衡山)의 신령이 반드시 한유(韓愈)씨에게만 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러 거주민에게 물으니, 신(神)을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삼는데 이는 거짓말이고,
점필(佔畢) 김공은 우리 나라의 박문다식(博聞多識)한 큰 선비인데,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를 고증하여,
신(神)을 고려 태조의 비(妃) 위숙왕후(威肅王后)로 삼았으니 이것이 신필(信筆)이다.
이는 열조(烈祖 태조(太祖))가 삼한을 통일하여, 동인(東人)으로 하여금 분쟁의 고통을 면하게 하였으니,
큰 산에 사당을 세워 길이 백성에게 제향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약관(弱冠)의 나이로 부친을 여의고, 노모(老母)가 당(堂)에 계신데 서산(西山)의 햇빛이 차츰 다가오니,
애일(愛日)의 정성이 일찍이 한발자국을 옮기는 순간에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주문(周文)이 구령(九齡)이 되매 곽종이 나이를 빈 경험이 있으니, 감히 산행(山行)을 위하여 고하고 감히 노모를 위하여 기도를 드린다.
백반 한 그릇과 명수(明水) 한 잔일망정 조촐하고도 정성이 들었음을 귀히 여긴 것이다. 상향(尙饗).”이라 하였다.
문이 이뤄지자 술잔을 드리려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방금 마야부인이라 하고 있는데,
그대가 위숙왕후라고 밝혔지만 세상의 의심을 면하지 못할까 걱정이니,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위숙왕후냐, 마야부인이냐를 차치하고라도, 산신령에게 잔을 드릴 수 있지 않느냐.” 하니,
백욱은, 공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태산(泰山)이 임방(林放)보다 못하단 말이냐.” 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국가가 향화(香火)를 행례할 적에 산신령에게 하지 않고, 매양 성모(聖母)에게나 또는 가섭(迦葉)에게 하는데 그대로서 어찌하랴 한다.
나는 그렇다면 두류산의 신령이 흠향하지 않을 것이다. 산신령은 버리고 음사(淫祀)를 번거롭게 하는 것은,
이야말로 질종(秩宗 예를 맡은 벼슬)의 과실이다 하고 드디어 중지하였다.
평소에는 다만, 구름이 하늘에 붙은 줄로만 알았고, 그것이 반공에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여기 와서 보니 눈 밑에 펀펀히 깔렸을 따름이다.
펀펀히 깔린 그 아래는 반드시 대낮이 그늘졌을 것이다.
오후가 되니 안갯기가 사방으로 합하기로, 드디어 내려와 석문(石門)을 경유하여 향적사(香積寺)에 도착하니
절의 중이 서로 치하하며 하는 말이, “늙은 것이 이 절에 머무른 적이 오래이다.
금년 들어 하고 많은 승속(僧俗)이 상봉을 구경하려 하였으나, 갑자기 풍우(風雨) ㆍ 운음(雲陰)이 산을 가리우게 되어,
한 사람도 두류산의 전경을 얻어 본 자가 없었는데, 어제 저녁 나절에 음우(陰雨)의 증세가 있더니,
선비님네가 올라가자 바로 깨끗이 갰으니, 이 역시 이상한 일이다.” 하므로, 나 역시 수긍하였다.
절 앞에 높은 바위가 동떨어져 있는데 이름은 금강대(金剛臺)이다.
이 바위에 올라보면 눈앞에 기묘한 봉이 수 없이 나열했는데, 흰 구름이 항상 둘려 있다.
법계(法界 절[寺])로부터 상봉에 가고 또 향적사에까지 가는 데는, 모두 층층의 비탈을 돌고 돌았었는데,
비탈의 전면은 전부 돌이 깔리고 산도 모두 첩첩의 돌뿐이라,
낙엽이 돌 구멍을 메워 초목의 뿌리가 거기에 의탁하여 살기 때문에, 가지가 짧게 꺾이니 모두 동남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구부러지고 앙상하여 가지와 잎사귀가 제대로 발육되지 못했는데 상봉은 더욱 심하다.
두견화가 비로소 한두 송이밖에 피지 아니하고 벌어지지 않은 망울이 가지에 가득하니,
정히 2월 초순의 기후였다.
중이 이르기를, “산상의 꽃과 잎이 5월에 한창 성하다가 6월이 되면 시들기 시작한다.”고 한다.
