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향자료

[스크랩] 유두류록(민재남, 1849.4.17)

배꼽마당 2012. 12. 4. 21:46

유두류록(민재남, 1849.4.17)

 

  어느 날 옥동(玉洞)에 사는 노인 노석룡(盧錫龍)이 한 길 남짓의 지팡이를 짚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때마침 낮잠에 한창 빠져 있었다. 그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면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낮잠이 웬 말인가!” 하고 하기에, 깜짝 놀라 일어나 그를 맞이하였다. 그는 자리에 앉은 후 지팡이를 곁에 바짝 붙여두고 애지중지하였다. 지팡이의 굵기는 반 움큼이 채 안되며 무게는 한 근을 넘지 않았고, 표면과 뼈대에는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었다. 목을 박아서 장식한 듯 들어서 땅을 짚으면 쇳소리가 났다. 내가 그 지팡이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나무입니까? 돌배나무가 아닙니까. 배나무는 곧고 길게 자라는 것이 보기 드문데, 이처럼 수풀 우거진 깊은 산골에서 나무꾼에게 베어지지 않고 노인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 물건이 노인을 만난 것은 행운일 것입니다. 그러나 탄실할 만한 점이 있으니, 만약 질탕하게 유람하는 젊은이가 짚고서 높은 산에 오르고 긴 호수를 건넌다면 천 리를 가벼이 여기고팔도를 두루 다니며 무한한 명승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보는 것은 위남(渭南)ㆍ섬중(剡中)을 벗어나지 못하니 애석하군요. 제 주인을 만나지 못했구나, 이 지팡이여!”라고 하였다.

 

  옥동 노인이 발근하며 말하길 “내 나이 일흔 둘로, 지팡이를 짚고 향리를 출입할 때부터 늘 나와 함께 했던 것이 이 지팡이라네. 앉을 때엔 한자리에 앉았고, 일어나면 걸음을 함께 했고, 새들이 곡식에 해를 끼치면 휘둘러서 쫓아냈고, 길손이 길을 물으면 들어서 길을 가리켰지. 논밭에 물을 댈 때면 이 지팡이를 짚고 물소리를 듣고, 고을 관아에서 호출을 하면 이 지팡이를 짚고 갔었네. 몸이 피곤하여 걸음이 느려지면 두 손으로 양 끝을 잡아 허리에 끼우고 몸을 폈다네. 혹 건널 수 없을 듯한 험한 시내나 다리 없는 시내를 만났을 적에는 내 몸을 이 지팡이에 맡기고서 비스듬히 기대어서 기운을 내고 소리를 지르며 힘차게 한 두 길쯤은 뛰어넘으니, 노년의 즐거운 일이 이 밖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나는 이 지팡이와 서로 생사를 함께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네가 갑자기 멀리 유람하는 일로 이 지팡이의 공로를 질책하려 하니, 자네의 괴이함을 좋아함이 심하네.”라고 하였다. 

 

  내가 일어나서 사과하길 “성인을 배우는 자가 어찌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평소 기이하고 오래된 것을 좋아하여 종종 세상 사람들이 뜻을 거스르니, 괴이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지목하셔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무릇 사람이 만나고 못 만나는 데에는 일찍 만나는가 늦게 만나는가 하는 차이가 있고, 그 물건이 쓰이고 못 쓰이는 데에는 오래 쓰이고 잠시 쓰이는 구별이 있습니다. 존귀한 사람, 비천한 사람, 어진 사람, 불초한 사람을 막론하고 늙으면 지팡이를 짚지만, 한 지팡이를 반드시 오래 짚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물건에 나아가 느낌이 있어 제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는 탄식을 한 것이지, 주인이 제 물건을 만나지 못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공로가 있는 지팡이로는 갈파(葛坡)의 화룡장(化龍杖), 총림(叢林)의 해호장(解虎杖), 이교(圯橋)의 단려장(丹藜杖), 화계(花溪)의 도죽장(桃竹杖),이 있습니다. 미생로(靡生蘆)나 정공등(丁公藤), 같은 것은 모두 이미 세상에서 일컬어집니다. 돌배나무로 지팡이를 만든 것은 지금 처음 보니, 괴이함을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 그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하물며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백리 밖을 나가보지 않았으니, 지팡이에게 수고로움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 지팡이가 노인을 위해 애쓰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노인께서는 갑자기 청산을 베고 영원히 누워 일어나지 못하신다면 이 지팡이는 누구와 함께 어느 곳을 다니겠습니까. 지금 노인장을 보니 아직 강건하십니다. 비록 멀리 다니기는 힘들겠지만 가까이에 방장산(方丈山)이 있습니다. 방장산은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종종 선계를 유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산 속에는 또한 불사약(不死藥)이 난다고 합니다. 다행히 이때에 지팡이를 짚고 그 산에 올라 불사약을 캐어서 이 나라 백성을 오래 살게 한다면 남들과 우리들 모두 무진장 장수를 할 것이니, 이 지팡이의 공이 어찌 작다 하겠습니까. 이 지팡이로 하여금 제 주인을 만나지 못하여 후세에 일컬을 것이 없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옥동 노인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싱긋 웃으면서 좋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드디어 구절죽(九折竹)을 꺾어서 지팡이를 만들어 노인과 함께 남쪽으로 길을 나섰다. 때는 기유년(1849) 윤4월 17일이다.

