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남동창 이모저모

지리산 세진대에서(화남1회)

배꼽마당 2016. 5. 30. 17:45

 2016년 5월 28일 화남초등학교 총동창회 이후 화남 1회 동기들은 금서면 방곡 펜션에서 저녁 시간을 가졌고 다음날은 용유담위

강재기 친구네 산삼 농장 탐방을 했는데 그 길목에 부근의 유명 명소인 세진대 구경을 했다. 용유담이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운치있는

세진대는 약 1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 위의 세진대에서 엄천강, 법화산과 용유담의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있으며,

   약 400년된 큰 소나무가 웅장하게 서 있어 지리산 둘레길을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세진대 옆에는 바위 하나가 서 있는데 바위위에 덮개 같은 바위가 있어 장독바위라고 불리워지며, 병든 환자가 돌을 던져서

그 위에 얹으면 병이 낮는다는 전설이 있다. 세진대에서 2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지금의 국조단군성전인 『지리산마적천진전』은

본래 사지로서 옛날 휴천면 문정리의 법화사와 같은 시기에 창건한 마적사가 있었는데 그 당시 불교신자들이 마적사를 가기 위해 이곳을

지날 때 여기에 이르러 마음과 몸을 씻고 올라갔다고 하여 그 후손들이 이 뜻을 기리기 위해 그 자리에 세진대라는 세글자를 각자하여 잘 보존하고 있다.


 

 

 


세진대기


강지주(姜趾周)

강지주(姜趾周 1856∼1909) : 본관은 진주(진양), 자는 우여(遇汝), 호는 적은(迹隱). 갑오경장 이후 세상에 뜻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문집에 《적은유고(迹隱遺稿)》가 있다. 1904년 세진대 각자를 새겼다.

  

방장산은 바다 가운데 삼산의 하나로 크고 깊고 넓기가 인간세상에서 으뜸이다. 거기서 가장 높은 곳을

 천왕봉이라 하며, 천왕봉에서 시작된 높고 가파른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그 한 가지가 다시 북쪽으로 십여 리를 달려 불룩하게 솟았으니 각산(角山)‧배산(背山)이라 한다. 마을이

 있고 마적동(馬跡洞)이라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이다.

 

북쪽으로 법화산 기슭을 바라보면 높고 가파른 산이 이마 앞에 솟아 있고, 엄천의 강물이 그 사이를 가르고

 흐르는데 그 발원은 백운봉이다. 날아내려 폭포가 되고 휘돌아 흘러 못[潭]이 되었다. 여기에 이르러

맑은 물이 세차게 흘러 몸을 씻고 헤엄칠 수 있다. 산은 높고 골은 깊어 빼어나게 웅장하고 경치는 맑고

 곱다. 그윽하고 깊숙한 골짜기가 넓게 열려 어딜 가나 고기 잡고 나무하고 밭 갈고 독서하기에 마땅치

 않은 곳이 없다.

 

마을에서 왼쪽 아래로 몇 백 보를 돌아가면 톱으로 자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둥글고 평평하고 넓어 삼사십

 인이 앉을 수 있다. 또 몇 걸음 되지 않는 근처에 맑은 물이 쉼 없이 솟는 샘이 있다. 이에 나는 샘에서

양치하고 바위를 쓸고 앉아 두루 돌아보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만약 이 바위가 이름난 사람이나 통달한

 선비를 만났다면 마땅히 《석기(石記)》나 《석보(石譜)》1)에 나오는 태호석이나 황산석과도 서로

 겨룰 수 있었을텐데, 외딴 숲속에 자리하여 황량한 땅 무성한 수풀 사이에 묻혀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깝구나!”

 

그리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부여하여 『세진대(洗塵臺)』라 하였다. 인근의 여러 벗들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문건을 작성하고 약간의 재물을 모아 해마다 모여 강학하는 밑천으로 삼고자 하였다. 또 벼랑에 나란히 성명을

 새겨 넣는2) 일을 마치고는 강학하고 술을 마시고 그 일을 가지고 시를 읊었다. 또한 세진대라 명명하게 된

뜻을 여러 동지들에게 고하였다.

 

「우리들은 불행히도 나라의 전성기에 태어나지 못해 땅바닥을 치고 배를 두드리며 태평가3)를 부르지도 못하고,

멸정(蔑貞)4)의 시대를 당하여 영락하여 산꼭대기와 물가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것은 이 바위와 다를

바가 없으니 후세의 어느 누가 (우리가) 이곳에서 이 일을 논한 것을 기억하겠는가?

옛날 퇴계옹은 천연(天淵)에서 갓끈을 씻었고 남명옹은 덕천(德川)에서 마음을 씻었다.5) 양 선생은 도가 크고

덕이 온전하였음은 물론 살아서 밝은 시절을 만났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지금은 비린내 나는

티끌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과 귀신이 구분되지 않으며 뜻 있는 선비가 은하수를 끌어와6) 도성을 씻고자

하여도 그럴 수 없으니 차라리 저 소부와 허유7)처럼 맑고 차가운 물에 귀를 씻고 어지러운 세상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나는 들었다. 《대학》의 밝은 덕을 밝히는 공부도 거울의 먼지를 제거하면 다시 밝아지는 것과 같다고. 대개

이 마음의 진체(眞體)는 본래 스스로 밝고 깨끗하고 맑아 그저 순수한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와 한 몸처럼 같은데,

 기질에 얽매이고 물욕에 가려지면 때로는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그 본체는 원래부터 한결같다.

