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향자료

동강(桐江)과 엄뢰(嚴瀨), 그리고 동강대(桐江臺)

배꼽마당 2016. 1. 7. 14:36

엄천강변기행] 1. 동강(桐江)과 엄뢰(嚴瀨), 그리고 동강대(桐江臺)

 

                                                                                                                                                                                                                    글쓴이 : 꼭대

 

 

1.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리산하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강은 구례, 하동 등 지리산 서쪽 골짝에서 발원한 하천을 흡수하여 19번 국도를 따라 지리산의

 짝처럼 흘러가는 섬진강이다. 특히, 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산간지형을 지나는 덕분에 공해에 찌들지 않은 맑은 물이 때로는 대숲과

하얀 모래톱을 벗 삼아 지리산에 기대어 유유히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심심유곡 지리산과 짝으로 떠올려지는 강이 되었다.

 

그러나 섬진강은 지리산의 계곡을 받아 지리산 곁을 흐르기는 하지만 한발치 떨어져 곁눈으로 지리산을 바라볼 뿐, 지리산과 한몸이

되어 뒤엉커 흐르지는 않는다.지리산의 속살을 후비며 한몸이 되어 흐르는 진정 지리산의 강은 지리산 자락 민초들의 질곡 짙은 삶은

 물론이며 선비들의 기개와 은둔의 흔적들이 구비구비마다 서려 있는 엄천강이다.

 

지리산 북서쪽에서 발원하여 운봉과 인월을 거쳐 흘러내리는 람천(藍川)이 산내에서 뱀사골에서 흘러내리는 만수천을 흡수한 후에

마천에서 백무동에서 흘러오는 덕전천과 합해지며 임천강이 되어 흐르다가, 용유담에 이르러 엄천강으로 이름을 바꾸어 계속 지리산

구비를 휘돌아가다가 생초에 이르러 지리산과 작별하며 경호강이 되어 남강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옛날 지리산 유람의 전초기지 중에 하나였던 함양에서 지리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꼭 건너야 하는 강이 엄천강이며,

지리산 깊은 오지를 관통하기 때문에 숨어살 기 좋은 곳으로서 포장도로가 생겨 접근이 수월해진지도 고작 이십여년이 채 되지 않아

아직도 강변을 따라 향수에 젖게 하는 시골의 정취가 살아 있는 강이기도 하다.

 

이와같은 유서깊은 엄천강도 용유담 부근에 지리산댐이 설치된다면 영원히 사라져버릴 운명에 처하여, 엄천강이 품고 있는 역사와

삶의 흔적들을 기록하여 전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책무로서 [엄천강변기행]을 정리해 나갈 것이다.

다만, 1차적인 정리차원에서 위치와 유래 등을 중심으로 답사를 지원하기 위하여 교과서적으로 기록해나갈 뿐,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강변의 정취에 합당한 서정적 기록은 <유키>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의 감성에 맡기기로 한다.

 

2. 동강(桐江)마을

 

동강은 엄천강 중간쯤 위치한 마을로서 [지리99] <유키>님의 고향이기도 하며, 엄천강변 마을의 정취에 관해서는 이미 <유키>님의

[엄천강의 추억] 연재를 통하여 감동을 불러일으킨 바 있으므로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왜 동강인가. 마을 앞으로 엄연히 유서 깊은 이름을 달고 흐르는 엄천강이 이미 있고, 마을 주변으로 더 이상의 다른 강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마을이름에 이 들어갔을까.

 마을이름의 어원을 풀이하면서 오동나무 자와 연관지어 마을 앞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동강이라 한다는 설명을 볼 수 있는데,

 마을 앞에 오동나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작은 마을지명에 자로 받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 주변의 지형에서 어원을 찾을 수 없다.

 

동강(桐江)의 지명 어원이 중국 고사에 비롯되었음은 마을 주변에 桐江과 유관한 엄뢰(嚴瀨)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1170년 무렵 중국 남송시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강호를 떠돌면서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대복고(戴復古:1167~미상)의 시 한편을 살펴보자.

 

낚시터(釣臺)

 

세상일에 무심한데 오직 하나 낚싯대라(萬事無心一釣竿)

삼공 벼슬 준다 해도 이 강산과 안 바꾸네(三公不換此江山)

평생에 유문숙을 잘못 안 까닭에(平生誤識劉文叔)

헛된 명성만 세상 가득 드러냈네(惹起虛名滿世間)

   

이 시는 후한(後漢) 때의 은자(隱者)인 엄광(嚴光·기원전 37~서기 43)을 위한 헌사다. 엄광의 입장이 되어 쓴 시다. 엄광은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기원전 6~서기 57)와 친구였다.

()가 문숙(文叔)인 광무제는 황제가 되자 어린 시절의 친구 엄광을 불렀다. 믿을 만한 사람을 곁에 두고자 함이었다.

절친한 친구가 황제가 됐으니 얼굴만 들이밀어도 한자리를 얻을 판에 엄광은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광무제 유문숙이 사람을 보내 수소문을 해보니 엄광은 양가죽 옷을 걸치고 냇가에 앉아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촌부로 살다 죽었다.