 

  오후에 덕천(德泉)을 지나 구사촌(舊沙村)으로 향했다. 2~3리쯤 가서 장현(場峴)을 넘었다. 곧장 가는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말미암아 오른쪽으로 나아가니, 한 나무꾼이 묻기를 “어디에 사시는 양반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이 길을 따라가면 오르내리기가 매우 힘드니, 왼쪽으로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우리가 유람객인줄 알면 되었지, 어찌 사는 곳과 가는 방향을 묻는가.”라고 하자, 나무꾼이 말하길 “저는 길을 잃으실까 염려가 되었기에 감히 그리 여쭌 것입니다. 또한 속담에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고 하였으니,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가 작은 바위틈을 가리키며 말하길 “이곳에 샘이 있는데 물이 매우 맑고 시원합니다. 목이 마르지 않더라도 손으로 떠서 마셔보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말하길 “표주박으로 마시는 것이 좋겠지만 가지고 오는 것을 잊었네. 자네가 손으로 떠서 마시라고 가르쳐 주니, 혹시 표주박이 없는 줄 미리 알았던가?”라고 하자, 나무꾼이 웃으며 말하길 “우연히 들어맞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손을 씻고 물을 떠서 마시니 과연 맛이 좋았다. 옥동 노인에게 말하길 “한번 마셔보십시오.”가로 하니, 그가 물을 마신 후 말하길 “이 물로 술을 담그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주객(酒客)은 물을 보면 늘 술을 떠올리니, 이른바 외물을 보고 마음이 끌린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서로 더불어 한바탕 웃었다.

 

  지팡이를 들어 허리에 대고 몸을 풀었다. 길을 가면서 「초은조(招隱操)」 한 곡을 읊었다. 중대촌(中垈村)을 지나는데, 한 줄기의 산기슭이 달려 나갈 듯하다 도로 서려 있었다. 언덕 위에는 풀밭이 있어 앉아서 연초(烟草)를 태웠다. 소년ㆍ소녀 3명이 소를 몰고 아래로 내려오니 저녁나절이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어나서 산등성이를 빙 둘러 선영에 이르러 성묘를 하였다. 산지기의 집으로 향하니, 그의 노모가 나와서 맞이하며 말하길 “우리애가 잠시 사냥을 나갔습니다. 꿩이라도 한 마리 잡는다면 상에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 산지기가 총을 메고 돌아왔는데, 빈손이었다. 옥동 노인이 탄식하며 말하길 “식지(食指)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주인의 잘못이 아니지만 길손은 배를 곯게 생겼구나.”라고 하였다. 노모가 저녁밥을 차려 와서는 찬이 없다고 말하였다. 한 그릇의 계란찜을 보니 매우 묽었다. 내가 웃으며 말하길 “계란이 달고 연하니 꿩보다 못할 것이 업소.”라고 하였다. 저녁밥을 먹은 후 문밖으로 나가 바위 위에 앉았다. 그 때 산속의 달이 은은하고 풀숲의 새들이 서로 지저귀니, 가득히 산중의 정취를 얻은 듯하였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18일. 향양동(向陽洞)으로 향했다. 겨우 8~9세쯤 되는 산지기의 아들이 책을 끼고 앞서 가기에 “너 어디 가느냐?”하고 물었더니, 오선생(吳先生)에게 배우러 간다고 하였다. 그가 오의지(吳義之) 시임을 직감하고 아이를 따라서 그를 방문하였다. 숲 속에 초가 한 칸을 새로 지었는데, 매우 툭 트이고 환했다. 잠시 앉았다가 춘라대(春蘿臺)로 가려하자 오의지 씨가 의관을 정제하고 나왔으며, 또 박생(朴生)이라는 자도 함께 따라나섰다. 외대(外臺) 위에 이르러 술을 가져오게 하여 옥동 노인에게 권했다. 술잔이 돌아서 나에게 왔는데, 내가 말하길 “저는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며 옥동 노인에게 권했더니, 마시고 또 마셨다. 거나하게 취해가는 맛은 내가 마시는 것 못지않았다. 내대(內臺) 안으로 들어가 벽면을 살펴보니, 소학사(蘇學士)의 친필 현판에 ‘자연동천(紫烟洞天)’이라 쓰여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의 것이지만, 남은 향기는 엊그제 쓴 것과 같았다. 오래도록 들여다보다가 이리저리 거닐며 시를 읊었다.

