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山寺記(왕산사기)[1]
僧 坦瑛(승 탄영)[2]
[1] 왕산사기(王山寺記)=지금 경상남도 산청군 서쪽 20리, 곧 금서면 화계리 왕산 아래 있는 구형왕을 수호하던 왕산사의 내력을 적은 기문(記文)
[2]. 중 탄영(僧 坦瑛)=효종원년(청나라 순치7년:1650)에 왕산사기를 지은 승려로서, 그후 숙종13년(청나라 강희26년:1687) 방호산인 형곡당 복한(方壺山人 荊谷堂 復還)이 수정암기(水晶菴記:왕산사의 개칭)을 지었을 때는 그의 문인(門人)으로써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山陽縣之西隅, 方丈山東麓, 有山曰王山, 有寺曰王寺, 上有王臺[3], 下有王陵, 故曰王山, 知守護陵墓, 故王寺, 寺本王水晶宮也, 陵乃駕洛國第十葉仇衡王所예之玄宮也.
산양현(山淸)의 서편 모퉁이자, 방장산(智異山)의 동쪽 산록에, 산이 있으니 왕산(王山)이라 하고, 절이 있으니 왕산사(王山寺)라고 한다. 산상에는 왕대(王臺)[3]가 있고, 산하에는 왕능(王陵)이 있으므로 왕산이라 하며, 왕능 수호를 맡으므로 왕산사라하는데, 절은 본래 왕의 수정궁(水晶宮)이었고, 능은 이에 가락국 제10대 구형왕(仇衡王)께서 묻힌 무덤이었다.
[3] 왕대(王臺)=구형왕능도(仇衡王凌圖)를 보건데,왕대의 위치는 정상에 표시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31 山陰縣 佛宇 『王臺菴 在王山』
蕭梁[4]大通八年[5], 新羅眞興王, 來攻于駕洛, 駕洛仇衡王, 不忍以土地傷民, 遜國于新羅, 降爲金官郡都督[6], 後井與其食邑而舍之, 來居于此, 因卒而葬之, 累石爲邱, 輿地[7]王山誌曰 山中累石爲丘, 四面有層級, 俗稱王陵云者, 是也.
소양(蕭梁) 중대통(中大通) 4년(532)에 신라 법흥왕이 가락을 쳐오므로, 가락 구형왕은 국토로 말미암아 백성을 상하게 함은 참아 볼 수 없다 하시고, 나라를 신라에 손양(遜讓)하여, 금관군 도독(金官郡都督)으로 강등되셨다. 뒤에 그 식읍(食邑)을 모두 주어버리고, 여기에 와서 거처하시다가 세상을 여의시므로 인하여, 이어 장례하고 누석(累石)을 쌓아서 구릉(邱陵)을 만들었다. 여지승람 왕산지(王山誌)에 말하기를 『산중에 누석으로 구릉을 만들고, 4면(四面)에 층계가 있으니, 세속에 왕능이라 일컫는다』고 함은 이 곳이다.
[4] 소양(蕭梁)= 중국 양 무제(梁武帝)의 성은 소(蕭)씨 이름은 연(衍), 국호는 양(梁)인데 『소씨의 양나라』라는 뜻이나 역사문헌에는 양이라 했을 뿐이다.
[5] 대통8년(大通八年)=八년은 六년의 잘못이며,대통(大通)은 二년 뿐인즉, 중대통(中大通)四年(532)이 옳은 것이다. 이러한 관례는 여러 구보에서도 흔히 보게된다.
[6] 금관군도독(金官郡都督)=삼국사기 권四 신라본기 법흥왕 十九년(532)조에는 『상등의 직위를 수여하다』(授位上等)고 하였음.
[7] 여지승람(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을 말한 것으로, 권31 山陰懸 山川 조에 『王山, 在懸西十里, 山中累石爲丘, 俗稱王陵云』이라 하였음.
其後 王太子[8]〔=王孫〕 大角干舒玄, 捨宮爲寺, 王孫[9]〔=王曾孫〕 大將軍興武王庾信, 追封首露王廟於王臺, 爰立仇衡王祠於玆寺, 所以薦祖父冥路, 奉香火之願刹[10]也. 因侍陵七載, 築臺習射, 故今寺右, 有金將軍射臺云,
그 후 왕손 각간(角干) 서현(舒玄)이 수정궁을 버리고, 왕산사를 삼았으며, 왕증손 대장군 흥무왕이, 수로왕묘(首露王廟)를 왕대에 추봉하고, 이내 구형왕사(仇衡王祠)를 이 절에 건립한 연유로써, 조부의 명로(冥路)를 빌고 향화(香火)를 받들던 원찰(願刹)이었다. 7년동안 능을 모시면서 축대를 쌓아 활쏘기 연습을 하였으므로 지금 절의 오른편에 김 장군 사대(金將軍射臺)가 있었다고 한다.