나는 백욱에게 묻기를, “봉이 높아 하늘과 가까우니 마땅히 먼저 태양을 받을 텐데, 도리어 뒤지는 것은 어쩐 까닭인가.” 하니,
백욱은 말하기를, “대지(大地)가 하늘과는 8만 리의 거리인데, 우리가 두어 날을 걸어서 상봉에 당도하였으니, 봉의 높이는 땅과 거리가 백 리도 차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늘과의 거리는 그 얼마인지 알 수 없으니 태양을 먼저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특히 외롭고 놀라서 먼저 바람을 받는 것이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대범 물(物)의 생리가 높은 데를 꺼리는 것인가. 그러나 높은 데는 충우가 모여드는 것을 면하지 못하지만
나직한 데는 역시 부근(斧斤) 액을 만나는 법이니, 장차 어디를 택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향적사 곁에 큰 나무 수백 주가 쌓여 있기로 중더러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늙은 것이 호남의 여러 고을을 다니며 구걸하여 배로 섬진강까지 하나하나 실어 와서
이 절을 새로 지으려고 한 것이 하마 6년이 되었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우리 유자(儒者)의 학궁(學宮)에 있어서는 그만 못하다. 석가의 교가 서역(西域)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어리석은 남녀들은 신봉하기를 문선왕(文宣王 공자)보다 더하니
백성의 사교(邪敎)에 탐혹하는 것이 정도(正道)를 신봉하는 진실성과 같지 않은 모양이다.” 하였다.
이 절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기로, 나는 중에게 말하기를, “천지의 사이에 물이 많고 흙이 적은데,
우리 나라는 산이 맨땅보다 많고, 국가의 인구는 나날이 불어나서 용납할 곳이 없다.
너는 자비(慈悲)를 좋다하니 중생(衆生)을 위하여 두류산 종래의 근백을 찾아서 장백산(長白山)에서부터 흙을 모조리 파내어 남해 바다를 메우고,
만 리의 평야를 만들어 백성의 살 땅을 마련하며, 복전(福田)을 만든다면
도리어 정위(精衛 옛날에 돌을 물어다 바다를 메운 새 이름)보다 낫지 않겠느냐.” 하니,
중은, “감히 당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높은 언덕도 골짝이 되고, 한 바다도 상전(桑田)이 되는 것이니,
운산(雲山) 석실(石室)에서 금단(金丹)을 수련(修煉)해서 너의 열반(涅槃)의 도를 버리고,
그의 장생(長生)의 술을 배워서 두류산이 골짝이 되고, 남해 바다가 상전이 되도록 함께 수명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니
중은, “인연을 맺기 원이라.” 하여 드디어 손뼉을 치고 크게 웃었다.
14일 임자에 영신사(靈神寺)에서 유숙하였다.
이 절의 앞에는 창불대(唱佛臺)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座高臺)가 있어 천 길이 솟아 올라가면 먼데를 바라 볼 수 있고,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어 쪼개 놓은 흠대 안으로 쏟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중의 말이 매[鷹]가 마시는 물이라고 한다.
북쪽에는 가섭(迦葉)의 적상이 있고, 당(堂)에는 가섭의 화상이 있는데,
비해당(匪懈堂)이 그리고, 짓고, 쓰고, 한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녹았기로
이러한 기보(奇寶)가 공산 속에서 버림을 받는 것이 너무도 애석해서 빼앗아 가지려고 했는데,
백욱의 말이, “한 사람의 집에 사장(私藏)하는 것이 어찌 명산에 공장(公藏)하여
구안자(具眼者)의 감상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만 같겠는가 하므로, 드디어 빼앗지 아니하였다.
백성들이 재물을 시주하며 가섭에게 복을 비는 것이 천왕(天王)과 더불어 대등하다.
밤에 법당에서 자는데 침침한 안개와 거센 바람이 창문을 들이친다.
그 기운이 사람에게 스며들면 몹시 해로우니 도저히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5일 계축에 산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가는데 능선 북쪽은 함양(咸陽) 땅이요, 능선 남쪽은 진주(晉州) 땅이다.
한 가닥 나무꾼의 길이 함양과 진주를 가운데로 나눠 놓은 셈이다.