 

  춘라대 위에 올라가니 세 칸짜리 작은 집이 있었다. 망건을 쓴 노인이 우리를 보고서 갓을 다시 쓰고 계단을 내려와 맞이하였다. 정자에 앉아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노인이 말하길 “손님과 는ㄴ 동갑이니, 감히 정을 담은 술 한 잔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뜰을 내려다보니 높에 석대를 쌓았는데, 열 길쯤 됨직했다. 시냇물이 석대 아래로 흐르는데,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단지 시냇물 소리가 산과 골자기에 울리는 것만 들렸ㄷ. 만약 동파(東坡) 노인이 이곳에 왔다면 틀림없이 “석종산(石鍾山)을 다시 보는구나.”라고 했을 것이다. 석대 옆에는 숲 위로 새순이 솟는 십 수 줄기의 긴 대나무가 있었다. 뜰 가에는 몇 떨기의 꽃이 필 듯 말 듯 붉은 빛을 머금고 향기를 토해내었다. 양쪽 언덕의 아름다운 나무는 석대를 끼고 그들을 드리웠는데, 햇빛 한 점 들지 않아 바람이 불지 않아도 서늘한 기운이 생겨났다. 방장산에 나무하러 다니는 사람은 반드시 이 누대를 거쳐서 가는데, 노랫소리가 물소리에 어우러져 악기 반주 없이도 절로 어울리니, 기이하고 빼어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내가 세 칸 집의 주인에게 말하길 “예로부터 사나수의 빼어난 경치는 반드시 주장하는 이가 있어서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고담(鈷潭)이 종원(宗元)을 얻어서 세상에 드러났고, 난정(蘭亭)이 일소(逸少)를 만나서 이름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의 무한한 명승이 궁벽한 산 황량한 골짜기에 쓸쓸히 있는데, 어찌 연하(烟霞)를 단장하고 화죽(花竹)을 노래하지 않으십니까?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춘라대를 알게 하면 훗날 우리나라 문장가들의 글이 어찌 유종원(柳宗元)이나 왕희지(王羲之)와 같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주인이 말하길 “소학사가 먼저 하였잖소.”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길 “노인께선 이곳에서 생장하고 이곳에 사시니, 책상 위의 물건처럼 친근하실 것입니다. 어찌하여 호서의 고인인 소학사에게 양보를 하십니까?”라고 하자, 주인이 말하길 “소학사 같은 글재주가 없음이 한스러울 따름이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소학사의 문장은 제가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으나, 벽에 걸린 네 글자는 다만 지나간 일일 뿐입니다. 소학사가 평생 산천을 두루 다니면서 글을 짓기도 하고 글씨를 남기기도 하였지만, 이런 것을 가지고 주인이라고 말한다면 학사 당시의 팔도 명승은 모두 학사의 소유라고 할 것입니까? 노쇠하셨군요, 주인이시여. 또한 글재주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남에게 좋은 것을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겠지요.”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와 작별하고 동쪽으로 향하던 신촌(新村)을 지났다. 신촌은 진사 김양직(金養直)이 예전에 살던 곳이다. 김진사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시문을 잘 지었다. 그는 본래 호남사람으로 이곳에 와서 우거하였는데, 늘그막에 성균관에 들어갔다고 한다. 길거이의 주막에 이르러 점심밥을 먹었다.

 

  밤머리재를 바라보며 옥동 노인은 앞으로 나아가려 하다가 다시 머뭇거리면서 불만스런 소리로 “나는 이 고개가 험하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되었네. 어찌 여든을 바라보는 늙은이를 산 밑에서 쓰러져 죽게 하려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를 부축하여 밀면서 말하길 “‘태산의 정상은 이미 태산에 속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으며, ‘천천히 걸으면 수레를 탄 것과 같다’ 고 하였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반드시 정상에 이를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은 뒤로한다는 공부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옥동 노인이 큰 소리로 말하길 “그대는 성인을 배우는 자이네. 성인을 배우는 자가 또한 스스로 죽도록 남을 내버려둔다고 배웠는가? 내가 만약 살아서 돌아간다면 다시는 자네와 더불어 상대하지 않겠네.”라고 하였다. 내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팔십 노인을 상대할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길을 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수고로움을 잊기 위해서인데, 도리어 나무라시니 절대로 다시는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가서 정상에 이르렀다. 옷을 벗어 나무 끝에 걸어두고, 옷깃을 헤치고 바람을 쐬었다. 한참 후에 녹동 노인이 이르러 호기롭게 크게 웃으며 말하길 “나도 무사히 올라왔네. 과연 자네 말대로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은 뒤로 하는 공부일세.”라고 하였다.

