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추억이야기

소를 먹이면서(지리산)

배꼽마당 2012. 11. 8. 15:42

소를 먹이면서(지리산)

 

2006년 9월 26일 오후 9:23

 

60년대엔 시골에서 소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농사를 짓는데 아주 긴요하게 일꾼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그것도 길이 아주 잘 들여진 소는 값으로 계산이 안 될 정도의 존재였으니까 요즘의 소 한마리와 견줄 바가 되지 못했다.

사료가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여름이면 소를 먹이는 몫은 당연히 어린 아이였고 그 운명의 몫에 대한 선택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학교를 갔다 오면 당연히 소를 먹이러 가야 했고 여름 방학은 물론 가을 걷이가 끝나고 들판에 풀이 거의 동이 날 무렵이면 그 소를 먹이는 고역은 끝이 남과 동시에 해방이 되었으니 지금의 4,50대 시골 출신들은 대부분 그런 경험을 했으리라.

우리집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동네 뒷 쪽에 위치한 정자나무에서 한낮의 더위를 피하다가 산으로 산으로 소를 몰고 갔다. 이 마을 저마을 모두 같은 풍습이었다. 평촌 마을은 대부분 수듬판이나 애악골이었고 동호 마을은 동네 뒷산, 산청군 자혜리 소 떼는 묵은터나 가끔 우리 동네와 겹쳐지는 얼음배기로 소떼를 몰고 오곤 했다. 소 약 2,30마리와 그 숫자에 맞게 사람의 숫자도 함께 움직였으니 그 모습 또한 장관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당시의 시골 풍속도였다.

소떼를 산 언덕배기 목적지에 다달아서는 소 고삐를 소 뿔에 칭칭 동여 맨다. 안전하게 마음대로 소 풀을 뜯기기 위해서였다.

그런 후엔 자유다. 소 떼가 어디서 놀고 있는지만 가끔 관찰하면 그만이었고, 그 이후부터는 놀이 행동에 착수를 한다.

여러 놀이 중에 우리 또래들이 가장 많이 즐겼던 것은 감자 삼굿이었다.

얼음배기 산 언덕엔 붉은 빛에 가까운 황토 언덕이 있었다. 흙의 색이 노랑, 연두, 흰색 할것없이 아뭏튼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는 그런 흙의 언덕이 있었는데 그 곳이 우리들의 놀이 장소였으며 바로 감자 삼굿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나중에 알았던 사실이지만 그곳은 고령토 지대였음)

며칠이 걸려서 이곳 저곳에서 납작하고 넓은 돌 판을 준비해 두었다.

그 다음엔 부엌 아궁이처럼 만드는 일에 모두들 몰두를 했었는데 누구의 지시나 기술 감독은 없었다. 그냥 심심하니까 창의력을 발동하여 제각각 아궁이 만들기 놀이를 했던 것이다.

부드러운 언덕배기의 황토밭을 고챙이로 후벼 팠다. 그 황토의 감촉은 뽀송뽀송 하면서도 부드러워 감촉이 참 좋았고, 흙과 함게 뒹구는 것 자체가 놀이였기 때문에 흙을 파 내는 놀이와 함께 아궁이와 같이 양 옆에는 알맞은 돌 판을 세로로 놓은 다음 그 위에는 얇고 평평한 돌 판을 얹어 두었다. 고무신으로 옹달샘까지 가서 길러온 물과 황토흙을 반죽해서는 흙과 작은 돌멩이로 굴뚝까지 함께 만들고 또 평평한 돌판 바깥으로는 안쪽에 감자를 넣을 수 있도록 돌멩이와 황토 흙으로 솥단지처럼 만들어 나갔다.

서로 경쟁적으로 높이 쌓는 솜씨도 함께 발휘를 하기도 했다.

그 다음 날에는 감자를 너 나 할것없이 가져 와서는 감자 삼굿 작업에 착수를 했다.

곱고 예쁜 칡 잎을 한아름 따 와서는 전 날 잘 만들어 놓은 솥단지 같은 돌판 위에 칡 잎을 여러 겹 펴고서는 그 위에 감자를 얹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칡 잎을 여러 겹 감자위를 덮고서는 그 위에 황토로 수북하게 덮는 작업을 했다. 손으로 다독이면서 김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정성을 들이는 일까지 잊지 않았다.

감자야 익건 말건 우리들은 해가 뉘엿 뉘엿 넘어 갈 때까지 군불을 지피듯 불을 지폈다.

가끔 푸른 잎의 생 소나무 가지를 잘 달구어진 아궁이에 집어 넣으면 약 30cm 높이의 굴뚝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물씬물씬 피어 올랐다.

그것도 경쟁이었다.

누구네 아궁이에서 연기가 힘있게 솟아 오르느냐 하는 경쟁이었다. 심사하는 사람도 없고, 잘 했다고 칭찬을 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자기의 아궁이에서 힘찬 연기가 솟아 오를 때면 제각각 싱긋 웃는 것으로 자기 만족을 했다.

태양이 하늘에서 작열을 했고 땀이 비오듯 쏟아져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려 완전히 구릿빛이어도 누구하나 그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산골 아이들은 그 모습이 당연했고 사람들의 얼굴 색이 당연히 그런줄 알았으니까 말이다.

두어시간을 그렇게 불을 지피고 나면 돌판의 감자 삼굿에서는 김이 조금씩 핀다.

달구어진 돌판의 열기에 칡 잎이 익고 타면서 발생하는 수분과 약간의 압력이 칡의 잎 속에 감춰진 감자를 서서히 익게 하고는 나중에 탈듯 말듯한 감자가 알맞게 익어 버린다.

아궁이의 불을 끄고, 어느 정도 식힌 다음에는 가느다란 고챙이로 감자 무덤에다가 푹 찔러 본다. 곱게 쑥 들어가면 감자가 잘 익은 것이도 그렇지 않다면 설 익은 감자가 된다.

흙으로 범벅이 된 손을 반바지에 대강 털고서는 그 손으로 감자를 꺼내 먹었다.

한나절 내내 고된 작업을 했으니 배도 참 출출했다. 간식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맛이 어땠을까!

뻘건 황토가 뭍은 손으로 감자 껍질을 벗겨 먹었다. 황토가 우리네 몸에 참 좋다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그 황토 흙에는 게르마륨 성분이 참 많았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

소먹이는 아이들의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고 지리산의 작은역사가 만들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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