[8] 왕태자(王太子)=앙손(王孫)의 오기임)
[9] 왕손(王孫)=왕증손(王曾孫)을 오기한 것임.『仇衡王 子는 武力, 孫은 舒玄, 曾孫은 庾信』
[10] 원찰(願刹)=소원을 빌기 위하여 세운 사찰(寺刹)
新羅三十法敏, 有制曰 朕乃仇衡王之外孫, 遣中使, 率匠石, 儼潔其祠祀之儀, 重新자寺, 特封近處三十頃田, 以奉香火之資,
신라 30대왕 법민왕(文武王)은 조서를 내려 『짐은 구형왕의 외손이다』하고, 사자를 보내어 석공(石工)을 거느리고, 사당의 제의(祭儀)를 정결하게 하고, 절을 중수하고, 근처 밭 30경(頃)을 바쳐서, 향화의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其後, 王陵久荒, 禪宮亦廢, 物不恒悴. 得時以榮, 道不終否, 得人以興, 故高麗神宗四年, 下旨州郡, 重修王陵, 兼葺王寺, 及我 宣廟黑龍之歲[11]. 靑衣之亂, 玆山寺墓, 沒入夷蕩, 金田[12]巳灰, 垠악[13]猶存, 但聞嶺猿[14]哀嘯. 谷鳥悲鳴而己,
그 후 능은 오래 거칠어지고, 절도 역시 퇴폐하였다. 물건은 항상 쇠퇴하지를 않으니 때를 얻으면 번영하고, 도(道)는 끝내 비색(丕塞)하지를 않으니, 사람을 기다려 흥왕한다. 그러므로 고려 신종4년(1202)에 교지(敎旨)를 고을로 내려서, 능을 중수하고 겸하여 절을 고쳤었다. 우리 선조(宣祖) 임진년(1592) 왜란에 이르러, 이 왕산의 절과 능묘가 난리에 침몰되어 들어갔다. 절은 이미 소실되었으나, 절터는 아직 남아 있으므로 다만 산짐승 애타게 울고, 새짐승 슬프게 울 뿐이었다.
[11] 흑룡지세(黑龍之歲)=임진(壬辰)년.
[12] 금전(金田)=금지(金池)라 하기도 하는데 사찰의 뜻임,
[13] 은악(垠악)=비탈진 경계로서, 여기에는 절터를 의미한 것임.
[14] 영원(嶺猿)=산에 있는 원숭이를 말한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으므로, 산짐승이라 하였음.
順治七年[15], 僧徒又爲重建玆寺, 移埋廟主於他處, 換置佛軀於王廟, 旣訖, 沙門法永, 袖其寺墓舊蹟, 淸記于余, 不敢辭詞薄,
순치7년(1650)에 승도들이 또 절을 중건하여, 위패를 다른 곳에 옮겨 묻고, 부처를 왕묘(王廟)에 바꾸어 두었다. 공사를 이미 마치고, 중 법영(法泳)이 그 절과 능의 옛 문적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므로, 감히 단문이라는 연유 만으로서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15] 순치7년(順治七年)=청나라 세조의 연호로서, 조선 효종원년(1650)에 해당함.
謹按本記, 山寺之以王名者, 乃首露王建廟之地, 仇衡王遜居之址, 興武王所창之寺, 新羅文武王所封之山, 高麗神宗大王重建之處, 上有王臺, 下有王陵, 中有王之畵像. 遺衣及所用弓劍之故也.
삼가 본기(本紀)를 살피건대 산사(山寺)를 왕으로 이름한 것은, 이에 수로왕묘(首露王廟)를 건립한 지방이요, 구형왕의 은거하신 옛터이요, 흥무왕의 창건한 절이요, 신라문무왕의 추봉한 산이요, 고려 신종 대왕의 증건한 곳이며, 산상에는 왕대가 있고, 산하에는 왕능이 있고, 중간에는 왕의 화상. 유의(遺衣) 및 사용하시던 활과 칼이 있는 연고이었다.
古者, 駕洛諸王遺蹟, 羅麗所賜之物甚多, 若王陵本蹟曰, 婆娑墓[16]中. 舍衛[17]之白玉猶有, 祗桓寺裡. 須達[18]之黃金尙存, 斯一句己知矣, 今則皆失於兵火, 只有二幅畵像[19]. 一件天翼, 두弓殘劍客一, 是亦子孫散四, 不能守護, 故命藏於木函中, 以待百世之後也.
옛날 가락국 여러 왕의 유적과 신라 고려에서 보내준 보물이 많았음은 왕능본적(王陵本蹟)에 말한 것처럼 『파사묘(婆娑匿王墓) 중에는 사위성(舍衛城)의 백옥이 오히려 있고 지환정사(祗환精舍) 안에는 수달(印度富者)의 황금이 아직 있다』고 하였으니, 이 한 구절로 이미 짐작할 수 있거니와, 지금은 다 난리에 잃어버렸고, 다만 두 폭의 화상과 한 벌의 왕의(王衣)와 좀먹은 활과 부서진 칼이 각각 하나씩 있으나, 이것도 또한 자손이 사방으로 흩어져 수호할 수 없으므로, 나무궤에 간직하여 백세의 후일을 기다리게 하는 터이다.