 

  노각정(老角亭)에 이르자 한 나무꾼이 바위 모퉁이와 언덕 옆에 나뭇가지를 쌓아놓고서 태우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묻자, 그는 콩을 심으려 한다고 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말하길 “산속에서 먹고 사는 것은 이렇게 힘든 일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화경(火耕)’이라는 것이다. 가로 흐르는 시내를 끼고 서쪽으로 향했다. 김경집(金敬集)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아무도 없어 적막하였다. 한 칸의 오두막은 소나무로 시렁을 얹고 대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은자(隱者)가 사는 정취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시 한 수를 지었다.

 

  그대로 대원암(大源菴)으로 향했다. 시내를 건너 숲속에 이르자 구불구불한 노송 한 그루가 시냇가에 드리워져 볼만하였다. 다시 시 한 수를 지었다. 주막에 들어가 옥동 노인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나는 물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안동의 김생(金生)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길 “빨리 달려가야 승려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저녁에 시내를 건너 삼장촌(三壯村)을 지났다. 저 멀리 5~6층쯤 되는 탑이 보였는데, 그곳이 바로 옛 절터임을 알 수 있었다. 계곡 옆의 길을 따라 돌아 들어가니 점입가경이었다.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이 없어서 말을 타고 갈만하였다.

  구불구불한 골짜기에 동문(洞門)이 열렸다 닫혔다 하였는데, 산이 서쪽에 있으면 시내가 동쪽에 있고 시내가 서쪽에 있으면 산은 동쪽에 있어 개의 어금니처럼 들쭉날쭉 서로 엇갈렸다. 이와 같은 것이 예닐곱 굽이나 되었고, 거리는 15리쯤 되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니 길 옆으로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 그늘이 하늘을 가렸다.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와 반갑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골짜기가 깊어 인적이 고요하니 신선과 함께 진경을 유람하는 것과 다름없어 경물을 찾아다니는 흔한 유람과는 달랐다. 옥동 노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하길 “내 겨드랑이 한번 살펴보시게. 날개가 생기지 않았는가? 문득 내 나이를 잊어버리겠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길 “밤머리재를 바라보며 하셨던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이 같은 선경을 제 덕에 보셨는데, 돌아가면 저를 상대하지 않으실 테지요.”라고 하자, 옥동 노인이 말하길 “나의 망발이었네.”라고 하였다.

  절문에 다다르자 대숲의 바람에 안개가 쓸려가고, 경쇠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절 앞의 누각에 오르자 한 승려가 달려 나와 우리들에게 예를 갖추며 말하길 “멀리서 오시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녁 공양이 막 시작되었습니다.”라고 하며 우리를 인도하여 방안으로 들였다. 채소 반찬이 먹을 만하였다. 피곤하여 드러누워 곯아떨어졌다.

  19일. 새벽 종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귓전에 들렸다. 승려 50-60명이 분주히 물을 길어다 바쳤다. 나는 뒷짐을 지고 마루 위를 서성거리며 춘첩시(春帖詩)를 보았는데, 다음과 같았다.

고요한 밤 차가운 물 물고기는 입질 않아,

빈 배 가득 부질없이 달빛만 싣고 돌아오네. 

 