군자는 이에 깨끗하게 다스리는 공부를 더욱 갈고 닦아 사욕을 이기고 욕심을 막으며, 몸을 깨끗이 하고 덕을

 닦으며, 하늘의 어두운 구름을 몰아내고 연못에서 흐리고 더러운 것을 제거하면 더러운 찌꺼기가 깨끗이

변하여 본체가 드러나 눈앞의 사물을 응대할 때 천리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의 온전한 체[全體]와 큰 작용[大用]8)이 밝아지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대학》의 『탕반 장구(湯盤章句)』9)에서 매우 긴요하게 설명하기를, “사람이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악(惡)을 제거하는 것은 마치 그 몸뚱이를 씻어 때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 구절을 깊이

연구하여 완미(玩味)한다면 옛사람들이 공부하던 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천연에서의 탁영(濯纓 *갓끈을 씻는 것)

 덕천에서의 세심(洗心 *마음을 씻는 것) 역시 그 근원은 반드시 여기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공부하여 밝히고자 하는 것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대저 이름이란 것은 실질에 대한 손님이다. 공연히 공부한다는 이름만 있고 일을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 대에는 세상의 어지러운 일만 쌓일 것이네. 나는 여태껏 티끌세상에 빠져 있다가 이제 여러 군자들을

따라 노닐면서 뱃속의 먼지와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의리(義理)에 흠뻑 젖어 다시는 더러움에 물들거나 세속에

휩쓸리는 상태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이어서 이 대에 올라 노닐면서, 착실하게 이 단서를 공부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에서도

광풍제월(光風霽月)10)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며, 또 갈고 닦으면 문득 옥병 속의 맑은 얼음 같은 기상을 보게 될

것이니, 우리 동지들은 어찌 서로 권하며 힘쓰지 않겠는가?

 



세진대기(洗塵臺記)


강용하(姜龍夏)

강용하(姜龍夏 1840∼1908) 조선 말의 유학자. 자는 덕일(德一), 호는 무산(武山), 초명은 강신영(姜愼永).

본관은 진주(晉州), 엄천강변 연화동(蓮花洞)에 살았다. 문집으로 《무산유집(武山遺集)》을 남겼다.

 

우리 집안의 종손 우여君(강지주)은 중간에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방장산 마적동에 은거하였다. 마적동은 고승 행호(行乎)2)가 머물렀던

곳이며, 세상에서 지승(地勝 *경치가 뛰어난 땅)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동네는 산의 북쪽 기슭에 있으며 문필봉 아래 평탄한

곳으로 안산(案山 *풍수에서 맞은편에 있는 산)은 법화산이며 그 아래는 용유담이다. 시원하게 트이고 고절(孤絶)하기가 비할 데

 없어 길을 가다 지나는 사람들이 거의 신선세계에 비긴다. 그래서 승경(勝景)으로 이름을 드날리고 있는 것인가?

 

그는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 입산하였는데 매양 부모와 자매의 살아생전의 일을 말할 때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으니

 효도와 우애가 도탑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돌아가신 조부모와 부모의 장지가 좋은 자리가 아님을 근심하여 몇 번이나 이장하면서도 가세가 기우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고, 조상의

 제례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을까 근심하여 어려운 살림에도 힘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었으니 선조를 위하는 정성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또 종질(從姪)과 생질이 의탁할 곳이 없음을 가엾게 여겨 땅을 개간하여 빚을 갚고 이웃에 베풀도록 살림을 경영하게

 하였으니, 이는 화목함이 두텁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자식을 가르칠 땐 일념으로 금석을 뚫을 듯이 하여 마침내 공을 이룰 수 있었다. 일을 당하면 굳세고 과감하여 이해(利害)로써 하지

 않고, 강제로 빼앗긴 게 있거나 위급하고 곤란한 지경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 일처럼 여겨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다.

자갈밭을 일구고 띠집에 살면서 비록 자급하지 못하는 가난한 살림에도 손님이 오면 친소(親疏)를 따지지 않고 가진 것이 있고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웃는 얼굴로 두 손을 움켜쥐고 맞아들이니 사람이 지나다가 난초향 가득한 방으로 드는3) 것과 같았다.

 

이 모든 행실이 밝게 빛나 기록할 만하고, 이런 행적과 이런 경계라면 띠끌 세상에서 멀리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집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아름답고 세진대라는 좋은 이름을 받은 바위가 있는데,

 그리로 가 날마다 동지들과 거닐며 산려소요(散慮逍遙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소요함/출전:장자,천자문)한다. 몇 등급 위의

 고인(高人)이 아니라면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속세의 먼지는 안과 밖이 각각 다르게 있는데, 안의 먼지는 속세의 물욕에 더럽혀진 마음을 말하며, 밖의 먼지는 속세의 거칠고

잡스런 일을 말한다. 안과 밖의 먼지를 제거할 줄 알면 먼지를 씻는 데[洗塵] 능하다 할 수 있다. 밖으로 외물의 얽매임에 초연하고

안으로 의리에 유연(悠然 *침착하고 여유 있음)하다면 이것을 진실로 세진이라 할 것이다.

원컨대 그대는 “윗일(*외물에 초연한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 할 수 있지만, 아랫일(*의리에 유연한 것)에 대해서는 나도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할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세진대의 주인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니, 힘 쓰시게나!

 

나에게 그대는 백 세대를 내려오는 오랜 의(誼)가 있으므로 서로 친하게 지내며 자주 어울려 함께 대(臺)에 올라 바람을 맞고

 회포를 논한 것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여 훗날 산중의 고사로 갖춰 두고자 한다.

(자료 : http://jiri99.com/bbs/board.php?bo_table=jiri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