[16] 파사묘(波娑墓)=석가여래 때의 인도 파사익왕 무덤.
[17] 사위(舍衛), 지환사(祗桓寺)=지금 인도의 사혜마헤트에 있었다. 일명 지원정사(祗園精舍)라고도 함. 사혜트는 지원정사, 마혜트는 사위성(舍衛城)의 뜻임. 옛날 『지다』 태자의 땅을 사들인 급고독(給孤獨)이라는 장자(長子)가 정사(精舍:절)를 세워 석가에게 바쳤다 한다. 그리고 이정사의 북쪽에, 한층 높게 꾸민 『가닥디』라는 유적이 있는데, 석가가 24회의 안거(安居)를 지낸 곳이라 하여 가장 신성시한다. 이 유적 근처에는 석가가 지원정사를 떠났을 때, 스승을 생각하기 위하여, 그 제자인 아난(阿難)이 심었다는 보리수(菩提樹)가 높히 솟아 있었다고 하는데 이 지원정사의 북쪽 5리쯤에 사위성의 옛터가 있다고 이른다.
[18] 수달(須達)=혹은 급고독(給孤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지원정사를 세워서 석가에게 받혔던 엣날 인도의 큰 부호가 있었음.
[19] 이폭 화상(二幅畵像)= 지금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덕양전의 서쪽 영정각에 봉안된 『가락국 구형왕』내외분의 화상임.
[洪博士儀泳 王山尋陵記]
[홍 의영 박사가 지은 왕산 심능기]
往年戊午, 嶺南大旱 自春. 至夏季, 竟無點滴, 邑儒閔景元, 南士之望也, 與朋주潔齋전羞, 爲文求雨于陵之下, 未崇朝而大雨驟至, 閔滯雨不能歸, 館於王山寺,
작년 무오(1798)에 영남지방의 큰 가뭄으로, 봄부터 늦여름까지 끝내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읍유(山淸邑儒) 민 경원(閔景元)은 남쪽에서 명망 있는 선비였다. (6월4일에) 친구들과 더불어 정결히 재계하고 제물을 차례 놓고 글을 지어 능 앞에서 비를 빌었다. 새벽녘에 큰비가 쏟아지므로, 민은 비에 막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왕산사에서 체류하였다.
與寺僧, 說其靈異, 詢其古蹟, 僧曰古蹟誠多, 秘不敢發, 强以後, 出古木函, 경휼甚嚴, 遂排而啓之, 有沙門坦瑛山寺記一卷, 瑛乃百年前名釋(中略)
승려들과 함께 신비함을 말하면서 『고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승려들은 말하기를 『고적은 실로 많으나, 비밀이라서 발설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강력히 요구한 후에 나무궤를 내어놓았다. 자물쇠와 장식품이 매우 엄밀하므로 마침내 이를 비틀어 열었다. 중 탄영(坦瑛)이 지은 왕산사기(王山寺記)가 있었는데, 탄영은 곧 백년전의 명승(名僧)이었다.(중략)
當時奇偉之蹟, 受後昆無窮之饗也, 鳴呼異哉, 諸金遂以實狀告之, 道伯及本졸, 莫不欽聳稱奇, 禁其芻牧, 新其塋域, 去來文簿[20], 鄭重讚揚, 皆不可記焉.
당시 기이하고 거룩한 고적은 후손들의 무궁한 흠향을 받게 되었다. 아! 신비로운 일이다. 여러 김씨들이 마침내 실상을 보고하니, 관찰사 및 산청현감은 귀를 높이면서 신기하다고 일컬었다. 나무하기와 소를 금하고, 영역(塋域)을 새롭게 하도록 하였으니, 왕복문서의 정중한 찬양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20] 거래 문부(去來文簿)=정조22년(1798)에 구형왕능을 발견한 이후로, 관계요로에 왕복했던 문서를 말한 것으로, 이는 삼왕삼왕사적고(駕洛三王事蹟考)에 전부 수록되었다.
[駕洛三王事蹟考 券六 王系]
[가락삼왕사적고 권六 왕세계]
十世仇衡王… 正廟戊午, 因祈雨, 始顯靈, 自營邑. 轉移京司, 當저癸亥, 八路子孫, 改築荒園, 創建陵寢. 講堂. 廊舍. 門樓·
10대 구형왕… 정조 무오(1798)에 기우제로 말미암아 비로소 신령스러운 자취가 나타남으로, 본읍과 관찰부에서 서울에 보고하였다. 금상(今上:純祖) 계해년(1803)에 팔도(八道)의 자손이, 황폐한 능원을 고쳐 쌓았고, 능침과 재실과 문루(門樓)를 창건하였다.
( 출처 : http://www.kimheakim.com.ne.kr/index.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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