  시어가 매우 산뜻하였으나 춘첩의 의미는 아니었다. 후원에 이르자 백발의 노승이 석장(錫杖)을 내려놓고 합장을 하였다. 나를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가서 책 한 권을 꺼내놓았는데, 궐리사(闕里祠)의 실기(實記)였다. 궐리사는 지금 화성부(華城府) 오산(梧山) 북쪽에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공씨(孔氏)들이 매우 번창하여 정조(正祖) 말엽 선비들의 요청으로 규장각(奎章閣)에서 공자(孔子)의 초상을 베껴 와 후손들이 사는 곳에 모셔두고서 궐리사라 하였다.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였는데, 단구(丹邱)의 수령을 지낸 공윤동(孔允東)이 그 사람이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받들어 읽어보고 말하길 “ 이 책이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습니까?”라고 하자, 노승의 속성(俗姓)이 공씨인 까닭에 들여왔다고 하였다. 그 또한 자못 글을 아는 자였다. 내가 말하길 “그대가 비록 공자의 후예이나, 출가를 했으니 길을 달리 한 것이오. 여래(如來)를 조(祖)로 삼고 석호(石虎)를 종(宗)으로 삼으니, 숭상하는 바는 능엄경과 원각경(圓覺經)이면 충분할 것인데, 어찌 이 책을 절간의 책상 위에 두었소? 그대는 공자의 죄인이며, 불가도 어지럽히는 무리라 할 만하겠소.”라고 하였더니, 노승은 나의 말에 마뜩잖아 하였다. 내가 탄식하며 말하길 “예전에 한창려(韓昌黎)가 문창(文暢)에게 글을 보내어 그의 묵명유행(墨名儒行)에 대해 안타까워했는데, 지금 그대도 그것에 가까울 따름이오.”라고 하였다.

  그때 석남(石南)에 사는 한씨(韓氏) 노인이 곁에 있었는데, 그의 의관이 매우 예스러웠다. 그가 돌아보며 나에게 말하길 “이곳은 기이하고 빼어난데다 때마침 고요하니, 하루 정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내가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서로 더불어 탑전(塔殿)에 올랐다. 한씨 노인이 말하길 “이 암자는 방장산 동쪽 기슭에 있는데, 산이 감싸고 물이 감도니 이른바 호중천지(壺中天地)라네. 승려들이 이 절에 거처한 이래로 유람객들이 계속해서 찾아오니 그들을 대접하느라 지친다네. 그러나 승려들이 흩어지지 않고 암자 또한 빈곤하지 않으니, 승려들의 명당으로는 이 산에서 제일이네. 또한 탑전의 터는 풍수가들이 황금거북의 왼쪽 발바닥이라 여기는 곳일세. 도량이 정경하기 때문에 그곳에 사리를 모셔두었다네.”라고 하였다. 탑의 옥개는 9층이고, 제4층의 전면에 한 치 정도의 금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제6층도 그러하였다. 승려의 말로는 사리를 안치한 곳을 표시한 것이라 하였다. 자잘한 돌을 둥글게 펼치고 그 동 위에 부들로 짠 자리를 깐 곳은 육시(六時)마다 향적(香積)을 올리며 절하고 염불하는 곳이다. 장죽(長竹) 네 개를 탑 주변에 둘러놓았는데, 탑과 한 길쯤 간격을 두었고, 높이는 땅에서 한 자 남짓 되었다. 대체로 유람객들이 함부로 들어가는 것을 금한 것이다. 옆에는 작약ㆍ모란ㆍ접시꽃ㆍ불두화 및 난 세포기와 수 백 그루의 대나무를 심어놓았고, 그 외의 이름 모를 화초 또한 여러 가지였다.

 

  탑 서쪽에 사립문 하나가 열려 있었는데, 문 밖은 천 길 절벽이었다. 긴 상수리나무 수십 개의 속을 파내어 그 절벽에 연결시켜 놓았는데, 그 속으로 물이 흘러내려 부엌 앞의 나무 물통으로 들어갔다. 콸콸 쏟아져 내리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 곡루(曲樓)를 나와서 소학사(蘇學士)가 지은 현판의 시를 보며 오랫동안 탄식하였다. 나는 일직이 노운보(盧雲甫)와 함께 이 절의 청파상인(淸坡上人)을 방문하여 며칠 동안 함께 어울리며 이 현판의 운자로 연구(聯句)를 지었었다. 문득 10년 전의 일이 떠올랐는데, 그 사람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슬픈 마음으로 다시 차운하였다.

  옥동 노인이 웅얼거리다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하길 “시 짓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 한스럽도다. 무한한 절경을 눈에만 담고 입으로 읊을 수가 없으니, 귀머리나 장님이 보고 듣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애통하구나. 내가 산수를 등지는 것이지 산소가 어찌 나를 저버리는ㄴ 것이겠는가. 그러나 이 자리에 자네가 있으니, 시 주머니를 활짝 열어 지나오면서 속된 안목을 깨뜨린 것들을 빠짐없이 그려서 돌아가 머리맡의 기이한 볼거리를 만든다면, 내 마땅히 자네 곁에서 그것을 가리키며 ‘이 봉우리 이름은 모모(某某)이고 시내 이름은 모모(某某)이며, 누대가 몇 곳이고, 암석은 몇 개이며, 좋아할 만한 꽃과 새, 볼만한 대와 나무 등을 일일이 말로써 품평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나의 무지함을 비웃지 못할 걸세. 그것이 어찌 글재주 없는 자가 영화를 함께 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그림에 대해서는 비슷하게 하는 것도 아직 배우지 못했지만, 시문에 대해서는 조금 흉내 낼 줄 압니다. 그러나 어찌 시속의 그림을 바라겠습니까. 한 번 그렇게 해 보지요.”라고 하였다.