방황하여 오래도록 조망하다가 다시 나무 그늘 속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모두 토산(土山)이요, 길이 있어 찾아갈 만하다.
매를 잡는 자가 많아서 길이 이뤄져 상원사(上元寺)나 법계사(法界寺)의 길처럼 심하지는 않다.
산마루로부터 급히 내려가서 정오에 의신사(義神寺)에 당도하면 절이 평지에 있고,
절벽에는 김언신(金彦辛) ㆍ 김미(金楣)의 이름이 씌어져 있다.
거주승(居住僧) 30여 명이 역시 정진(精進)하고 있으며, 대밭과 감나무 밭이 있으며,
채소를 심어서 밥을 먹으니 비로소 인간의 세상임을 깨닫겠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청산을 바라볼 때, 벌써 연하(煙霞)를 이별하고 원학(猿鶴)에게 사과하는 회포를 달게 된다.
요주(寮主) 법해(法海)는 무던한 중이었다.
잠깐 쉬고 드디어 떠나는데 높은 데를 오르기 싫어서 이에 시냇물 따라 흰 돌을 밟고 내려가니,
동부(洞府)가 맑고 깊숙하여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혹은 지팡이 꽂아 놓고 노는 고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신흥사(新興寺)에 당도하니 절 앞에 맑은 못과 반석이 있어 오래 소일만 하고 절집은 시내에 다다라 있어 여러 절에 비해 가장 좋으니,
구경꾼이 족히 돌아갈 줄을 모를 만하다.
어둘 녘에 절 안에 들어서니 여기는 작법(作法)하는 도량으로 종고(鐘鼓) 소리가 시끄럽고, 인물이 번잡하다하여 적이 실망을 했다.
이날에 험악한 산길을 약 10리 가량 걸었는데, 중들은 모두 잘 걷는 걸음이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에 우동(郵童) ㆍ 주졸(走卒)이 걸어서 닫는 말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자심에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는데,
요즈음 산행(山行)을 해보니 처음에는 걸음이 무거운 것 같았는데, 날이 갈수록 두 다리가 점점 가볍게 놀려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로소 모든 일이 습관들이기에 매었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매일 쌍지팡이를 짚고 다녔었는데 26일에야 비로소 지팡이를 버리고 말을 탔다.
운중흥(雲中興) ㆍ 요장로(了長老) 두 중이 서로 전송하여 동구에 나와 한 외나무다리에 당도하자
요장로가 말하기를, “근세에 퇴은(退隱)이란 스님이 있어 신흥사에서 거주하는데, 하루는 그 문도에게 말하기를,
손님이 올 것이니 마땅히 깨끗이 소재하고 기다리라.” 하였는데,
이윽고 어떤 사람이 흰 망아지를 타고 등덩굴로 꼬리를 만들어 쥐고 빨리 행하여 외나무다리를 밟기를 평지와 같이 하니, 뭍사람이라 놀랬다.
그가 절에 당도하자 영접하여 실내로 들어가 밤새도록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들어서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떠나가는데 강(姜)씨의 집 창두(蒼頭)가 절에서 올을 배우다가 그를 보고 이인(異人)인가 의심하여 고삐를 잡고 따라 붙으니
그 사람이 채찍으로써 뿌리치고 가다 소매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떨어뜨렸다.
창두(蒼頭)는 급히 가져가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잘못하다 속세의 노예에게 보이게 되었으니 보배롭게 간직하고, 행여 세상에 보이지는 말라 하고 급히 행하여 다시 외나무다리를 경유해 갔다.
강창두(姜蒼頭)란 자는 지금 백두(白頭)로 아직도 진주 지경에 살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아는 자가 그 책을 구경하자고 청했으나 주지 아니하였다.
대개 그 사람은 최고운(崔孤雲)인데, 죽지 아니하고 청학동(靑鶴洞)에 있다.” 한다.
그 말이 비록 황당하나 역시 기록할 만하다. 나는 백욱과 더불어 시험 삼아 그 다리를 건너는데,
겨우 두어 걸음 내딛자 정신이 황홀하여 떨어질 것만 같으므로, 도로 나와 시내의 하류에서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건넜다.
걸어서 골짝을 벗어나니 산에는 운당(篔簹 전 죽(箭竹))이 많고, 물은 동구 아래로 비껴 흐르는데, 점점 촌락이 보인다.