권력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다 간 엄광의 모습은 동강수조(桐江垂釣)’ ‘동강조어(桐江釣魚)’ ‘엄릉거조(嚴陵去釣)’ 등의 제목으로

 시와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엄광이 낚시질하던 곳이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의 엄뢰(嚴瀨)였기 때문이다.

남송(南宋)의 시인 대복고가 낚시터(釣臺)’를 쓴 이유도 그의 절개를 찬탄하기 위함이다.

(주간조선 20122209호에서 발췌)

 

중국 절강성 동려현(桐廬縣)의 엄뢰(嚴瀨)와 관련된 고사임을 알 수 있는데, 아름답고 운둔하기 좋은 곳을 지칭하는 지명이기에

 엄천강변 마을 이름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 고사가 등장하는 그림 중에서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가 그린 동강조어(桐江釣魚)가 있다.

 

1동강조어.jpg 

*단원의 [桐江釣魚]

우측상단 화제에 桐江이 아닌 東江으로 쓴 것은 순간적인 착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2꽃봉산자락동강마을.JPG 

*꽃봉산 자락 그림 같은 동강마을 풍경

 

3. 엄뢰(嚴瀨)

 

엄천강변에 엄광(嚴光)의 고사에 나오는 동강을 이름으로 삼은 마을이 있으니 당연히 엄광이 낚시하던 엄뢰가 따라야한다.

 

엄뢰는 엄천강이 동강마을을 조금 지나 베리산의 적벽에 부딪히며 휘돌아가는 곳이다.

지금은 베리산 중턱을 깎아 도로를 내어버리는 통에 흉물스러운 절개지가 드러나 옛 정취는 사라져버렸지만, 높은 벼랑아래 유유히 흘러가는

 강가에서 바라보노라면  세상의 욕망을 다 버리고 숨어서 하염없이 세월을 낚고 있는 엄광이 그리워질 것이다.


 

3엄뢰.JPG

*벼랑길에서 내려다본 엄뢰

 

4벼리벼랑과 엄뢰.JPG

*베리벼랑과 엄뢰

 

5엄뢰주변엄천강.JPG

*엄뢰에서 바라본 엄천강 상류

 

6엄뢰주변 지형도.jpg

 *동강과 엄뢰 주변 지형도

 

엄뢰에 관한 선현들의 기록으로는 박여랑의 [지리산일과]에 보인다.

 

동부자락 지리산행을 마치고 방곡에서 엄천을 지나 손곡(엄뢰 바로 옆 마을)에 있는 최함씨의 계당에서 하루를 묶고 다음날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좌수 최응회 씨가 우리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였다. 최군은 어려서부터 나와 친한 사이였다. 중풍으로 걷기가

어려웠지만 우리들을 위하여 엄뢰대(嚴瀨臺)까지 찾아왔다. 엄뢰대 아래에는 큰 내가 있었는데 이 내는 두류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다.

이곳에 이르러 몇 리나 되는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물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맑고 배를 타고 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깊었다.

시험삼아 대추를 던져보았더니 돌아다니던 물고기가 많이 모여들었다. 물결 위로 유유히 헤엄치는 비단 물고기도 많았다.

(최석기의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록에서 발췌)

 

여기서 말하는 엄뢰대가 엄뢰를 둘러싸고 있는 석벽을 지칭할 것이다.

 

4. 동강대(桐江臺)

 

중국 고사에 나오는 은둔처의 동강이 있다면 당연 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하고, 그 곳은 동강마을 쪽이 아니라 엄천강 건너편에서

동강마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남호리에서 동강마을로 건너가는 엄천교가 시작하는 곳에서 도로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이 동강대로서 중턱에 동강대 각자가 있다.


 

 

7동강대.JPG

*엄천교에서 바라본 동강대

 

8동강대각자.JPG

*동강대 중턱에 있는 각자

 

  동강대 각자 좌측에 방향을 가르키는 자를 포함하는 동산대(東山臺) 각자가 있는데 원기마을에서는 이곳이 동쪽에 있으므로 새겨놓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각자는 桐江臺 아래 은둔지 답게 跡隱(적은)과 함께 뜻모를 晩庄(만장)이 새겨져 있다.

 

 

5. 고사에 나오는 은둔처의 지명을 동강마을에 사용한 까닭

 

지리산과 삼봉산이 둘러싸고 있는 엄천강변은 어디인들 절경이 아닌 곳이 없고 은둔하고 싶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지금의 조그만 동강마을의

 지명에 고사에 나오는 대표적인 은둔처의 이름을 따왔을까.물론 마을 주변에 베리산 벼랑이 엄뢰로 명명할 만한 절경을 이루고 있긴 하지만, 조금 설명이 부족하다.

 

일제강점기 이전 구한말에는 엄천강변 지역은 지금의 휴천면과 별도로 엄천면이 있었으며, 지방 행정을 수행하던 엄천면사무소가 바로 지금의 동강마을에

있어 엄천강변의 중심 마을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엄천강변 풍경을 비유하기 좋은 엄광의 고사를 인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9동강마을.JPG

*동강마을

 



자료 : 지리산 아흔아홉골 ( http://www.jiri99.com/new.ph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