  20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용추(龍湫)를 찾아갔다. 풀숲 길과 경사진 벼랑에서 헤매어 갈 길을 찾지 못하였다. 권소유(權少游 )ㆍ최죽하(崔竹下)가 일찍이 용추를 읊은 시를 보았는데, 오래되어 무슨 운자를 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용(龍)’자를 가지고 지팡이를 짚은 채 시를 지었다.

 

  율전곡(栗田谷)에 이르자 양쪽으로 촌락이 있었는데, 서쪽 촌락은 개울가에 임해 있어 땅이 평평하였고, 동쪽 촌락은 언덕 위의 지세가 비스듬한 곳에 있었다. 산비탈의 조각조각 밭은 바위를 둘러싼 곳에 보리가 누렇게 익었고, 가파른 비탈에는 콩이 푸르렀다. 긴 다리 하나를 건너 오른쪽으로 동자 서쪽 봉우리 정상이 보였다. 그 위에 사기 동이를 짊어진 동자가 보여 풀을 헤치고 올라가니 인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만 한 줄기의 긴 연기가 나무 끝에 엉켜 있었다. 잠시 후 쟁기를 지고 수풀 상이에서 나오는 한 농부를 보았는데, 검은 소가 앞에 가고 누런 송아지가 뒤를 따랐다. 산꼭대기를 돌아서 산비탈의 밭을 바라보니 그림 속 풍경 같았다. 그때 아침 햇살이 잠깐 비쳤는데, 풀에 맺힌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아름다운 나무가 길에 그늘을 드리우고, 큰 바위는 시내에 널려 있었다. 폭폭수가 쏟아지고 못의 물이 쏜살같이 흘러 매우 기이한 절경이었다. 한동안 앉아서 구경을 하며 낭랑하게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맨발로 나타났다. 그에게 묻자, 성은 김씨이며 동도(東都)에서 유두리(楡杜里)로 옮겨와 산 지 벌써 8년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좋은 쪽으로 변한 것이 아니군요. 좋은 나무에서 나와 깊은 골짜기 속으로 옮겨 갔군요.”라고 하자, 김생(金生)이 말하길 “나라님의 땅이 아닌 곳이 없으니, 어딜 간들 그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고기 잡고 나무하는 데 금하지 않고, 농사 짓는 데 세금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이미 왕의 백성이니 어찌하여 세금이 없기를 바라시오. 그대는 유두리를 무릉도원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동도에도 산은 없지 않은데, 어찌하여 이 먼 곳 까지 와서 살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그가 말하길 “바야흐로 산을 나가고자 하였지만 둥지를 옮긴 새는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지라, 짐짓 머물며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달 밝은 밤 고요할 적마다 ‘촉도로 돌아가야지. 촉도로 돌아가야지.’라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가 구슬퍼서 내 마음도 심란해집니다. 그러나 가랑비가 숲을 지나가고, 흰 구름이 처마에 머무르고, 쏟아지는 물이 흘러내리고, 예쁜 꾀꼬리가 지저귀고, 나무꾼의 노래가 깊은 산 깊은 숲에서 서로 들려오면 저도 모르게 산 속 생활의 흥취가 뭉클뭉클 일어납니다. 나는 무릉도원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속세와 매우 떨어져 있는 점은 반드시 이곳과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쉬운 것은 복숭아꽃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무안해하며 “그대는 진실로 은자입니다. 속세를 멀리 떠나 돌아가지 않겠구려.”라고 하였다.

 

  그와 함께 1백여 보를 가니 갈림길이 나타났는데, 왼쪽으로 가서 시내를 건넜다. 시냇가에는 초가집 한 채가 있었고, 벽이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차림이 매우 깔끔한 한 노파가 네모난 병에 술을 거르고 있었다. 옥동 노인은 술 세 사발을 벌컥벌컥 마신 뒤 말하길 “누가 산중에 별미가 없다고 말했는가. 또 산중에 귀한 물건이 있구나. 별미는 마셨지만, 귀한 물건은 가까이 하기 어려우니 한스럽구나.”라고 하자, 노파가 그의 농담을 알아채고 말하길 “사람들이 모두 친히 할 수 있다면 어찌 귀한 물건이라 하겠습니까? 별미를 맛본 것으로 만족하시지요.”라고 하였다. 서로 한바탕 웃었다. 내가 김생에게 술을 권하자 두 잔을 마시고는 매우 좋아하였다.