서산의 기슭에 옛 성루가 있는데 옛날의 화개현(花開縣)이라고 한다.
5리를 가니 시냇물이 어지러이 흐르고, 돌은 쫑긋쫑긋하다.
동으로 1마장쯤 가니 두 시내가 합류하고, 두 돌이 대립하여 쌍계석문(雙磎石門)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광제암문(廣濟巖門)이란 글자와 맞추어 보면 더욱 커서 말만큼씩 하나,
글자체가 서로 비교되지 아니하여 아동들의 습자(習字)와 같다.
석문을 경유하여 1마장을 가니 귀룡(龜龍)의 옛 비가 있는데, 그 액(額)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란 아홉 자가 있고,
방서(傍書)에는, 전 서국도순관승무랑시어 사내 공봉사 자금어대신 최치원 봉교찬(前西國都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이라 했다.
바로 광계(光啓) 3년에 세운 것인데, 광계는 당(唐) 나라 희종(僖宗)의 연호다. 햇수는 지금으로 6백여 년 전이니 역시 고물이다.
인물의 존망(存亡)과 대운(大運)의 흥폐가 언제까지라도 서로 잇따른 법인데, 유독 완연한 이 돌만이 홀로 서서 썩지 아니하니 한번 탄식을 일으킬 만하다.
구경한 비갈(碑碣)이 많다. 단속사(斷俗寺) 신행(神行)의 비는 원화(元和) 연간에 세웠으니, 광계(光啓)보다 앞섰고,
오대산(五臺山) 수정사(水精寺) 기(記)를 새긴 갈(碣)은 거의가 권적(權適)의 소작이니 역시 한 세상의 문사(文士)다.
그런데 유독 이 비에 대하여 자꾸만 감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은, 고운의 수택(手澤)이 아직도 남아 있을 뿐더러,
고운이 산수 사이에 소요하던 그 금회가 백 대의 뒤에 계합되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만약 내가 고운의 세상에 났다면, 마땅히 그 지팡이와 신발을 받들고 시종하여
고운으로 하여금 외롭게 되어 부처를 배우는 무리와 더불어 짝이 되게 하지 않을 것이요,
고운으로 하여금 오늘날을 당했을지라도 또한 반드시 중요한 자리에 있어 나라를 빛나는 문장으로써 태평의 정치를 꾸며내게 하고,
나도 또한 문하에서 필연(筆硯)을 시봉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석면(石面)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감개(憾慨)를 금하지 못했으나,
그 글을 읽어보니 병려(騈儷)로 되었을 뿐더러 선불(禪佛)을 위하여 글짓기를 좋아하였으니 어쩐 일인가.
아마도 만당(晩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 누습(陋習)을 변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초연히 쇠한 세상을 방관하여 때와 더불어 오르내리며 선불에 의탁하여 스스로 숨이 지내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비의 북쪽에 수십 보 거리에 백 아람이 되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어 뿌리가 시냇물을 걸앉았는데, 역시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
중이 정원에서 불을 놓다가 잘못되어 회화나무에 불이 붙어 용호(龍虎)가 거꾸러진 나머지,
그루터기의 썩어 있는 것이 길이 넘고, 중들은 아직도 뿌리 위를 밟고 왕래하며, 이름을 금교(金橋)라 부른다.
아, 식물(植物)이란 역시 생기(生氣)를 지닌 것이라. 돌처럼 수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절 북쪽에 고운이 올라 노닐던 팔영루(八詠樓)의 유지(遺址)가 있는데, 중 의공(義空)이 재목을 모아 누를 다시 세우기로 한다고 한다.
의공과 더불어 잠깐 앉아 쉬는 사이에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기로 물으니,
관에서 은어를 잡는데, 물이 많아서 그물을 칠 수 없고, 천초(川椒) 껍질이나 잎으로 고기를 잡아야 되겠다하며,
절중에서 독촉하여 얻어오라는 것이다.
중의 말이, “살생(殺生)하는 물건을 가져오라니 어쩌자는 것인가.” 했고, 나 역시 한참동안 빈축하였다.
오대산(五臺山)의 백성이 이미 이장[里正]의 포학을 면하지 못했는데,
쌍계사 중이 또한 장차 고기를 잡는 물건을 제공하게 되었으니, 산중도 역시 불안한 곳이다.
이튿날 을묘일에 비로 인하여 출발을 중지하였다.
