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校長團

고령 대가야 역사의 흔적들

배꼽마당 2017. 1. 5. 23:52

대가야의 기원은 후한 시기 고령 지역에서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서서히 성장해 나간 반로국(半路國)이다. 반로국은 3세기 후반경 내재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현재의 고령군 우곡면 일대인 신복현과 합천 야로 지역인 적화현을 통합하면서 지역 연맹체를 구성하였다. 지역 연맹체 단계에 이르렀을

 무렵 대가야의 모습은 대가야읍 내 쾌빈리 고분군을 통해 볼 수 있는데, 쾌빈리 1호 목곽묘에서 확인되는 유물들이 지산동 35호분 단계의 것과 연결

된다는 점에서 대가야의 발전 양상을 추적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가야의 발전 원동력은 철제 무기로 무장된 군사력을 기반으로 마련한 강력한 정치 체제와 철을 바탕으로 한 교역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더불어 지리적 위치상 고구려군의 남정으로 인한 전화를 전혀 입지 않아 기왕에 4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내재적인 발전이 지속될 수 있었다.

 또한 4세기 후반 들어 진행된 백제와의 교류로 선진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을 것이다. 발전한 대가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인 479년 남제로의 사신 파견 역시 백제와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에서 대가야 계통의

 유물들이 발견되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여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야로 지역의 철광이다. 철기의 제작은 단단한 철제농기구의 사용으로 좀 더 나은 농업 생산력을 이끌어 냄과 동시에

 무구류의 제작으로 말미암은 강력한 군사력 확보를 가능하게 해 준다. 이러한 철기를 바탕으로 대가야는 서서히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경상남도 서부 일대를 영향권 내에 둘 수 있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가야 건국설화를 형상화한 작품


『동국여지승람』「고령현」조에는 대가야 시조신화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가락국기」조에 수록된 수로왕 신화보다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이고, 가야산신

정견모주의 존재로 보아 대가야의 주체가 토착적 성격이 짙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로와의 형제 관계가 나타나 있으므로, 고령 지방의 토착 집단이

세력 성장으로 보아 대가야의 정통임을 표방하며, 김해 방면의 집단을 대신하여 가야 연맹의 주도적 존재로 대두되는 것을 반영한 설화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