   정상을 향해 1리쯤 가니 골짜기 속에 꽤 넓은 한 구역이 만들어졌는데, 위아래로 마을이 있었다. 위쪽 마을은 여섯 집, 아래쪽 마을은 열세 집이었다. 김생이 처마 밑의 바위에 의지한 움막으로 들어가서 잠시 후에 나왔다. 오른손에는 화로를 들고 왼손에는 연초를 쥐고 와서 말하길 “깊은 산속 곤궁한 민가라 손님을 대접할 것이 없으니 심히 부끄럽고 한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을 뒤의 봉우리를 넘는데, 골짜기에는 나무가 없고 풀이 무성하여 길이 끊어졌다. 지팡이로 헤쳐 가며 정상에 다다랐다. 가는 끈 같은 길이 매달려 있었고, 아래로는 천 길 낭떠러지였다. 세 사람이 우리를 향해 올라오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웃통을 벗고 각각 한 짐씩 등에 지고 있었는데, 목욕을 하듯 땀을 흘렸다. 맨 앞사람이 부채를 흔들며 큰 소리로 외치는데 노래 같기도 하고 곡소리 같기도 했다. 옥동 노인이 말하길 “저것이 이른바 발광하여 소리친다는 것이라네.”라고 하였다.

  원근을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얽혀 있어 저마다 기이함을 드러내었다. 어떤 것은 뻗어 나가고 어떤 것은 서려있어, 날아가는 듯 누워있는 듯하였다. 동쪽으로 향하려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기도 하고, 잠시 낮아졌다가 다시 솟구치기도 하였다. 읍을 하며 공손히 나아가는 듯한 것도 있고, 의젓하게 제자리에 서 있는 듯한 것도 있었다. 온갖 기세와 형상에 눈과 마음이 모두 기뻐서 소득이 있는 듯하였다. 내가 감탄하며 말하길 “문장 또한 그러합니다. 강건함에 뛰어나면 섬세함이 부족하고, 내용에 상세하면 수식이 거칠어집니다. 문장이 화려한 것, 부화한 것, 한아(閒雅)한 것, 호준(豪雋)한 것을 서로 답습하지 않고 각각 일가(一家)를 이룹닏. 고인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산에다 비의하여 말한다면 태사공(太史公) 같은 사람이 바로 천왕봉입니다.”라고 하였다. 멋대로 율시 한 수를 읊었다.

 

   봉우리에서 내려와 오봉촌(五鳳村)을 지나는데, 마을 앞의 정자가 매우 시원하여 자리를 깔고 조금 쉬었다. 정자 아래에는 농부 두 사람이 보였는데, 한사람은 모를 심고 한사람은 모를 지고 있었다. 산속의 편안함과 한가로움으로 인해 자득한 마음이 있는 듯하였다. 화림암(花林菴)에 이르렀는데, 담장과 벽이 무너지고 적막하여 인기척이 없었다. 곡루(曲樓)에 오르려는데, 가시덤불이 계단을 막고 있었다. 그것을 피하여 부엌의 서쪽으로 돌아 들어가니, 머리가 벗겨진 노승이 해를 향해 졸고 있었다. 갓 머리를 깎은 승려가 암자 안에서 나와 인사를 하며 말하길 “벌써 정오 무렵이 되었는데, 요기는 하셨습니까?”라고 하여, 아직 못했다고 말하였다. 그대로 누대 위에 누어서 달게 잠을 잤다.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어 일어나니, 밥상이 앞에 놓여 있었다. 음식이 매우 담박하였다. 승려가 말하길 “소승이 잠시 암자 안에서 설병(雪餠)을 만들었습니다. 설병으로 요기를 하시라고 청해야 마땅하나, 그것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감히 이렇게 밥을 지어 올렸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아깝구나, 밥 짓기 전에 물어보지 않은 것이. 더구나 내가 특히 좋아하는 것이었다니.”라고 하였다. 마침내 떡 세 조각을 샀다. 승려가 손바닥만한 칡잎 예닐곱 장으로 떡을 싸서 소매 속에 넣어주며 말하기 “가다가 허기가 지면 먹을 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길을 가다 방곡(芳谷)에 들러서 나의 벗인 하내범(河乃範)을 찾아갔더니, 진양(晋陽)으로 출타했다고 하였다. 도중에 그를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사점막(沙店幕)을 지나는데, 얼굴을 아는 노파를 만나, 소매 속의 떡을 꺼내서 주었다.