28일 병진에 쌍계의 동쪽을 타서 다시 지팡이를 짚고 석등(石磴)을 더위잡고 위잔(危棧)을 곁하여 두어 마장을 가니,
하나의 동부(洞府)가 나오는데 자못 너그럽고 평평하여 경작(耕作)을 할만하다.
세상이 여기를 들어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눌러 생각해보니 우리가 여기를 올 수 있는데, 이미수(李眉守)는 어찌하여 오지 못했던가.
미수가 여기를 오고도 기억을 못했던가. 그렇지 않으면 과연 청학동이란 것은 없는데,
세상에서 서로 전하기만 하는 것인가.
앞으로 수십 보를 걸어 나가 동떨어진 골짝을 내려다보며 잔도(棧道)를 지나니 암자 하나가 있는데,
이름은 불일암(佛日庵)이다. 절벽 위에 있어 앞을 내려다보면 땅이 없고, 사방의 산이 기묘하게 솟아서 상쾌하기 이를 데가 없다.
동서쪽에 향로봉(香爐峯)이 있어 좌우로 마주 대하고, 아래는 용추(龍湫)와 학연(鶴淵)이 있는데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암자 중이 말하기를, “매년 6월이면 몸뚱이는 파랗고, 이마는 붉고, 다리는 긴 새가
향로봉 소나무에 모였다가 날아 내려와 못물 마시고 바로 간다.” 한다.
여기 사는 중들이 자꾸 보는데, 이것이 청학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잡아다가 거문고와 함께 짝을 만들 수 있으랴.
암자 동편에 비천(飛泉)이 있어 눈을 뿌리며, 천 길을 내리 떨어져 학연(鶴淵)으로 들어가는데 이거야 말로 경치 좋은 곳이다.
등구(登龜)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전후 16일이 걸렸는데, 곳마다 천암(千巖)이 다투어 뻗쳐나고
만 골짝의 물이 어울려 흘러 기쁘기도 했고, 놀라기도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하나였다.
또 학의 이야기를 듣고 이미수가 찾던 곳이 거기가 아닌가 의심했으나 골짝이 워낙 높고 동떨어져서 원숭이가 아니면 갈 수가 없으니,
처자(妻子)와 우독(牛犢)이 용납할 곳이 없다.
엄천(嚴川)이나 단속(斷俗)은 모두 불자(佛者) 장소가 되어버리고 청학동마저 끝내 찾지 못하니 어찌 하랴.
백욱이 말하기를, “솔과 대가 둘 다 아름답지만 차군(此君 대의 이칭)만 같지 못하고,
바람과 달이 둘 다 맑지만 중천(中天)에 온 달 그림자를 대하는 기경(奇景)만 같지 못하고,
산과 물이 모두 인자(仁者) ㆍ 지자(智者)의 즐기는 것이지만, 공자께서 칭찬하신 「물이여 물이여.」만 같지 못하니,
명일에는 장차 그대와 더불어 악양성(岳陽城)을 나가서 대호(大湖)의 물결을 구경하도록 하자.” 하므로 “나도 그렇게 하자.” 하였다.
[주D-001]녹명(鹿鳴) :
《시경》 소아(小雅) 녹명편(鹿鳴篇)〉를 말한 것인데, 아름다운 손님을 잔치하는 시다.
[주D-002]이조부(二鳥賦) :
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젊었을 적에 서울에 갔다 실의(失意)에 차서 국문(國門)을 나와 동으로 가는 길에서
어떤 사자(使者)가 귀한 새 백오(白烏) ․ 백구욕(白鸜鵒) 두 마리를 가지고 천자에게 진상 가는 것을 보고 느껴서
이조(二鳥)를 두고 부(賦)를 지었음.
대의(大意)를 들면 무지한 새는 오직 깃과 터럭이 이상하다 해서, 천자의 빛을 보게 되는데,
사람은 지모와 도덕을 지니고도 새만 못하다는 뜻임.
[주D-003]단구성(丹丘城) :
옛날 신선이 살던 곳으로 단대(丹臺)라고 칭함.
이백(李白)시집(詩集)에 서악(西岳) 운대(雲臺)에서 단구자(丹丘子)를 보내는 노래와 원단구(元丹丘)를 보내는 노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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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문화추진회 刊 속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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