 

    자례촌(自禮村)에 이르러 선영에 성묘를 하고, 양씨 어른을 방문하였다. 범천(帆川)에 이르렀다. 나의 벗인 박극로(朴極老)는 호남(湖南)에서 새로 이사 온 사람이다. 그의 집을 물어보니 바로 그 집 문 밖이었다. 고운 베저고리와 푸른 치마를 입은 여종이 뜰 안으로 인도하며 말하길 “손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길 “대포(大浦)에서 왔네.”라고 하였다. 주인이 안에서 나오며 말하길 “오늘 행차는 나를 위해 일부러 찾아온 것인가 지나가다가 들른 것인가?”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길 “그대의 질문은 내 우정이 소원한가 친밀한가를 시험하여 후하게 대접할 것인가 박하게 대접할 것인가를 결정하려는 것인가? 나의 천성은 간결하고 오만한데다 사람을 사귈 적엔 담박하여 친밀함이 없네. 범범한 사랑으로 보면 온 나라 사람이 모두 형제인데, 어찌하여 사이가 멀다고 지나가다 들르고, 친하다고 일부러 찾아오겠는가?”라고 하였다. 박극로가 말하길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는 평소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문득 이렇게 찾아와 주니 놀라고 기쁜 마음에 갑자기 물었을 뿐이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길 “그러한 줄 알고 있었네. 어찌 자네를 일부러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며 서로 손을 꼭 붙잡았다. 마침내 억지로 나의 의관을 벗기고 베개를 주었다.

 

   문득 푸른 옷을 입은 동자 두 명이 오더니 박극로에게 총죽(叢竹)으로 싼 것을 바치면서 말하길 “우두(牛頭)에서 보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을 펴 보니 물고기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길 “나는 그 동자의 말을 듣고 처음에 육고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물고기인가?”라고 하자, 박극로가 말하길 “우두는 마을 이름이네. 친분이 있는 아무개가 나를 위해 이것을 보냈다네. 이 철의 이 물고기는 오히려 안읍(安邑)의 돼지간보다 낫고, 강주(江州)의 국화주에도 뒤지지 않는다네.”라고 하였다. 급히 푸른 치마를 입은 여종을 불러 회를 떠오게 하여 안주로 삼았다. 나에게 술을 권하였는데, 술은 마시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박극로가 말하길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겠지만, 미인이 권하는 것을 어찌 무시할 수 있는가?”라고 하기에, 억지로 몇 숟가락 떠먹었다. 취기가 올라 밤새도록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조반을 먹은 후 손을 마주잡고 송림(松林)을 나와 강을 따라 내려갔다. 길을 돌아 서당에 이르자 단성(丹城)의 권생(權生)도 그곳에 있었다. 다시 술을 찾아 작별을 하였다. 강가까지 나와 길을 일러주었다. 흙과 돌이 뒤섞인 돈대 하나가 물가에 임해 있었는데, 마치 돛단배가 바다로 나가는 듯하였다. 범천(帆川)이라는 마을 이름은 이 때문이다. 물가를 따라 길을 찾아 나섰다. 도중에 시를 지었다.

 

  가다가 주암(舟巖)에 이르렀는데, 의관을 차려입은 십수 명이 정자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곧 상사(上舍) 정아호(鄭鵝湖), 하우계(河愚溪) 노인 등이었다. 바야흐로 천렵(川獵)을 하려 하였는데, 나에게 함께 놀자고 억지로 권했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출발하려는데 노인이 자리에서 큰소리로 말하길 “이번 유람은 젊은이와 짝이 되어 욕본 것이 많았네. 이 벗들을 만난 것이 바로 내가 뜻을 얻은 때이니, 자네 혼자 가게나. 자네 혼자 가시게.”라고 하며 돌배나무 지팡이를 두드리다가 휘둘렀다. 내가 온화한 말로 대답하길 “산속을 함께 유람하면서 좋은 경치를 보고 좋은 음식을 먹었는데, 무슨 욕을 보았다고 도리어 적반하장이십니까?”라고 하자, 온 좌중이 크게 웃었다.

  드디어 작별하고 저녁 무렵 집에 도착하였다. 유람한 날짜는 모두 5일이고, 거리는 1백여 리였다.

 

 

 

자료: (선인들의 지리산유람록3, 최석기 )에서 발췌함

 

 

 

 

출처 : 화남초등학교 총동창회(경남 함양 유림)
글쓴이 : 김용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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